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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25화 (225/298)

225화 한 명 그리고 백성(3)

백발이 성성한 사대부는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어림도 없소!”

목을 긁어내는 듯 퍽퍽한 목소리였다.

엄청난 기백이 담긴 건 아니었다.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위엄도 없었다.

그러나 좌중(座中)을 장악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관복을 입은 관인, 승복을 입은 승려 그리고 백성들 모두 그의 눈치를 살폈다.

노승 한 명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 사찰에는 방이 많습니다. 임시로 거주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또한, 여러 백성을 한곳에 모아낼 수 있으니 어찌 문제가 있겠습니까.”

“오랜 세월 우리 조선은 백성의 이주를 엄격하게 통제했소. 한데, 고을의 백성을 모두 사찰로 보냈을 때 탈이 나면 어찌할 것이오?”

“소승들이 실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관원도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말을 똑바로 들으시오. 나는 법도를 이른 것이외다.”

“…….”

노승은 고소를 삼켰다.

걷잡을 수 없는 추위와 기근이었다.

심지어 인근 군현에서는 역병까지 창궐했다고 한다.

이럴 때 백성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이를 제기하자 현령은 장고 끝에 동의했다.

하지만 사족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일찍이 우리는 중대본의 방침에 모두 협조하였소. 하여, 군현의 운영에 법도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소.”

그랬다.

이곳은 중대본의 결정 사안을 모두 집행하여 수령의 통치에 자문 이상의 영향력을 낼 수 있도록 권한이 부여되었다.

단지 고을의 양반이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통치의 방법을 두고 토론과 설득이 이뤄져야 할 상황이 된 것이었다.

다 좋지만 이런 경우 시일이 너무 소모된다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더욱이 지금처럼 한시가 급할 때는 더 그랬다.

“현령께서는 내 말에 이견이 있소?”

“논의해볼 성질이라고 여깁니다.”

“허.”

“선생. 중대본은 기근 대비는 총력전으로 임하라고 하였습니다. 재원은 물론이거니와 인력까지 말입니다. 나 역시 사찰로 백성을 이동시키는 일이 썩 내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군현을 다스리는 목민관으로서 당장 이보다 좋은 수가 없으니 결정한 겁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 고을의 사족들도 이를 동의해주시길 바랍니다.”

현령은 난처한 듯 웃었으나 말은 단호했다.

즉흥적인 선택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가를 개방할 것이외다.”

이어진 사대부의 말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현령은 눈을 껌뻑이며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듣고만 있던 승려들도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도 벌렸다.

이들의 반응을 본 사대부는 미간을 더 찌푸리며 말했다.

“부족함은 있었으나 백성을 보살핀 건 우리 사대부였소. 나라 전체가 이토록 어지러운데 어찌 수수방관하겠소?”

“아.”

“서원과 사가를 모두 개방할 것이니 현령은 협조를 부탁하오.”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사찰로의 이동도 진행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현령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 역병의 창궐을 막는 것도 목민관의 주된 역할입니다.”

“해서요……?”

“백성이 흩어질수록 창궐의 위험은 줄어들 겁니다.”

“…….”

“서원과 사대부가 그리고 사찰로 고루 나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

핵심이었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사대부는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현령은 반기듯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은 백성을 세 무리로 나누어서 일을 집행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일이 순탄하게 마무리될 때였다.

향리 한 명이 다가와서 현령에서 말했다.

“무당이 굿을 하고 있습니다.”

“허. 이 난리가 났는데도 백성을 현혹하는 무리가 있단 말인가.”

현령은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다.

승려와 사족도 헛웃음을 지으며 뒤를 따랐다.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적어도 기근을 극복하는 논의의 장에서는 모두 같은 편이었다.

이는 옳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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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온몸이 떨리는 거센 추위였다.

그런데도 상당한 수의 백성이 운집한 상태였다.

얼핏 보더라도 수십 명은 되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무당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추위를 몰아내듯 격렬하게 칼춤을 췄다.

그 아슬아슬함에 백성들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도 탄성을 쏟아내기 바빴다.

칼춤을 보고 있노라면 굶주림과 추위가 모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칼춤을 추던 무당이 갑자기 멈췄다.

그런데 눈동자가 흰자만 보였다.

보고 있노라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움찔한 백성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좌중을 제압한 무당은 다시 칼을 휘두르더니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손을 씻어라!”

“!!!”

“조상신이 노하셨다. 손을 씻어라.”

“!!!”

“그 더러운 손으로 잠을 청하면 신께서 노여워 역병을 내릴 것이다!”

“!!!”

지켜보던 사족과 승려 그리고 현령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저들 역시 하늘과 싸우는 아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이는 가히 총력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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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된 병자들은 모두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참을 수가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냥 울부짖었다.

대성통곡했다.

“아직…….”

누군가로부터 물기로 젖은 목소리가 흘렀다.

참으로 흘렀다.

물이 흐르는 건지 말이 흐르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약재가 산처럼 쌓여 있어.”

“…….”

“식량도 많아.”

“…….”

“자네……. 죽어도 다 먹고 죽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

그랬다.

얼마 전 간절하게 삶에 대한 애착을 말하던 이였다.

그는 분명 죽더라도 약재와 식량을 다 먹을 것이라고 했다.

또……

“사용할 땔감이 이렇게 많은데 이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으면 어찌하는가.”

땔감도 다 사용하고 죽겠다며 외치던 이였다.

그리고

“우리가 다 죽어도 자네는 살아서 나갈 거라고 했어.”

기어이 살아서 바깥세상을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하하하…….”

먼저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굵은 진한 눈물이 흘렀다.

“하하하…….”

웃음소리는 쥐어짜듯 나오는 게 아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이의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그래서 맑았다.

또 그래서 부드러웠다.

“내가 그럴 생각이었는데 자네들 생각해서 양보하는 걸세.”

“이 사람아…….”

“어릴 때 생각나나?”

모두 동향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왔다.

평생을 함께한 사이였다.

다른 이들은 모두 울면서 고개를 격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지독하게 배고팠어.”

“알지. 잘 알지.”

“하루라도, 한 번이라도, 한 끼라도, 배불리 먹어 보는 게 소원이었지.”

“그렇지. 그랬어. 배불러 보는 소원이었어.”

다들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대화하며 과거를 떠올려야 한다는 걸 말이다.

함께 보내온 시간을 공유하며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배웅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모두 공감하며 대꾸했다.

“맛있었어.”

또 그래서 너도나도 앞다퉈 손을 잡았다.

“억지로 배를 채운 게 아니라 맛있어서 배를 채웠네.”

미약하게라도 온기가 남은 손을 느끼는 마지막이었다.

“역병에 걸려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였으나 행복했어.”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없을 순간이었다.

“사실 그래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네.”

그래서 그랬다.

“마지막에 호강하고 가니 참으로 좋지 않나?”

걷잡을 수 없는 아련함이 공간을 집어삼켰다.

끝내 참지 못한 누군가가 구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아. 그래도 살아야지.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말게.”

“막상 이리되니 그런 생각이 들어. 살면 뭐가 바뀌나?”

“이 사람아…….”

“안 죽고 살면 사람처럼 살 수 있나?”

삶의 괴로움이 흐르듯 나왔다.

“그냥 또 고생만 할 게 뻔하지 않나? 차라리 지금 이렇게 죽는 게 덜 고생하는 걸세.”

“…….”

“계속 말했지 않은가. 평생 구경도 하지 못한 호사를 여기서 누렸어.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네. 그러니 이만하면 됐어. 나는 그만 고생하고 싶네.”

“…….”

“그래도…….”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은 천천히 오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내 자네들이 고생하는 건 꼭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천천히 오게.”

순수한 호의였다.

“한데, 말일세. 살아서 나가면 내 식솔들 가끔 얼굴이나 봐주게.”

간절한 바람이었다.

“대단하게 챙겨달라는 말이 아니네. 그냥 숨은 붙어 있는지 가끔 봐주기나 해주게.”

절절한 부탁이었다.

“당연히 그러겠네.”

“걱정하지 말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살 수 있으니 힘내라는 괜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미 목소리에는 힘이 빠졌다.

눈은 반 이상 감긴 상태였다.

손에서 힘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죽음이 지척인 상태였다.

그러하니 하고픈 말을 다 하게 해주는 게 옳았다.

“평생…….”

목소리는 점차 끊어졌다.

한마디, 한마디가 버거워 보였다.

“이렇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를 보살펴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고

“내 새끼들은 걸어 다닐 때 보살핌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이제

“천천히 오시게.”

그의 말은 끝이 났다.

작금의 조선이 백성인 그에게 해준 건 결국 여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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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몸을 쉬고 싶었다.

앉아서 짧은 여유라도 되찾고 싶었다.

나는 더 걷지 않고 육조 거리의 적당한 곳을 찾아서 걸터앉았다.

생각에 잠겼다.

사실 조급함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누가 됐든, 무엇이든 작게라도 성과가 도출되길 바랐다.

그래야만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람의 영역에서 잘 안 풀리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조정과 민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집행하는 중이었다.

손을 움직여 서찰을 펼쳤다.

드디어 어선이 출항했다는 내용이었다.

또, 사대부와 승려 그리고 무당까지 크고 작은 일을 수행했다.

여러 계층이 결합하였으니 필연적으로 알력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재해 극복에는 모두 최선을 다해서 나서니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서얼의 활약이 눈부셨다.

그들은 한동안 마비됐던 파발을 온몸을 던져서 정상화했다.

하루를 간격으로 동일 내용을 전하는 서얼의 물량 공세는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위생국이 어떤 성과를 내어 역병을 잠재우길 바랐다.

상념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딱 이때 파발이 달려오고 있었다.

늘 그랬다.

저토록 다급한 파발은 늘 비보(悲報)였다.

불안함은 필연적으로 치솟았다.

그저 내 예상이 비껴가기만을 바라였다.

어느새 파발이 지척에 당도했다.

앳된 얼굴을 한 그의 입에서 언어가 구현됐다.

“삼남 지역에서 홍수가 발생했습니다.”

“!!!”

정말…… 정말 미친 듯 몰아치는구나.

숨이 턱턱 막혔다.

진심으로.

호흡을 애써 바로 하며 물었다.

“범위는 어찌 되는가?”

“거의 전역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

죽으라는 법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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