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하늘이여, 땅이여(2)
다시 장계가 올라왔다.
긴장하며 펼쳤는데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다.
한숨도 안 나왔다.
하늘의 횡포에 고통받는 백성의 삶이 적나라하게 적혔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이를 알고 싶었다.
고통을 표현한 글자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게 훨씬 나은 상황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
이 시절 군현의 사정을 세세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장계였다.
역병이 창궐하면서 속도가 늦어졌다.
서얼을 투입하여 느리게나마 복원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또 아예 다른 변수였다.
“……글자를 전혀 알아볼 수가 없소.”
그랬다.
엄청난 폭우에 장계가 젖었고, 글자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러하니 우리로서는 해당 군현의 상황을 파악할 길이 없어졌다.
또 다른 형식으로 고립되고 있었다.
이럴 때는 결국,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또한 문제가 있었다.
해당 군현에서 장계를 가져온 파발꾼들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관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급히 투입된 서얼이었다면 무탈할 것이다.
그들은 신분이 서얼일 뿐 양반보다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는 말 그대로 파발꾼이었다.
하필이면 이랬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답변은 궤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뭐……?”
“몇 개 군현은 수령과 사족까지 익사했습니다.”
컨트롤 타워가 무너졌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너무 황당하여 멍하게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정신 차리며 물었다.
“하면, 장계는 누가 작성했나?”
“장계는 생존한 하급 관리가 작성한 겁니다.”
“……수는 많은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군현은 누가 통치하나?”
“생존한 향리와 사족이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상 백성을 통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엄청난 수의 유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최악에서 최악이 더해지고 걷잡을 수 없는 더 최악의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어디가 최악인지, 어떤 모습이 최악의 상황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백성은 어찌하고 있는가.”
“…….”
“서둘러 말하라.”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뭐……?”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
떠돌 수 있는 여건도 안 된다고 했다.
이보다 기가 막힐 수가 있는가.
“그래서 모든 백성이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불평불만도 표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군현의 수령과 다수의 사족까지 익사했다.
지배층까지 죽어 나가는 압도적인 재앙은 백성의 불만까지 잠식해버린 것이다.
“백성 중 누구도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무기력해진 것이다.
생존에 대한 희망이 상실된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기에 백성이었습니다.”
사대부보다는 백성에 가까운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말 한마디에 절망스러운 당시의 상황이 너무나도 잘 담겨 있었다.
내 심장을 아프게 할 정도였다.
“아니, 백성이기에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무기력해졌다.
하지만, 사실 확인은 정확하게 이어져야 했다.
“많은 백성이 굶주렸을 것이다. 구휼은 진행될 수 있는 상황인가?”
“군현의 비축미는 모두 폭우가 삼켰습니다.”
“비상시 조창(漕倉)의 식량을 사용해도 될 것이다.”
“소인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근의 조운선까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타지의 규모나 피해까지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보고 들은 상황을 전달하는 게 한계이니 말이다.
그래도 물었다.
“쌀을 옮길 방법이 없다면…….”
“송구합니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없습니다.”
“…….”
“대감. 소인은 본 사실을 그대로 전해드리는 것입니다.”
“…….”
내가 아무래도 미친 게 분명했다.
충격과 충격이 이어졌기에 이성을 잠시 상실한 게 분명했다.
조운선이 떠내려갈 정도면 조창의 곡식이 멀쩡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한마디로 해당 군현은 ‘물’만 남은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대감.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졌습니다.”
너무나도 참담한 보고였다.
붉어진 눈시울이라도 숨기고 싶었다.
천장을 바라봤다.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모두 천장을 바라봤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내렸다.
“그대로 구제(救濟)는 이어져야 하네.”
“…….”
“전해주겠나?”
“소인은 보고 들은 걸 전하는 사람입니다. 꼭 그리하겠습니다.”
“고생하게.”
그가 물러났다.
“…….”
“…….”
“…….”
“…….”
나는 먼저 언급했다.
“장계의 소실은 국법으로 엄히 다스리게 되어 있소.”
당연한 일이었다.
장계는 왕이 확인해야 할 핵심 문서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조선이라는 나라의 특성상 반드시 오늘의 일은 문제가 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아니었다.
무조건 가능했다.
“이를 문제 삼는 관리가 있다면 공들이 관복을 뺏어서 불태워 버리시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더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구태여 지금 어떤 말을 하는 건 괴로움만 가중할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늘 우리는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족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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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龍顏)은 참담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아니, 고통스러웠다.
붉어진 눈시울은 어심이 얼마나 괴로운지 분명하게 알리고 있었다.
“…….”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군왕이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밀어낼 시간을 보장하는 것이 유일했다.
“그러고 보니…….”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이것도 사치라는 걸 문뜩 깨달았소.”
“사치라고 하셨사옵니까.”
“고통스러워하며 침묵하는 행동이 사치지요.”
“…….”
“내가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추위에 떨고 홍수에 모든 걸 잃은 백성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오. 나는 대비하고 해결해야 하니 말이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설프게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이연의 심리상태가 그 정도로 고통스럽다는 뜻이니 말이다.
또, 말이 이어지면서 이연은 자세를 고쳐 잡고 의연함을 보였다.
군왕으로서 책무를 수행하고자 마음을 가다듬은 것이다.
그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위생국의 모든 인력을 급파하시오.”
“……모든 인력을 이르셨사옵니까.”
“내의원의 의원도 최소한의 인력을 제외하고 모두 급파하시오.”
“전하. 그리한다면 도성을 방비할 수 없사옵니다.”
“본부장. 도성은 역병이 창궐하지 않소.”
“예……?”
“사람이 어찌 역병을 막을 수 있겠소? 하지만, 도성은 유독 그 피해가 적었소. 왕이 역병에 노출된 적도 없소. 대신도 마찬가지였소. 참으로 괴이한 일이지만 위생이 보급되면서 알았소. 단지 신분으로 얻은 좋은 위생의 결과만은 아니었소. 그저 도성이 그만큼 철저하게 관리되기 때문이오.”
“…….”
“위생이라는 개념이 없던 과거에도 도성은 무탈했소. 그러니 최소한의 태세만 갖추고 모두 보내시오.”
중대본이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한다면 왕은 방안을 보태거나 덜어낸다.
중대본이 수량을 구체화해도 왕은 보태거나 덜어낸다.
즉, 지금 이연은 모든 패를 던진 것이다.
“대신 도성은 철저하게 통제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것만은 막지 않을 것이외다. 최소한의 방비는 있어야 할 것이니 말이오. 그리고…….”
이연이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마찰하며 말했다.
“중대본의 방향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소.”
“어인 하교이십니까.”
“삼남 지역의 홍수는 당장 우리가 감당할 수 없소. 이견이 있소?”
“이미 범람한 강을 무슨 수로 막겠사옵니까. 안정될 때까지 버티는 것이 유일하옵니다.”
“그렇소. 조정이 할 수 있는 건 구휼미를 보내어 아사를 막고, 의원을 보내어 역병을 제압하는 것이외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우리가 홍수에 대처하는 방책의 실체는 재원의 사용이 전부였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더라도 할 수 있는 건 계속 눈을 크게 뜨는 것이었다.
“해서, 나는 중대본의 방향에 손을 대고자 하오.”
“이르시옵소서.”
“방한 대책은 조정이 역량을 더 집중한다면 성과가 크게 나올 수밖에 없소. 죽게 될 백성을 구할 수 있으며, 죽지 않아도 될 백성을 놓치지 않을 것이외다. 하여, 나는 삼남 지역의 홍수보다 방한 대책에 집중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오.”
방한 대책은 조정의 관리가 실질적으로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았다.
간단하게는 땔감을 수월하게 확보하는 일부터 관리의 손을 타야 한다.
“사안의 심각성을 편중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하게 나누는 것이오.”
“신은 어명을 수행할 것이옵니다. 하여, 신이 긴히 고할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이오?”
“일찍이 상인 변승업과 김근행은 동북면으로 진출하고자 하였사옵니다.”
“동북면이라…….”
잠시 고민하던 이연은 금방 의미를 파악했다.
“초피 따위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군요. 한데, 그곳은 청국이 통제하며 관리하지 않소이까.”
“그러하옵니다. 그들은 대청 전면 무역을 명분으로 일을 도모할 듯하옵니다.”
“상단의 무리가 양국 간의 첨예한 외교 갈등을 고려하지 않는군요. 그러나…….”
이연은 복잡한 정치 공학을 한 번에 밀어냈다.
“백성을 추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소.”
“그러하옵니다. 신이 은밀하게…….”
“됐소. 조정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시오.”
“예……?”
“곧장 상단을 보내시오. 만일, 청국이 문제 삼으면 대충 절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오.”
“…….”
“청국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신단을 보내서 겁박하는 게 유일하지 않소이까. 어차피 전쟁을 일으킬 것도 아니외다. 그러니 나는 백 번이라도 절하고 통곡할 수 있소.”
“전하…….”
“그러니 그냥 집행하시오. 굳이 불필요한 갈등으로 시일이 지체되는 게 두렵다면, 수백 명의 상인을 백성으로 위장하여 두만강을 넘게 하시오. 본국의 재해로 넘어간 유민처럼 보인다면 어찌 청이 겁박할 수 있겠소?”
엄청난 외교 갈등을 동반할 수도 있다.
어쩌면 기껏 성사한 대청 전면 무역까지 무산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연은 이를 강행하라고 했다.
심지어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우리는 청 태조의 사당을 건립할 제후국이니 말이외다.”
잠시 잊고 있었다.
청이 주도하는 중화의 질서에서 우리 조선이 어떤 위치에 있게 되었는지 말이다.
나도 모르게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예조판서 윤선거가 귀국길에 구휼미까지 가져오면 참으로 좋을 것 같사옵니다.”
“지금 제후국이 위태로우니 대국의 위신을 챙기고자 하지 않겠소? 아니어도 상관없소. 언제 우리가 우리 백성의 삶을 타국의 보살핌에 맡겼소?”
“이런. 신이 크게 실언했사옵니다.”
“하면, 곧장 집행해야 할 것이외다.”
“신이 어찌 어심을 거스르겠사옵니까.”
“대궐의 기둥을 뽑아가도 좋으니 수립하고 집행하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전하.”
그래.
우리는 아직 멈출 수 없다.
이연이 중심을 잘 잡은 것이다.
그런데 이연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장계의 소실을 문제 삼는 관리의 관복을 불태우라고 하였다고 들었소.”
“그러하옵니다.”
“하나 더 같이 불태우시오.”
“이르시옵소서.”
이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재해 극복에 방해되는 모든 법도를 불태우시오.”
항거할 수 없는 어명은 이어졌다.
“그것이 비록 경국대전이라고 할지라도 예외는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