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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28화 (228/298)

228화 물러서지 않으리(1)

세상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이때 다양성은 사람의 성격이나 생김새 따위를 이르는 것이 아니다.

바로 ‘신분’을 의미했다.

조선에서 신분은 곧 특권과 직결한다.

또, 조선은 신분으로 얻을 수 있는 특권을 정치로 귀속했다.

즉, 관복을 입지 않아도 양반이라는 신분을 가진다면 백성을 마음껏 통제할 수 있게 했다.

얼핏 보면 전근대에서는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통상 신분이 높다고 하여 백성을 마음대로 부리거나 억제하는 건 타국에서도 비일비재했다.

아니, 이 땅에 깃발을 꽂았던 다른 왕조만 해도 그러했다.

이것은 신분이 만들어 낸 특권이니 말이다.

그런데 조선은 조선만의 고유한 특징이 있었다.

그랬다.

조선은 신분으로 얻을 수 있는 특권을 통치와 밀접하게 연결했다.

즉, 양반의 특권이 곧 통치로 구현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관복을 입지 않은 양반도 사실상의 통치 행위를 할 수 있게 하였으니, 양반이 곧 관리인 나라나 다름이 없었다.

이는 200년간 지속해서 이어졌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사실 조선처럼 경직된 나라에서 양반이 특권을 향유(享有)하기만 했다면 절대로 200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이어올 수가 없다.

그런데도 200년을 이어졌다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양반이 특권과 통치를 일체화할 때 백성에 대한 책임감도 포함했기에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통치자가 아닌데도 통치하되 백성을 구휼했다.

통치자가 아닌데도 통치하되 백성을 살폈다.

통치자가 아닌데도 통치하되 통치자의 도덕성이 요구됐다.

대략 이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따진다면 결국 특권의 팽창이었다.

조선은 명백하게 법도로써 관리와 관리가 아닌 자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그저 관리가 아닌 양반이 백성을 제법 잘 통제했기에 큰 탈이 없었을 뿐이었다.

이런 조선에서, 의미심장한 어명이 내려졌다.

-재해 극복에 방해되는 모든 법도를 불태우시오.

-그것이 비록 경국대전이라고 할지라도 예외는 없소.

경국대전(經國大典).

이는 영세불변의 조종성헌이라고 불리는 조선의 근간이었다.

누구도 이 네 글자의 권위(權威)의 밖에서 숨을 쉴 수는 없었다.

조선의 모든 건 바로 여기서 시작하고 끝난다.

즉, 관리가 아닌 양반의 통치 행위를 확실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난리 통에도 조정은 상당히 어수선했다.

정확하게는 들떠 있다고 봐야 했다.

관복을 입은 관리였으나 본질은 사족이라고 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또한, 언제라도 낙향한다면 관리가 아닌 양반이 되는 것이었으니 반길 일이었다.

정말이지 감탄할 수밖에 없는, 본질을 꿰뚫는 능력들이 아닐 수 없었다.

“대감. 정말입니까?”

“몇 번을 말하나?”

나는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낙향의 시기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당상관’들을 쳐다봤다.

감히 눈을 마주치고도 빤히 쳐다보는 불순한 이는 더 험악하게 인상을 쓰면서 제압했다.

“이미 전하께서 난세의 극복에 모든 걸 집중하라고 하였네. 작금의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낡은 법도도 마찬가지일세.”

“허.”

“바꿔 말해서, 사족이 목숨을 걸고 백성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종래의 권한이 법제화될 수 있다는 의미일세.”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데, 대감. 다소 의아한 것이 있습니다.”

“감히 어명에 토를 다는 것인가?”

“소직이 어찌 감히 그러하겠습니까. 다만, 일전에 이미 중대본의 방침에 협조하는 군현은 사족이 관청의 일에 개입하는 걸 용인한다고 하셨습니다.”

분명 그랬다.

하지만, 이건 아예 다른 일이었다.

“중대본의 방침을 따르지 않는 군현의 사족도 포함될 수도 있기에 이번 어명은 다른 것이네.”

“그 말씀은 결국, 과정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군요.”

맞는 말인데 불순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봤다.

“설마 숨만 쉬고 있는데 양반의 특권을 법도로 규정할 생각이었나?”

“아,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오직 난세의 극복만 바라보고 계시네.”

늘 허점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를 품어서 제 이익만 취하려는 무리는 어디에도 존재한다.

이를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대한 미루는 게 옳았다.

나는 정색하며 당상관들에게 말했다.

“조선은 양반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위정자가 되는 세상일세. 한데, 원래 조선이 그러했나? 양반이라는 단어는 신분이 아니라, 위정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무리를 지칭하는 데 불과했어. 하지만 200년이라는 역사가 이어지면서 바뀌었지. 즉, 조선은 법도가 아닌 신분과 통치가 구현되고 있었다는 걸세. 이는 심대한 문제가 분명하네.”

“…….”

“대답하게?”

“아.”

“내가 송자일세.”

“구, 구구절절 옳기에 감히 답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저 깊게 감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당상관들이 허튼짓하지 못하도록 다시 말을 이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서 통치하는 게 아니라, 태어나면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일세. 한데, 이게 옳은가?”

“…….”

“이런. 자네들은 혹시 양반이 혈통으로 이어지는 귀족이라고 생각하나?”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조금 전부터였다.

내 목소리는 무척이나 날카로워졌다.

최근 파발이나 여러 문제로 내 심리상태가 무척이나 불안정하다는 걸 아는 당상관들은 황급히 답변했다.

“어찌 사대부가 귀족과 같겠습니까.”

“사대부 말고 양반을 말했네.”

“무, 물론 양반은 귀족과 다릅니다.”

“새겨듣게. 과거라는 제도는 통치할 권한을 확인하는 걸세. 한데, 이를 통과하지 못한 수준 미달의 무리가 양반이라는 이유만으로 저열한 행동을 하고 있어.”

“…….”

“그간 조선이 여러 사정으로 이를 묵인하긴 했네. 말도 안 되는 양반들의 작태를 알고 있으나 난세가 너무나도 거대하기에 이 또한 품고자 하는 어심의 너그러움을, 자네들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입이 귀에 걸린 것인가? 작금의 어명을 두고 자네들이 희희낙락거리고 있나?”

음절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더 싸늘해졌다.

분명 기쁜 마음으로 나를 찾아왔을 당상관들은 모두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과거 시험에는 통과하지 못할지라도 곳간을 열어 백성을 구제할 선의를 가진 양반이 있을 것이다. 학문은 부족할지라도 사가의 문을 열어 백성이 편히 쉴 수 있게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전하께서는 바로 이런 이들에게 길을 열어주시고자 한 것이다.”

“소, 소직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알면서 웃고 다니나? 만백성이 죽어가는 이 상황에서? 자네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는지 확인하러 내게 왔고?”

“…….”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이라고 할지라도 패악한 짓을 하면 탄핵할 수 있다. 알겠는가? 어명을 곡해하여 제 이익을 취하는 무리는 내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새, 새기겠습니다.”

“무엇을 새기나? 내가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새기겠다는 건가?”

“…….”

“양반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통치할 수 있는 위정자가 되는 세상이 정녕 위대하다고 생각한다면, 양반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위정자의 책무를 가져야지.”

그간 양반들에게 다소 이권을 보장해준 건 전폭적인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연의 파격적인 어명이 내려온 이상 내가 따로 구슬릴 필요는 없다.

지금은 단속이 가장 중요했다.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똑바로 하게.”

“…….”

당상관들은 감히 나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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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말이라는 건 해석의 여지가 있다.

심지어 일국을 통치하는 군왕의 어명이라면 더 폭넓게 다가갈 수가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정말입니까……?”

생각하지 못한 선물이 분명했기에 서얼들의 표정은 참으로 기괴했다.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전하께서 지엄하신 어명을 내리셨네. 어찌 거짓이 있겠는가.”

“…….”

“즉, 하기에 따라서 자네들이 대과를 치를 수도 있다는 것일세.”

길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가슴에 멍이 들었을 서얼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벅찬 감정이 솟구쳤을까?

누구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훌쩍이는 말이 들렸을 뿐이었다.

나는 이들이 감정의 여운을 느낄 시간을 주었다.

물론, 길게 허락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한가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미 자네들이 무너진 파발을 복원하는 데 공을 세웠네. 바라보기에 따라서 이는 대사(大事)가 아니라고 할 수는 있으나, 작금의 조선에서 이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네.”

“…….”

“전하께서 이르시길 재해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모든 법도를 치우도 된다고 하셨으니, 어찌 자네들의 입신양명에 문제가 있겠는가.”

국난에 처했을 때 늘 공을 세운 사람을 우대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을 향한 것에 불과했다.

반면, 작금의 상황은 집단 전체의 성장을 견인하는 것이었으니 사정이 아예 다른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전례 없는 난세일세. 나는 자네들이라면 능히 제 역할을 하고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네.”

“소인들이…….”

서얼 중 한 명이 밝은 표정을 하며 말했다.

“삼남 지역으로 가겠습니다.”

“삼남 지역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모두 끔찍한 재해라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폭우가 만들어 낸 홍수의 특징은 참으로 괴이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폭우와 홍수의 생명력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것이었다.

폭우는 3일이었고, 홍수도 그리 길지 않다.

그 기간에 엄청난 피해를 동반하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안전했다.

또, 지금 그곳에 필요한 건 누군가가 아니라 재원이었다.

이미 이를 이연이 정확하게 지적한 바가 있었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굳이 그곳으로 가려는 이유가 있는가?”

“대감께서 오해하실 듯하여 말씀드리지요. 소생들의 효용성을 입증하는 데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겠나? 자네들이 어떤 사후 대책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네.”

홍수 피해로 좌절하고 절망할 백성에게 무슨 말이 들리겠는가.

아무리 옳고 바른말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러니 만일 이들을 파견해야 한다면 여전히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역이 합당했다.

‘이미’ 폭우가 스치고 간 삼남 지역보다는 아직 재앙이 진행되고 있는 곳으로 보내는 게 당연했다.

아니라면 파발의 정상화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도 옳았다.

내 태도에서 썩 내키지 않는다는 게 느껴졌을까?

아니, 느껴졌을 것이다.

서얼들은 곧장 말을 꺼냈다.

“소생들이 어찌 그 많은 백성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재원도 없을뿐더러, 괜한 말로 그들을 위로하려고 했다가는 화만 부추길 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복구에 손을 보태고자 합니다.”

“복구라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아무리 지금 끔찍한 상태라고 할지라도, 그곳에서 다시 사람이 살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소생들을 이를 해보고자 합니다.”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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