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223화 (223/298)

223화 한 명 그리고 백성(1)

안색은 창백했다.

시야는 흐렸다.

입술이 덜덜 떨렸다.

소리가 심하게 날 정도로 턱이 떨렸다.

부들부들 팔이 떨렸다.

경기를 일으키듯 다리도 떨렸다.

아니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한 명이 아니었다.

열 명도 아니었다.

족히 백 명은 넘는 규모였다.

아니, 고을의 백성이 모두 이러했다.

허름한 옷으로는 살을 찢을 것만 같은 추위를 막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고을 곳곳에서는 작은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불꽃이 만들어 낸 온기에 몸을 녹였다.

“아, 아끼지 말고 모두 사용해.”

“그, 그래. 언제라도 구할 수 있어.”

그들의 곁에는 절대 부족하지 않은 수량의 땔감이 쌓여 있었다.

적어도 수일은 아낌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만일 땔감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추위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필요한 가정에 불과했다.

물론 모든 것이 넉넉한 건 아니었다.

거센 추위는 필연적으로 굶주림을 동반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고통받을 때는 크게 인지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적당하게라도 추위를 버틸 정도가 되자 굶주림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겨울에 땔감을 원 없이 사용하는군.”

“끌. 다 죽게 생겼는데 이런 호사를 누리니 참으로 괴이하지 않나?”

“적어도 얼어 죽지는 않을 것이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얼어 죽는 것과 굶어 죽는 것 중에서 뭐가 나은지 이번에 알게 되겠군.”

물론 모닥불의 온기가 아무리 강렬할지라도 경험하지 못한 추위를 모두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얼어 죽을 수준이 아니었기에, 대화는 굶주림이 점차 다가오는 현실을 반영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산이라도 타면서 뭐라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

“괜히 무리하지 말게. 이런 추위에 발이라도 헛디디면 크게 다치니까.”

“그건 그렇지만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겠나.”

“그저 조심하라는 말을 한 걸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십수 명이 옹기종기 붙어서 불을 쐬고 있을 때였다.

이쪽으로 마구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저러다가 넘어지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위태로운 생각이 들 정도로 급히 달려왔다.

“이, 이보게들!”

그런데 너무나도 묘했다.

목소리는 분명 다급했으나 평소 느껴 보지 못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아니, 세상은 이를 환희와 기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본능이었다.

더 빨리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의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서, 서원에서 구휼을 시작한다고 하네.”

“뭐……?”

“이 사람들아! 서원에서 구휼을 시작했네. 서둘러 가야 하네.”

구휼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지역의 사족들이 쌀을 나눈다는 의미였다.

“저, 정말인가?”

“내가 난리에 자네들에게 이런 농을 왜 하나!”

“아, 알겠네.”

조금 전까지 굶주림을 노래하던 백성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아니, 삶에 대한 강렬한 희망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관청에도 들르게.”

언제였는지는 모른다.

어느새 지척에 다가와 있던 향리가 말을 건넸다.

“관청이라고 하셨습니까.”

“사또께서 뭐라도 나누라고 하셨네. 빨리 오면 혹시 아는가. 두꺼운 솜이불이라도 구할지.”

“!!!”

“하지만 모든 백성에게 나눌 정도로 넉넉하지 않으니 염두에 두게.”

“그, 그리하겠습니다.”

겹경사였다.

이보다 기쁠 수는 없었다.

백성들은 환하게 웃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지금 그들의 고민은 오직 한 가지였다.

“서, 서원 먼저 가야겠지?”

“나는 관청을 먼저 갈 것이네.”

어디를 먼저 가느냐였다.

조선의 백성으로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가지는 즐거운 고민이었다.

물론, 선택도 그들의 몫이었다.

누가 대신할 게 아니었다.

즉, 조선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실질적인 손해를 보지 않는 선택이었다.

태조 이래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그냥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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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들이 격리된 곳의 공기는 축축했다.

그 무거움은 몸을 움츠리게 하는 추위조차 후순위로 밀릴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생기도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상황만 본다면 어둡고 침울해야 할 것인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짧은 시간 스치듯 겉모습만 본다면 분명 활기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간헐적으로 이어진 병자들의 대화가 그랬다.

“자네, 눈에 힘 좀 주게.”

“허. 내가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네.”

바로 지금도 털보 수염을 한 병자의 말에 마른 체형의 백성이 답했다.

목이 텁텁하였기에 말이 부드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희미한 미소를 동반했기에, 대화는 시작이 어렵고 소통이 불편할 뿐이었다.

물꼬가 트이면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자연스럽게 잘 이어졌다.

“자네 눈이야말로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

“하하하! 자네 눈이나 보고 말하게. 꼭 죽은 사람 눈 같은데? 자네들도 말해보게. 내 말이 틀렸나?”

“둘 다 눈동자가 썩었어.”

“자네야말로.”

“아니, 물어봐서 대답했는데 왜 이러나?”

“시끄럽네.”

“이런.”

이 또한 묘했다.

분명 병자들의 목소리에는 힘이라는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닥을 뚫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저음이었다.

그런데 내용만큼은 참으로 정겨웠다.

절대로 역병의 창궐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자라고 느낄 수 없었다.

물론 서로를 바라보는 병자들의 눈동자에서 생기나 희망 따위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자신들도 죽음이 점차 다가온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분명 그러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울면서 욕하며 보내는 것보다 자네들과 농이라도 하니 꼭 나쁘지는 않군.”

털보 수염 병자의 말에 미세하게나마 온기가 자라났다.

그러자 마른 체형의 병자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나는 하필이면 자네가 옆에 있어서 참으로 불편한데.”

“꼭 먼저 죽게나. 내가 춤이라도 출 테니까.”

“이런. 애석하지만 자네의 썩은 눈을 보면 내가 더 오래 살 거 같은데?”

“다시 말하지만 자네 눈이 더 썩었네.”

“춤은 출 줄 아나?”

“뭐든 자네보다 나을 것이네.”

“어림도 없네.”

잊을 만하면 시작되는 두 사람의 다툼에 다른 병자들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또, 이 대화는 늘 다른 이가 말을 꺼내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거. 죽는다는 말 좀 집어넣게. 나는 살아볼 생각이니까.”

“역병에 걸린 사람의 꿈이 너무 야무지군.”

“생각해 보라고.”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땔감도 넉넉하고 식량도 충분해. 난 평생 이런 호사를 누린 적이 없네.”

“허…….”

“태어나서 여태껏 죽도록 고생만 해도 늘 부족한 삶이었어. 굶고 굶고 굶었어. 한데, 지금 보라고. 너무 넉넉하지 않나?”

“이보게…….”

“약재도 넉넉해. 매끼 잘 챙겨 먹고 약탕을 먹으면 살 수도 있어.”

“…….”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격리되었으나 처능의 배려로 식량과 땔감이 넘쳐났다.

심지어 약재도 넉넉했기에 맥없이 죽음만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즉, 희망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버텨 볼 만했다.

그러나 누구도 쉽사리 그의 말에 호응하지는 않았다.

살아날 가능성이 컸다면 이곳에 격리될 일도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버틸 수 있다는 말은 그저 경험하지 못한 풍요로움이 있다는 말에 불과했다.

이는 또 너무나도 슬픈 일이었다.

죽음을 앞에 둔 순간에서야 누군가로부터 사람으로서의 대우를 받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를 상기했을까?

애잔한 침묵이 무겁게 생겨났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만일 죽어야 한다면 여기 있는 약재와 식량을 다 먹고 죽을 거야. 땔감도 다 사용해서 난생처음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 볼 거라고.”

그의 목소리는 떨림이 가득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희망을 노래한 게 아니라 삶에 대한 애착 혹은 미련을 말한 것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아니, 필시 그러했을 것이다.

“죽을 거면 자네들이나 죽게! 나는 무조건 살아서 나갈 거니까.”

“…….”

“…….”

“…….”

그때 다른 병자가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이 맞아. 나도 안 죽을 거야.”

현실을 극복하자는 분수령이었을까?

아니면, 꼭 듣고 싶었던 희망이었을까?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말이 터져 나왔다.

“암. 나도 꼭 살아서 나갈 거야.”

“그래야지. 나갈 때 남은 쌀이며 약재며 다 챙겨 갈 것이네.”

“하하하. 관청에서 다 뺏을 건데?”

“그게 무슨 말인가? 관청에서 내어준 게 아닌데 왜 가져가?”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언제 안 그런 적이 있었나?”

“됐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네.”

병마가 이미 크게 번졌을까?

그의 목소리는 쇠를 긁는 듯했다.

하지만, 누구도 불편함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나도 잘 알고 있네. 여기에 격리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런데도 저항 없이 온 이유가 무엇이겠나. 내가 떠나야 내 새끼들이 사니까.”

그간 위생을 보급한 조정의 노력은 백성의 의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이 역병에 걸린 병자였으나 식솔들은 아니었다.

발 빠른 격리와 조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역병이 고을 전체를 집어삼킨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물론,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백성으로서의 오랜 삶은 무의미한 저항은 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걸 알게 했다.

또, 의도한 건 아니겠으나 결과적으로

“나라에서 우리를 포기한 건 맞지. 그런데 나 살자고 내 새끼가 역병에 걸리는 꼴은 못 보지.”

언제부터였을까?

쇠를 긁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물기는 역병보다 진하고 빠르게 번졌다.

“이랬는데 살아나면 여기 있는 건 다 나눠 가져도 되는 걸세. 잘 보라고. 챙겨만 가면 몇 달은 굶을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거 아니겠나?”

“…….”

“처능 대사께서도 약조하셨어. 살아만 있으라고. 하면, 꼭 방법을 찾아서 오겠노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다들 괜한 생각하지 말고 살 생각이나 해.”

“끌. 다 죽게. 나 혼자 살아서 남은 식량 독차지할 거야. 그러니까 다 죽게나.”

“이런. 내가 거기까지 생각은 못 했네. 그러니 자네가 죽게.”

“하하하.”

대화의 내용에 희망이 담겼다고 하여 무거운 가슴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넉넉한 쌀과 약재를 언급한다고 하여 역병이 가져온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고 하여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적어도 고통에 이기지 못하거나 공포에 휩싸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는 없을 것이니 말이다.

죽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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