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무엇을 위하여(2)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워도 넘을 수 있는 선이라는 건 분명하게 존재한다.
발을 내밀어도 되는 선이 있다면, 내밀었다가는 발이 잘려 나가버리는 선이 있는 것이다.
향리에게 눈을 부라리며 대들 수도 있다.
현령의 명령을 몇 번이나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허목의 말은 아니었다.
조정의 실력자로서 중대본의 핵심 일원인 그의 말은 천금보다 무겁다.
이를 따르지 않거나 항의한다는 건 상상의 범위 밖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했다가 무슨 일이 발생할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경우의 수였으니 말이다.
아니, 그 상상의 범위는 ‘민란’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백성들에게는 전승(傳承)이라는 게 있다.
선대로부터 전해지는 ‘말’이었다.
수백 년간 이어지며 방대한 기록의 보고가 된 전승에는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조정의 고관대작은 통상 백성의 편에 선다.
하나가 더 있다.
-군현에 온 조정의 고관대작은 하늘이 무너져도 백성의 편이다.
아주 핵심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일제히 이를 상기한 백성들은 황급히 말했다.
“도저히 힘들어서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난리가 났는데 노역이라니요.”
“소인들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숨 쉴 수 있는 공간은 마련해주십시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참으로 절절한 처지를 잘 대변하는 말들이었다.
꼬질꼬질한 몰골과 굶주림까지 더해졌으니 어찌 안쓰럽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 말을 듣지 못하였나?”
허목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싸늘했다.
또한, 눈이 마주친 백성들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오랜 세월 보태고 더하며 전해진 전승이 틀렸다는 말일까?
“탐학(貪虐)한 관리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면 응당 벌해야 한다. 한데, 오늘 내가 보니 향리의 말은 지극히 옳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심지어 너희를 걱정하여 타이른 것인데, 어찌 이리도 무도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었다.
제대로 들은 것이었다.
지금 허목은 백성을 질타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서슬 퍼런 기세에 백성들은 땅바닥으로 던졌던 도구를 다시 주섬주섬 들었다.
어색하고 멋쩍은 분위기를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허목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난세일수록 백성은 관의 통제에 잘 따라야 한다. 부당한 것이 아니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반론을 펼치고 싶은 백성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섣불리 나서거나 말하기에는, 허목이라는 두 글자가 가지는 권위가 너무나도 거대했다.
“감히 너희가 관청의 일을 수행하는 향리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질서를 어지럽혔다.”
내용과 말투가 예사롭지 않았다.
전승과 경험에 의하면 이럴 경우는 좋지 않은 결과가 도출된다.
거센 불안함이 엄습한 백성들의 낯빛은 사색이 됐다.
“이를 어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불안한 예상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말이 이어졌다.
“작금의 재앙은 양반이나 향리가 큰 죄를 지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늘이 내린 혼란이다. 모두가 고통을 받는 상황인데 단지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살핌을 바랄 수는 없는 법이다.”
“소, 송구합니다. 선생.”
“일벌백계하겠다.”
“서, 선생.”
고개를 돌려 향리를 바라봤다.
“이들을 모두 옥사(獄舍)에 가두게.”
“……그리하겠습니다.”
단호한 조치였다.
과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허목은 명백한 이유를 가져왔다.
“위계가 흔들리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 하여, 나는 오늘의 일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이다.”
탐학하지 않은 관리의 말은 천금이어야 한다.
이것이 허목이 가진 원칙 중 하나였다.
“자네들도 매사 설득하며 일을 진행하려고 하지 말게.”
“예, 예. 선생.”
“설득은 평시에 하는 걸세.”
허목은 말은 더 보태지 않고 등을 돌렸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삭주 시절 송시열이 떠올랐다.
오늘에서 알게 됐다.
그가 옳았다는 걸.
한 명을 살리며 백성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다.
해서, 한 명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세상은 한 명의 소중함을 지키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하늘이 오늘에서야 이를 알게 했다.
다시 되새겼다.
송시열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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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의 일벌백계로 더는 갈등이 표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물론, 속에서 올라오는 불평과 불만이 없어진 건 아닐 것이다.
본질적인 원인은 아직 해소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일사불란하게 일이 처리된다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야만 최악을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선생. 옥사에 가둔 백성을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이보게. 이제 겨우 이틀 지났네.”
“그렇긴 합니다만.”
현령은 멋쩍게 웃으면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마음을 크게 쓰고 있다는 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되돌아보면 향리들도 백성을 억압하기보다는 하나씩 설명하고 설득했다.
이는 목민관이 평소 어찌 행동했는지 대번에 알게 하는 대목이었다.
자고로 백성을 가엾게 여기는 목민관은 참으로 귀하다.
그러니 치하하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허목은 굳이 이를 입에 담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한 점을 언급했다.
“애초 잘 통제했다면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네.”
“송구합니다. 소인이 부족하여…….”
“백성의 말을 귀담아듣고 신경 쓰는 건 너무나도 바람직한 일일세. 그러나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러운데 어찌 그러기만 할 수 있겠는가? 난세를 살아가는 관리가 단지 너그럽기만 하다면 어찌 백성을 지킬 수 있겠는가.”
“그것이…….”
“오늘 혹은 내일 석방할 것이니 마음 쓰지 말게.”
“선생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다만…….”
현령은 잘게 입술을 깨물며 난처한 듯 웃었다.
생각이 복잡해 보였다.
아니, 많아 보였다.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했다.
허목이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네의 생각을 탓하지 않겠네. 그러니 편히 말하게.”
“갈수록 재해가 기승을 부립니다. 하지만 관청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조정에서도 확실한 대처방안을 꺼내지 못하고 있네. 한데 어찌 군현에서 방책을 수립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선생. 매일 백성을 만나는 목민관들의 입장은 조금 다릅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자네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군.”
“선생. 난세라고 할지라도 백성은 평시와 같은 부담이 있습니다. 조세를 내며, 역에 동원됩니다. 그런데 아무런 보살핌을 받지 못합니다. 어찌 안쓰럽고 가엽지 않겠습니까.”
“양반과 관리도 속절없이 죽어가는 시절일세.”
“정치가 어지러워 민란이 발생하고 군벌이 거병하거나 외적이 침략함으로써 만들어진 난세가 아닙니다. 이러한 난세는 위정자도 신경이 곤두서기에 백성을 살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쟁투에서 승리하려면 민심을 얻어야 하기에 선심을 베풀지요. 한데, 선생. 작금의 난세는 그저 하늘이 내린 것입니다. 해서, 쟁투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민심을 품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어찌하여 백성에게 법도만 이르십니까.”
현령의 말은 참으로 날카로웠다.
눈치를 보던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속에서 올라오는 진심이라는 걸 의미했다.
그 옛날 신라가 분열되었을 때 궁예와 견훤 그리고 왕건은 민심을 얻고자 선정을 베풀었다.
백성을 동원하여 상대와 겨뤘으나 백성을 설득하는 것에도 시간을 사용했다.
하지만, 작금의 난세는 겨루는 경쟁자가 없다.
이런 현실을 지적한 현령의 말은 일견 타당했다.
하지만, 본질은 피해서 간 말에 불과했다.
“군현의 목민관이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건 당연한 책무일세. 그런데 자네의 말은 틀렸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경쟁자가 없는 작금의 난세는 방비로서 백성을 보살펴야 하네. 그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과 방비를 집행하는 것. 선택해야 한다면 응당 후자가 우선되어야 하는 법일세.”
“선생.”
“잘 듣게. 지금은 백성을 뺏고 뺏기는 난세가 아닐세.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재앙을 버티며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하는 시국일세. 이러할 때 활자로 익힌 선정을 현실에 도입하려고 하지 말게. 이미 우리는 활자의 죽은 가르침을 넘어서고 있으니까.”
우습게도 백성을 뺏어갈 세력이 없다.
또한, 백성에게도 대안이 없다.
해서, 강경한 태도로 방비를 집행할 수가 있었다.
지금 백성의 불평과 불만이 있더라도 강행할 수 있었다.
작금의 난세는 이랬다.
문제는 많은 목민관이 눈앞의 현령과 비슷한 생각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이토록 험난한 시절에 백성의 마음마저 얻겠다는 건 너무나도 큰 오만일세.”
“…….”
“그러한 교화는 일단 백성을 살린 뒤 고민해도 늦지 않아. 지금 강행하는 위생 시설의 건설도 같은 경우일세.”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네가 진심으로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네.”
“…….”
“하지만, 관리로서 중대본의 방침을 잘 수행하리라고 믿겠네.”
“예. 선생.”
복잡한 표정을 한 현령을 잠시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속이 쓰렸다.
허목이라고 하여 어찌 모르겠는가.
현령의 말이 경전의 가르침, 그 자체라는 걸 말이다.
평시였다면 백성을 다독이며 선정을 베풀었을 목민관이 난세를 만나서 하지 않아도 될 번뇌로 고통받고 있으니 말이다.
그저 한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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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위생 보급의 기틀은 다시 마련됐다.
노역의 강도도 줄어들자 불평과 불만은 다소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여전히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다른 군현의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충격적인 급보가 전해졌다.
“선생. 인근에서 역병이 창궐했습니다.”
허목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역병이 발생한 군현과는 어찌 연계하고 있나?”
“해당 군현은 수령이 부재한 상황입니다. 그나마 향리들이 몇 명 남았을 뿐이지요.”
“허. 결국, 통제할 수 없는 곳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허목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었다.
역병이 창궐한 군현의 관청이 소멸했다면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시선을 돌렸다.
처참한 몰골의 고을이 눈에 담겼다.
민가의 대부분이 허물어졌다.
길목 곳곳에는 물웅덩이가 가득했다.
공기는 축축했다.
기틀은 잡아가고 있으나 평소 생활하는 공간은 여전히 불결했다.
“곧장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게.”
“이르십시오.”
“산 사람은 최대한 빨리 벗어나되, 반드시 지정한 장소에 머물러야 할 것이네. 그리고…….”
허목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인내하며 말했다.
“병자는 그냥 두게.”
“선생…….”
“지금 이곳에 병자가 들어오면 모두 죽네. 다른 군현도 마찬가지일 것이네.”
사실이었다.
“파악한 바에 의하면 이곳이 인근에서 가장 수해를 적게 입은 곳이니 말일세.”
여기도 이 정도라면 타 군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끔찍한 상태일 것이니 말이다.
본부장 송시열의 말이 떠올랐다.
-부디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길 바라오.
한마디가 더 있었다.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한 명보다는 다수를 살려주길 바라오.
이곳에 오기 전 그가 한 간곡한 당부였다.
그리고 기어이 그리되었다.
참으로 참담했다.
습기가 올라온 눈이 흐린 세상을 힘겹게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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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던 백성은 이제 없었다.
아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폭우가 내렸고 통제할 관청의 역량이 없는 곳.
바로 이곳에서 역병이 창궐했다.
규모는…… 백성이라는 단어를 소멸시킬 수준이었다.
하여, 이곳에 백성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