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한 걸음 더 나가리라(1)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다.
그러나 이토록 엄중한 상황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다.
역병이 창궐할 수는 있다.
백성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통제해야 할 관청이 유명무실해진 사례는, 경험은커녕 들어보지도 못하였다.
총체적 난국이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동할 백성 중 병자가 숨어 있더라도 알 방법이 없다.
대체 어느 누가 가족이나 이웃을 밀고(密告)하겠는가.
그렇다고 하여 역병이 창궐한 군현 자체를 아예 봉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멀쩡한 사람까지 모조리 죽이는 참담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철의 통치’를 앞세운다고 할지라도 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놓고 백성을 죽이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허목은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아냈다.
“선생.”
현령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평시에 역병이 창궐해도 비상이거늘, 이토록 열악할 때 인근 군현에서 역병이 창궐했다는 건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고을의 백성에게 역병의 창궐을 알리게.”
“크게 동요할 겁니다.”
“바로 그것일세. 지금 자네의 가장 큰 역할은 백성의 동요를 막는 것일세. 한데, 역병의 창궐이란 관청에서 숨긴다고 해도 한계가 있네. 백성은 어떻게든 알게 될 것이네. 관청이 통제하지 못하는 백성의 공간에서 사실이 퍼져나가면 동요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일세.”
“음.”
“아시겠는가. 통제에 실패하면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네.”
“소인은 선생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계속하여 뇌리를 괴롭히는 건 병자의 처우였다.
지금이라도 의원을 급파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가는 게 옳았으나, 갈 여력도 없었으며 역량도 부족했다.
지금 허목은 지독하게 외로워졌다.
본부장 송시열을 비판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다시금 송시열이 짊어진 짐을 알게 되었다.
그간 이토록 곤혹스러운 번뇌를 홀로 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허목도 송시열과 같은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인력을 분산하여 역병을 감당한다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가 갈 수가 없구나.”
전체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는 없었다.
또한, 대신 갈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역량도 부족했다.
결국, 결정을 그대로 강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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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역병’이라는 두 글자의 등장에 의연할 수는 없다.
백성들이 크게 위축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들의 최고 관심사는 ‘노역’이 아니라 ‘이동’이었다.
“저, 정말입니까?”
“몇 번을 말해야 하나?”
“아니, 정말 옆 고을의 사람들이 이동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이동하지 않는 게 아니라, 병자만 그대로 둔다는 걸세.”
“그러면 거기서 먹고 자던 사람들이 여기로 넘어올 수도 있는 겁니까?”
“……사람 말을 좀 제대로 듣게. 여기로 넘어오는 게 아니라, 적당한 곳에 머물도록 할 것이네.”
“하지만, 그곳은 관리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따르겠습니까? 또, 식솔 중에서 병자가 있으면 데리고 다닐 게 분명합니다. 어찌 두고 떠날 수 있습니까.”
야박한 말이지만 백성들은 그만큼 두려워했다.
향리는 잠시 곱씹더니 말했다.
“자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네. 그러니 시킨 일이나 제대로 하게.”
“정말입니까?”
“사람 말을 좀 듣게. 그리고 역병을 피하고 싶으면 위생에 꼭 협조해야 할 것이네. 알겠나?”
“위생은 잘 모르겠지만, 병자들이 여기까지 오지 않도록 약조해주시면 뭐든 다 하지요.”
“약조하겠네. 됐는가.”
“하면, 시키신 일을 다 하겠습니다.”
우습게도 역병의 창궐은 불평과 불만을 잠재웠다.
하지만 백성들을 절대로 이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역병은 두려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 백성들은 허목을 보자 흠칫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 항의하던 이들을 일벌백계한 일의 여파였다.
“선생.”
“됐으니 하던 일을 마무리하게.”
“예, 예.”
허목은 백성들의 분위기를 적당하게라도 파악했다.
그리고 마음을 굳혔다.
뒤따르던 현령에게 읊조리듯 말했다.
“현령.”
“예. 선생.”
“자네가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네.”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봐야겠네.”
“선생……?”
현령은 당황하여 말도 제대로 꺼낼 수 없었다.
그토록 단호하게 의원 파견의 불가함을 역설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한데, 느닷없이 직접 가겠다고 하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백성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탓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탓하자는 게 아닐세. 저들의 말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네.”
“예……?”
“이대로 병자를 방치하면 전례로 남을 것이네. 하면, 훗날 역병이 창궐하면 인근 군현은 모두 나 몰라라 할 것이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작금의 재해는 조정과 군현, 군현과 군현이 유기적으로 거들어야 했다.
어떤 이유라도 지금처럼 고립을 지향하는 방침은 좋지 못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허목 역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런데도 이리 나설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무엇보다, 통제할 수 없는 병자의 행렬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여건이 좋지 않다고 하여 그대로 둔다면 결국, 더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위생국은 개별 군현이 아니라 조선 전역을 관장해야 하는 기구일세.”
허목은 비로소 위생국의 새로운 방침을 설정했다.
이는 그간 고수한 신념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해서, 가야겠네. 그러니 자네가 백성을 잘 다독이게.”
“선생…….”
“잠시 통치에만 집중했네. 나는 조정의 관리가 아니라 의원이어야 한다는 걸 잊었어. 한 명을 살리는 것이 만백성을 구하는 길이라는 걸 내가 잠시 망각하였으니, 어찌 죄가 작다고 하겠는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하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의연했다.
그리고 보태듯 말했다.
“자네의 말이 틀리지 않았네. 경쟁자가 없는 난세가 아니었네.”
“경쟁자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있지. 우리는 백성을 살리고자 하고, 하늘은 백성을 죽이고자 하네. 우리는 지켜야 하고 하늘을 뺏어가고자 하니, 어찌 경쟁이 아니겠는가.”
“허…….”
“해서, 우리는 하늘과 경쟁하는 것이네. 우리 백성의 목숨을 걸고.”
현령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목의 말에 진심으로 감탄한 것이다.
이는 그간 집행되었던 다소 강압적인 방침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고
“…….”
“…….”
“…….”
곁 눈길로 흘기며 귀를 열고 있던 백성들의 표정도 묘해졌다.
지식이 짧을지라도 지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일자무식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사에 무지한 건 아니었다.
해서, 허목의 말에 담긴 뜻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병자는 내가 책임질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이와 다름이 없었다.
저승사자보다 무서웠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쉽사리 믿을 수는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허목은 양반들이 늘 하던 입에 발린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저 담담하게 제 일을 하겠다며 나선 것이니 어찌 진심을 의심하겠는가.
허목이 말없이 등을 돌릴 때였다.
“선생.”
누군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허.”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들이 모습을 보였다.
정말로 의외였다.
바로 도성의 서얼들이었다.
“자네들이 이곳까지는 어찌 왔는가.”
“선생. 소생들이 가겠습니다.”
“뭐……?”
너무나도 의연한 그들의 태도는 허목도 감탄할 정도였다.
“선생께서는 가볍게 몸을 움직이실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니 소생들이 가는 게 맞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참으로 기특했다.
그런데도 그들을 바라보는 허목의 시선은 참으로 복잡했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상황을 정확하게 전하였다.
“죽을 수도 있네.”
“소생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선생. 이는 소생들에게 기회입니다.”
“기회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선생. 역병이 창궐한 지역에 간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죽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시절을 그냥 바라만 본다면, 소생들은 기어이 죽고야 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허목은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서얼의 정치적 약진을 위하여 사지로 뛰어들겠다는 말이었다.
되돌아보면 역병으로 파발이 중단되었을 때 해결한 이들도 서얼이었다.
누군가는 태어나면서 당연히 누렸을 그 무언가를 얻고자, 이들은 이토록 분연히 들고 일어선 것이었다.
참으로 치열한 각오가 아닐 수 없었다.
“감히 이토록 험난한 시절을 기회라고 말하는 소생들을 엄히 꾸짖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소생들은 숨기지 않고 말할 겁니다. 하여, 작금의 난세를 기어이 기회로 만들어 도약할 겁니다.”
“선생께서 신분의 위계를 중시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생들의 쓸모를 입증하는 것만큼은 막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니 소생들을 보내주십시오.”
순수하게 백성을 위하고, 조정과 왕실에 충실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생들도 백성을 위할 기회를 갈망하여 나선 겁니다.”
지금의 행보에 정치적 의도가 있을지라도
“조정에 복무하며, 왕실을 위하여 나설 기회를 얻고자 이리 온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기회가 없었던 이들이었다.
후천적으로 기회를 얻고자 분명한 정치적 의도를 내비치는 게 어찌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러 가지 감정이 거세게 밀려왔다.
끝내 허목은 허심탄회하게 말을 꺼냈다.
“나는 조금 전까지 병자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네.”
“선생께서는…….”
“되었네.”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서얼들의 말을 막았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그저 그런 말을 주고받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랬다.
“한데, 자네들이 이토록 의연하게 나섰네. 내가 어찌 막겠나.”
자격을 운운하지도 않았다.
아직 이들은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 이들이 아니었던가.
“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누군가를 보낼 상황도 아니었네.”
조선에서 자격을 가진 이들은 그토록 몸을 사린다.
그러하니 서얼의 의지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기특했다.
그래서 진심으로 말했다.
“훗날 자네들은 자격을 가질 것이네.”
“…….”
“묻겠네. 무엇을 할 것인가.”
“소생들은 의술이 일천하여 역병을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병자들을 통제하지 못하겠습니까.”
관청의 공백을 채우겠다는 말이었다.
또한, 이는 권한이 없으니 허목이 허락해줘야 했다.
거절할 수 없었으며, 그리할 이유도 없었다.
“의원을 함께 보내겠네.”
“선생께 그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되었네. 하면, 곧장 이동할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대화를 끝낸 허목은 가볍게 좌우를 돌아봤다.
복잡한 감정이 잔뜩 담긴 시선이 느껴졌다.
현령, 향리 그리고 백성까지.
그래서일까?
무언가 알 수 없는 분위기를 담은 공기가 사방을 꽉 찬 상태였다.
허목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홀로 자리를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