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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29화 (229/298)

229화 물러서지 않으리(2)

정말 맞는 말이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옳은 말이었다.

현재 이연과 중대본의 신경은 방한 대책에 집중됐다.

사람이 어느 정도 방비할 수 있는 영역에 역량을 우선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대사(大事)가 이리 흘러갈 때 서얼들이 방금 던진 말은 참으로 의미가 있다.

폭우가 스쳐 지나갔을지라도, 폭설이 일어났을지라도 다시 사람이 살아야 한다.

하여 터전을 다시 일으키는 건 실로 중요한 일이었다.

“또한, 몇몇 군현에서는 관청의 공백이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 소생들이 감히 무엇을 할 능력은 안 되지만,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니 어찌 작은 도움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끝.

더 들어볼 필요도 없다.

이건 현실적으로 너무 결정적인 말이었다.

서얼은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기회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이참에 이들의 통치 능력을 현장에서 입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자네들의 말이 참으로 옳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흡족함을 표출했다.

사실 조정이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부분을 신진 세력이 전면적으로 나서면 너무나도 좋은 일이다.

단적으로 의료 영역을 처능의 불교계가 무서운 속도로 장악하는 것만 해도 그랬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머지않아 위생국과 어깨를 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질적인 부분을 떠나서 사찰이라는 집단 자체가 결합한 것이기에 규모 자체에서 비교할 수 없으니 말이다.

서얼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라고 하여 영역을 확보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저 마음속 깊이 응원할 뿐이었다.

“뜻대로 하게.”

덧붙였다.

“혹시라도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게.”

“예……?”

되돌아보니 나는 저들에게 부드럽게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늘 타박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이토록 기특한데 어찌 말을 함부로 하겠는가.

“내가 힘닿는 데까지 자네들을 돕겠다는 말을 한 것일세.”

“가, 감사합니다. 대감.”

“아. 그래도 파발은 꼭 책임져주게. 특히 이번 어명은 조선 팔도가 모두 알아야 하니 말일세.”

“물론입니다. 소생들만 믿어주십시오.”

사실 이연의 선언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능동성이었다.

중대본의 권한이 아무리 거대하다고 할지라도 한계라는 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한계는 선제 대응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속된 말로 청국과 외교 갈등이 있다면 미친 척하고 선제공격이라도 할 수 있으나, 하늘과 다투는 시점에서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해서, 우리는 늘 수동적이었고 방어적이었다.

그런데 경국대전을 불태울 각오를 하면 우리가 능동적으로 바뀔 수도 있었다.

하늘에 대고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뭐든지 할 수 있기에 뭐라도 할 수 있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어쩌면 우리는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게 된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또 만났다.

“대감……?”

두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이었다.

세상은 이들을 무당이라고 불렀다.

그동안 나는 이들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은밀하게 만나지도 않았고 백주에 대놓고 겁박했다.

과정은 이토록 아름다웠고, 결과도 위대했다.

무당이 크게 활약한 군현은 위생이 비교적 잘 뿌리 내리기도 했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백성과 가장 가깝고, 언어의 힘을 진실로 크게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네들 혹시, 굿을 제대로 해볼 생각은 없는가?”

“소인들은 꾸준히 굿을 열어 위생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제대로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송구합니다만 소인들이 마음껏 하고자 해도 장벽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전처럼 자네들끼리만 알아서 하라는 말이 아닐세.”

오늘만큼은 이들을 향해서 미소 지었다.

각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데 어찌 딱딱하게 행동하겠는가.

자애롭고 부드럽게 대하는 게 옳았다.

“자네들이 백성을 ‘교화’하고자 굿을 할 때 누구라도 방해한다면 내 이름을 대게.”

“…….”

“또한, 내게도 반드시 알리고.”

“…….”

“어떤가. 이만하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 같네만.”

“…….”

“이런. 많이 놀랐나 보군.”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무려 ‘송자’였다.

그러한데 저자에서 굿할 때 이름을 언급해도 된다고 했다.

기존의 문법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행보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재해를 기어이 극복하는 길에 이들의 도움이 절실하니 어찌 몸을 사리겠는가.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무당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이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내가 괜찮다고 할지라도 나는 무려 살아 있는 성현이었다.

이런 나를 언급한다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무당들의 어려움을 달래주고자 말하려고 할 때였다.

“대감…….”

“그래. 어서 말하게. 혹시 수령들이 괜한 말을 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향리인가?”

“그건 아닙니다. 요즘 소인들이 굿할 때는 반기는 추세입니다.”

“그런가? 한데,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

“저…….”

“말하게. 내가 다 해결해줄 수 있네.”

“이건 꽤 본질적인 것입니다.”

“설마 자네들의 신분을 문제 삼는 이들이 있나?”

“……그게 아니라, 굿 한 번 하려면 상당한 비용이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뭐?”

“예.”

“아.”

이런.

살짝 민망해졌다.

그러니까 뭐라도 준비하는데 매번 자비로 하려니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굿을 할 때는 백성이 비용을 알아서 합니다. 하지만, 최근 위생 굿은 그게 아닌지라 소인들이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음.”

“대감. 어찌 안 되겠습니까.”

역시 세상사는 돈이 9할이로구나.

사실 대충 준비해서 하라고 명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백성의 보는 눈이 있다.

그들에게 위생의 효과를 제대로 각인하려면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 한다.

“대감. 소인들의 사정도 좀 봐주십시오. 지원 없이 더 진행한다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듣자니 대감께서 성현의 반열에 오르시어 얼마든지 재원을 확보하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 정말로 더는 어렵습니다.”

이런.

순식간에 내 입장이 궁색해졌다.

적당하게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잠시 고민했다.

결국, 중대본에서 이들을 지원할 여력이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쉽지는 않겠으나 해야 할 일이긴 했다.

그래서 말했다.

“관청에서 진행하게.”

“예……?”

“관청에 지원을 요청하면 될 것이네.”

“하지만…….”

“탈이 생길 일은 없으니, 하면 될 것이네.”

중대본의 재원을 허적의 동의 없이 집행하려고 했다가는 난리가 난다.

그러니 군현으로 공을 돌리는 게 옳다.

즉시 군현으로 공문을 보내면 된다.

의도치 않게 서얼의 일이 또 많아졌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무당과의 논의를 마무리했다.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영역이 언급될 때는 이리하는 게 옳았다.

그나저나 처능도 만나면 좋겠으나 애석하게도 만남은 불발됐다.

그가 일언지하에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바쁩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역병에 걸린 백성보다 급하십니까?

이런 이유를 어찌 탓하겠는가.

사실 처능은 어지간한 사대부 100명을 더한 것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그가 그렇다는데 굳이 말을 보탤 이유는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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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들은 조용했다.

되돌아보면 그동안 간헐적이었으나 대화가 이어져 왔다.

한때는 삶의 희망을 노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미소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

“…….”

한 명이 세상을 떠나고, 두 명이 눈을 감고, 세 명이 죽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산 사람이 줄어들었다.

점차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모두 넋을 잃고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땔감이 넉넉했으나 추위를 그냥 방치하고 있었다.

식량도 부족함이 없었으나 챙겨 먹지 않았다.

약재의 향이 여전하였으나 사용하는 이도 없었다.

평생 그토록 바라였던 풍요로움이었으나 의미는 상실됐다.

생존의 의지가 박탈된 결과였다.

삶에 대한 미약한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바로 이러했다.

지척에 이른 죽음은 이토록 스산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

“…….”

“…….”

가끔 서로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불과했다.

굳이 ‘말’이라는 걸 꺼내어 의미가 살아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른다.

대체 왜인지도 몰랐다.

한 명씩, 한 명씩 일어났다.

누가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시선을 교환하며 뜻을 전한 것도 아니었다.

미리 약조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걸었다.

한 명씩 혹은 두 명씩 혹은 세 명씩.

무리이되 무리가 아닌 움직임이었다.

굳게 닫힌 산성의 성문이 보였다.

모두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하지만 그 시간은 짧았다.

작은 무리로 이뤄졌던 그들은 어느새 다시 흩어졌다.

세 명이 두 명이 되었고, 두 명은 한 명이 되었다.

추위에 움츠려진 발을 움직였고, 얼어버린 땅을 툭툭 쳤다.

모두 그랬다.

이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때 누군가가 ‘드디어’ 말이라는 걸 꺼냈다.

“나는 여기가 좋겠네.”

탁하고 낮게 내려진 목소리였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 턱하고 앉았다.

그러자

“난 여기로 하겠네.”

“나는 이곳으로 할 것이네.”

“난 전부터 여기가 좋았어.”

다른 이들도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온몸을 움츠리게 하는 추위는 그들을 막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통을 주는 역병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들은

“그래도 죽을 자리 정도는 내가 선택해야지. 안 그런가?”

“모처럼 옳은 말 했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의 지척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어.”

“살아지면 좋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지.”

죽음을 앞에 둔 이들의 대화는 참으로 담담했다.

어찌하여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어차피 죽을 건데 약재는 뭐 하러 먹어.”

“암. 남겨두면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먹겠지.”

“괜히 우리가 땔감이나 식량을 사용하면 산 사람들이 더 고생하겠지.”

대체 이는 무슨 대화란 말인가.

“내가 먹지 않은 쌀이 내 새끼의 구휼미가 되길 바랄 뿐이네.”

“이제 죽을 몸인데 조금 추우면 어떤가. 땔감이 우리 식솔들의 겨울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

그랬다.

갈수록 고통을 심하게 만드는 역병이 병자들에게 허락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생존의 의지를 박탈한 게 아니었다.

선택의 순간을 만들어준 것이었다.

뜻을 나누지 않았으나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 또 보세.”

죽음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 식솔의 내일을 걱정하게 된 병자들은 그조차도 이겨냈다.

힘겨울지라도 그러했다.

그런데

“…….”

갑자기

“…….”

성문이 열렸다.

병자들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보였다.

그래서

“부처님……?”

누군가가 본 것을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물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자네들…….”

처능이었다.

“참으로 장해.”

병자들은 그제야 상대를 정확하게 확인했다.

엉거주춤 앉아 있던 그들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님……?”

“장하네. 참으로 장해.”

처능의 뒤로 많은 승려가 보였다.

“처방을 구했네.”

“예……?”

“자네들은 이제 살 수 있다는 말이네.”

“…….”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말이라는 건 너무나도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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