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물러서지 않으리(3)
추위는 갈수록 거세졌다.
그러나 아무리 불에 의지하더라도 옷을 뚫는 바람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점차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추워졌다.
관청에서는 내일을 기약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 사용할 수 있는 땔감을 아끼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렇듯 추위는 갈수록 강해졌으나, 인간을 버티게 하는 도구의 수량은 줄어들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른다면 승패는 너무나도 자명했다.
인간의 미약한 저항은 끝나고 무참하게 패배할 것이다.
“내일이면 조금 덜 추워질까……?”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
“…….”
아니나 다를까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이미 손과 발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손가락을 절단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점차 혹독해지는 추위였으나 희망 따위를 말하는 건 너무나도 소모적이었다.
하지만 화자는
“자네들 혹시 그거 아나?”
재차 말을 꺼냈다.
청자들은 고개를 움직여 쳐다봤을 뿐 특별한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양반들 욕한 적 없는 난리는 또 처음이라는 사실 말이네.”
“아…….”
이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되돌아보면 늘 고단한 삶이었다.
하지만, 이를 더 서럽고 애처롭게 만든 건 분명 양반들이었다.
가뭄으로 농작물이 말라 죽어도 그들은 뺏어갔다.
홍수로 농작물이 떠내려가도 그들은 여전했다.
늘 그랬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가장 큰 천재지변은 바로 양반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아니었다.
엄청난 추위에 옷을 뺏어가기는커녕 이불이나 땔감 따위를 넉넉하게 나눴다.
오갈 데 없는 백성을 사가에 머물게 하기도 했다.
“꼭 이번만은 아니지. 저번에도 곳간을 열어서 쌀을 나눴으니까.”
이 말도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양반들은 도움을 줬다.
“평소는 별 차이가 없긴 하지만 난리가 나면 이리 나서는 희한한 일이긴 하지.”
“차이가 없지는 않지. 위생이니 뭐니 하면서 계속 무언가를 시키긴 했어.”
“하지만, 그걸 해야 역병이 피해 간다고 하니 좋은 일이 아니겠나?”
“허. 자네 그 말을 믿나? 손 좀 씻었다고 역병이 물러나면, 창 들면 전쟁에서 이기겠군.”
“이 사람아. 누가 꼭 양반들 말을 믿었다는 건가? 윗동네 사는 무당도 같은 말을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무당이?”
“암. 요즘 만나는 무당들마다 다 그러지 않는가. 심지어 신내림을 받은 무당들인데도 그래.”
“허. 그렇다면 양반들이 위생, 위생 외치는 것도 몰래 무당을 만난 결과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겠나?”
“이런. 그러면 사정이 달라지지. 그나저나 놀라운 일이군. 양반들이 무당의 말을 믿다니.”
옹기종기 모인 백성들은 다양한 대화를 나눴다.
과거와 정말 다른 점은 이들의 입에서 양반을 탓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을 뿐 제법 긴 세월 동안 이러한 현상이 이어졌다.
이런저런 말을 하다 보니 피부가 찢어질 듯한 추위를 잊었다.
비록 찰나일지도 모르며, 단지 착각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 자체가 좋았다.
무엇인들 버틸 수 있는 계기만 된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적당하게나마 대화가 이어질 때였다.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다.
지체 높은 양반이었다.
또, 제법 거리가 있었으나 누군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훈련대장 이완이었다.
어느새 지척에 이른 그는 백성들을 살피듯 바라보며 말했다.
“뭐 하나?”
그러자 백성들은 묻는 말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영감께서는 어찌 오셨습니까? 대동강에 안 가시고요?”
조선 최고의 정예군을 이끄는 훈련대장에게 하는 언사라고는 상당히 불경했다.
아니, 아주 불경했다.
있을 수 없는 행위였으나 이완은 엷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훈련도감이 하는 일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거 아닙니까?”
“이 사람아. 근처 산에서 일도 해. 땅도 판다고.”
“그래도 사람 구하는 게 더 중요하니 한 말이지.”
이미 평양의 백성들에게 훈련도감은 적과 싸우는 병력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백성의 근처에서 ‘무언가’를 하는 존재였다.
그동안 훈련도감이 백성에게 어찌 다가갔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완의 입가에 있던 미소는 더 진해졌다.
백성들의 이런 말은 절대로 듣기 싫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백성을 지키는 병력이 된 것이니 말이다.
그때 저 멀리서 병졸들이 수레를 끌고 왔다.
족히 세 자릿수의 인원이었고, 수레도 수도 두 자리였다.
백성들이 고개를 들어서 빤히 쳐다봤다.
이완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그새 수레는 지척에 이르렀다.
이완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수레에 올려진 건 석탄이라고 한다.”
여전히 눈만 껌뻑이던 백성들은 계속 수레만 쳐다봤다.
이완은 누구의 눈길도 차지하지 못했다.
“영감. 적어도 먹는 물건은 아닌 게 확실하군요.”
“물론일세. 먹으면 죽어.”
“소인들을 죽이지는 않으실 것이니,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입니까?”
“추위를 이겨낼 수 있네.”
“예? 그게 어찌 가능합니까?”
“하하하. 석탄은 땔감보다 불이 강하고 오래간다네.”
“허. 저 물건으로 불을 낼 수 있다고요?”
“물론일세.”
“저, 정말입니까?”
“이 추위가 끝날 때까지 사용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네.”
그 순간
“해서, 말하겠다.”
이완이 칼을 뽑았다.
참으로 위엄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석탄을 구경하느라 이완의 행동을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완은 그 모습이 너무나도 정겨웠다.
선왕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고,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백성과 이토록 친근할 수 있다면 선왕 시절에도 이리했을 것이다.
미처 몰랐다.
포근하게 웃으며 바라봤다.
하지만 조선 최고 정예군의 수장으로서 명령을 내릴 때는 단호해야 했다.
물론, 누구도 바라보고 있지 않았으나 우렁차게 외쳤다.
“너희는 석탄을 남기지 말고 모두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는 실로 놀라운 명령이었다.
드디어 백성들의 고개가 움직였다.
모든 시선이 이완을 바라봤다.
너무나도 놀랐을까?
한 명도 빠짐없이 눈동자가 휘둥그레진 상태였다.
어안이 벙벙한 백성들의 귀로 이완의 말이 더 이어졌다.
“만일 어길 시, 너희를 지엄한 군율(軍律)로 다스릴 것이다.”
훈련도감이 태동한 이래 가장 권위 있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오늘, 평양의 백성은 추위에서 해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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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주먹까지 꽉 쥐고 있었다.
세상사가 빡빡하니 이리할 수도 있었다.
하늘에 대고 오만가지 욕을 해도 뭐라고 할 사람 한 명 없는 시절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오늘의 행동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백성들이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는 사람이 바로 ‘현령’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가장 앞에 선 이는 대놓고 노려봤다.
물론
“…….”
“…….”
현령과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사실 아무리 세상이 빡빡하더라도 군현을 통치하는 수령과 눈싸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처럼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만 해도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이런 일이 가능한 것도 엄밀히 따진다면 현령이 용인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엄청난 폭우로 사방이 난리가 났다.
그래서 현령이 백성을 달래느라 이리된 것이었다.
아무리 화가 난 백성들도 배려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또, 그래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선두에 선 백성이 이를 꽉 깨물고 따지듯 물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허. 그건 내가 할 말일세. 자네들이야말로 왜 이러는 건가?”
“그냥 씻지 않겠습니다.”
“아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걸세.”
“무조건 씻지 않을 겁니다.”
뭐 이런 경우가 있을까.
현령은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짜증도 솟구쳐서 그냥 등을 돌릴 뻔했다.
그러나 이대로 상황을 방기(放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위생은 조정의 핵심 정책이었다.
그 이유만으로도 반드시 집행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실질적으로 위생이 역병을 방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이미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성을 살펴야 할 현령이었기에 다시 화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역병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니 모두 내 말을 따르게.”
“괜찮습니다.”
“자네들 지금 관청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현령의 목소리에 살짝 짜증이 묻어나자 백성들은 멈칫했다.
아무리 화가 난 백성들이라고 할지라도 적정선이라는 게 있었다.
관청의 권위를 운운한 이상 잠시라도 자중할 필요는 있다.
분위기를 잠시 뒤틀어버린 현령은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네. 폭우로 망연자실한 마음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위생을 더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네. 그러니 고집 그만 부리고 내 말을 듣게.”
“하지만, 위생을 행하기 전에는 간지럽지도 않았습니다.”
“나 역시 위생을 접한 건 자네들과 비슷한 시기일세. 자세히는 알 수 없네만 조정에서 내려온 수칙에 의하면 위생을 자주 행할수록 불결함을 몸이 잘 느낄 수 있다고 했네. 자네들이 계속 간지럽다는 건 결국 이를 이르는 것이네.”
“…….”
“그러니 나를 따르게.”
백성들은 우물쭈물했다.
쉽사리 통제에 따르지 않자 현령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당장 화를 내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현령이 직접 이곳까지 와서 ‘설득’한다는 것 자체가 이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잡아서 물고를 내고 싶기도 했다.
현령으로서 권한을 휘둘러 강제 집행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위생은 강요하지 말라. ‘교화’하라.
조정에서 내려온 수칙의 가장 상단에 아주 크게 적힌 글자는 현령의 화를 다시 누그러트렸다.
이를 지키지 않을 수는 있다.
또한, 전대미문의 재해는 군현의 수령들에게 상당한 책임감과 더불어 변화를 추동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는 작금의 조선에서 군현의 기조가 전과는 명백하게 달라졌다는 걸 의미했다.
물론, 현령이 성현은 아니었기에 감정적인 부분까지는 완벽하게 해소할 수는 없었다.
“내가 자네들을 언제까지 설득해야 하나?”
경직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할 수는 없다.
백성들은 눈치를 살폈다.
“위생을 행하지 않겠다면 하지 말게. 그러나 나는 조정의 지침을 따라야겠네.”
“사실 배도 고픕니다. 너무 굶었습니다.”
“…….”
현령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결국 쌀 한 톨이라도 얻어내고자 이 사달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냥 허탈했다.
백성의 행동이 문제는 아니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무력함이 허탈했다.
참으로 개탄스러웠다.
“조금이라도 쌀이 있었다면 진작에 내렸을 것이네. 하지만, 자네들도 알 것이네. 폭우는 쌀 한 톨까지 모두 삼켜버렸네.”
“…….”
“내 말을 믿지 못하겠는가? 그래도 어쩔 수 없네. 구휼미를 내리고자 할지라도 쌀이 없는 건 사실이니 말일세. 아무것도 없어. 한데 위생 수칙조차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자네들을 격리가 아니라 내쫓을 수밖에 없네.”
“어, 어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기근은 역병과 연결되는 법일세. 이를 방비하려면 위생이라도 강제로 집행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네.”
더는 대화하며 설득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현령의 쐐기를 박듯 말했다.
“위생을 행하지 않는 백성은 우리 고을에 자리가 없다.”
손이라도 씻어야 했다.
설득 아닌 설득을 마무리하고 관청에 이르렀을 때,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문객이 있었다.
현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예를 갖추며 말했다.
“서, 선생께서 직접 오셨습니까.”
바로 중대본 위생국 국장, 허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