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한 걸음 더 나가리라(2)
괜히 옆을 바라보면 괴로웠다.
고통에 허덕이며 쉴 새 없이 흐느끼는 식솔과 이웃을 본다는 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그러했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봤다.
그렇게 바라볼 때 눈에 담기는 게 누군가의 얼굴이 아니라서 참으로 좋았다.
마음도 가벼웠고, 머릿속도 맑아졌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문뜩 즐거운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니, 기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아프지 않아도 된다고.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눈을 감았다.
“…….”
그렇게 죽었다.
“…….”
되돌아보면 죽을 때까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양반이라는 무리를 볼 때마다 들었던 생각이었다.
어찌나 사람을 괴롭히는지 진절머리가 났다.
참으로 지독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각이 나는지 알 수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기근이 발생했을 때 양반의 곳간을 바라보게 된 것이.
또 언제부터였을까?
눈을 부라리며 패악질만 하던 무리가 베풀기 시작했던 게.
그래서일까?
그래서 지금 이토록 그들이 생각나는 걸까?
다시 만나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고마웠다고.
그런데 원망했다고.
“…….”
듣는 이 하나 없지만 말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몸이 옆으로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숨소리가 옅어졌다.
그렇게 죽었다.
“…….”
관리는 참 못된 사람들이었다.
이 어려운 세월에도 조세를 거둬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알게 되었다.
폭우가 내리고 홍수가 덮치고 역병이 창궐하니 알게 됐다.
눈에 보이면 치우고 싶지만, 꼭 보여야 하는 이들이라는 걸.
요즘 지독할 정도로 관복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볼 수가 없었다.
“…….”
눈이 감겼고, 고개가 떨궈졌다.
이렇게 죽었다.
“…….”
되돌아보면 참으로 지독하게 버틴 삶이었다.
역병은 백성을 죽음으로 몰았고, 죽기 직전 백성에게 복잡한 감정도 주었다.
그렇게 많은 회한을 담았던 눈들이 하나씩 감겼다.
“…….”
“…….”
“…….”
역병이 창궐한 군현으로 진입한 서얼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통제할 관원이 없는 고을에서 역병이 창궐한 결과는 너무나도 참담했다.
인세 지옥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곳을 이르는 게 분명할 것이다.
“보아하니 향리도 모두 도망치거나 죽은 듯 보이던데…….”
생각 이상으로 끔찍한 상황이었다.
서얼들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허.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도무지 당혹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난처함이 잔뜩 담긴 침묵이 조심스레 번졌다.
상황이 엄중하기에 당장 행동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나, 가늠조차 할 수 없으니 답답함도 올라왔다.
허둥지둥하는 서얼들의 귀로
“우선…….”
함께 온 의원의 말이 들렸다.
“시신부터 수습해야겠군요.”
“시신이라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화장(火葬)이 가장 좋을 겁니다. 쉽지는 않겠으나 해야 할 일이지요.”
“아.”
“일하러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의원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으나 내용은 날카로웠다.
서얼들은 당황한 듯 여전히 허둥거렸다.
“또, 병자가 아닌 백성을 잘 이끌어야 하니 관청의 역할도 곧장 수행하셔야지요.”
“아.”
의원의 말은 너무나도 간단명료했다.
“뭐 하십니까. 할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재촉하자 서얼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자연스레 상황의 주도권이 의원들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의원들은 위생국 소속으로 지금껏 쉬지 않고 병마와 싸워왔다.
작금의 사태도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역시 본질은 병마와의 싸움이었다.
이러한 연륜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의원들의 ‘지침’은 감히 거역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허. 어서 움직이십시오. 할 일이 태산입니다.”
재차 재촉하자 서얼들은 황급히 움직였다.
지금부터는 눈치껏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회’를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 것이니까.
아니, 오늘의 경험이 내일의 자양분이 될 것이라는 정도는 평생 눈치를 보며 살아온 그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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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의 눈부신 활약 덕분일까?
한동안 제대로 올라오지 않던 장계가 어느 순간부터 쌓이기 시작했다.
군현으로부터의 고립이 점차 풀어졌다.
나는 차분하게 중대본에 쌓인 장계로 인근 군현의 상황을 파악했다.
더하고 덜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서얼이 대거 결합한 군현은 복구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큰 사찰이 있는 지척에 있는 군현은 사족까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더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이 역시 복구에 상당한 진척을 이뤄냈다.
“승려와 서얼이라…….”
개혁은 더딜 수밖에 없다.
중대본이 추진한 개혁 정책 중 아직도 성과가 미진한 것들은 많았다.
그런데 유독 눈에 보일 정도로 도드라지는 건 역시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소외됐던 서얼과 승려라는 계층이 세상 밖으로 노출됐다.
결과, 종래 조선이 일궈내지 못한 성과는 물론이거니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부분까지 챙길 수 있게 됐다.
이는 참으로 바람직하며 놀라운 부분이었다.
“아니구나. 당연한 일이구나.”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문자를 쓰고 읽을 수 있는 지식인이 대거 결합했으니 성과가 더 나와야 하는 것이었다.
경신 대기근이 끝난 이후 이러한 흐름이 어디까지 번질 것이며, 어떤 파급을 낼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작금의 현상은 너무나도 바람직하다는 점이었다.
후대는 중대본의 여러 개혁 중 이를 최대 업적으로 칭하지 않을까 싶었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요.”
말마따나 모처럼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유형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 얼굴도 모처럼 밝군.”
“세상이 어지러운데 어찌 그러하겠습니까. 다만, 오랜 세월 공들였던 일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하니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졌을 뿐입니다.”
“오랜 세월 공들였던 일이라. 그렇군. 동부 지역이 확실하게 자리 잡았나 보군.”
“그렇습니다.”
유형원의 초안이 도성을 갈아버리는 수준이라는 걸 고려할 때 많이 축소되긴 했다.
그런데도 동부 지역의 역사(役事)는 조선판 뉴타운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잘 정착된다면 언젠가는 다른 지역으로 확장할 수 있는 모델이라는 것도 확실했다.
“감축드리네.”
“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지금 무언가를 지원해주기는 너무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하네만.”
“소생의 말을 먼저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재원이 들어갈 일이 아닌가 보군. 내가 성급하게 상황을 곡해했네. 진심으로 사과하지.”
막대한 재원이 들어가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게 유형원의 제안이었다.
그런데 재원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무조건 듣고 집행해도 좋다.
나는 환하게 반기며 재촉했다.
유형원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 따위는 무시하며 재차 재촉했다.
“무엇인가. 서둘러서 말하게.”
“음. 대감.”
“그래. 말하게.”
“대규모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건 어떻습니까.”
“자네가 드디어 실성했군.”
“소생이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을 부디 거두어주겠나? 정말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라서, 자네를 주상께 고하여 파직이라도 시키고 싶은 마음만이 굴뚝같네.”
“걷잡을 수 없는 추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참에 온돌을 전면 보급해야 합니다.”
“이보게. 온돌을 전면 보급하려면 가옥을 다 뜯어내야 하네. 그러니까 백성더러 살던 집을 고쳐야 하니 잠시 나가서 살아야 한다고 해야 한다는 걸세. 어디 이뿐인가? 그 막대한 재원과 인력은 대체 어디서 구할 것인가? 조선 팔도를 대상으로 벌목하고 백성을 동원이라도 하자는 건가?”
“대감. 설마 소생이 그토록 형편없는 제안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내가 실수한 것이라면 당장 자네의 생각을 꺼내 보시게. 냉큼 사과할 것이니까.”
서 있던 유형원은 은근슬쩍 자리를 잡으며 앉았다.
눈빛이 참으로 간사하고, 웃음은 더 간사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안함이 슬며시 엄습했다.
“왜 이러나……?”
“대감.”
“이러지 말게. 자네 분명 색다른 안건이라고 했네.”
“어차피 많은 민가가 소실되었습니다.”
“해서……?”
“있던 가옥을 온돌로 바꾸는 건 어렵겠지요. 하지만, 소실된 민가는 사정이 다르지요. 어차피 새로 지어야 하는 겁니다. 이를 비용이라고 하신다면 참으로 서운하며 놀라울 것 같습니다.”
대체 언제부터 유형원의 화법이 이토록 은근하고 뱀처럼 부드러워졌는지 모르겠다.
분명 이 사람은 직설적인 언어를 구사해 왔는데 말이다.
“해서, 자네 말은, 복구해야 할 지역의 가옥을 모두 온돌로 집행하자는 것인가?”
“대감. 백성은 자신들의 집을 알아서 짓습니다. 이는 조정의 역량이 아닙니다. 그러니 중대본이 방침을 잘 내려서 온돌을 크게 알린다면 어찌 탈이 나겠습니까.”
“음.”
“해서, 소생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가자미눈으로 유형원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세 치 혀가 움직이는 걸 막는 건 실패했다.
“추위가 더 기승을 부린다면 백성은 더 고통스러울 겁니다.”
“…….”
“유비무환이라고 했습니다.”
“듣고 싶지 않군.”
“대감. 시도라도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멀쩡한 집을 허물고 온돌을 집어넣자는 자네의 말을 내가 어찌 수용해야 하나?”
엄청난 추위가 닥쳐온다.
그러니 유형원의 말대로 온돌을 전면 도입하면 좋다.
그런데 이건 불가능한 발상이다.
이렇게 다 쉽게 될 거면 이 고생을 하지도 않는다.
“어찌 멀쩡한 집을 다 허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새로 지을 수는 있습니다. 군현마다, 고을마다 추위에 떨 백성들을 지킬 온돌 시설을 세운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자네 그런 말을 먼저 하면 서로가 참으로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인가?”
“대감께서 늘 서둘러서 판단하고 이르신다는 생각은 아예 안 하시는 겁니까?”
정치가 이렇게 무섭다.
그 강직하던 유형원이 이처럼 뱀처럼 행동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맞는 말로 이렇게 공세를 집중하니 내가 더 할 말이 없었다.
“어떻습니까.”
“백성을 지킬 시설을 세우는 일일세. 사대부의 사가를 허물어서라도 집행해야지.”
“그 말씀은…….”
딱 잘라서 말했다.
“서얼과 승려는 온 힘을 다해서 백성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났네. 하면, 양반들도 무언가를 해야만 체면치레를 할 수 있지 않겠나?”
“가능하겠습니까.”
“시도는 해봐야지. 협조하지 않는 곳은 부득이하게 관청이 나서야 할 것이네.”
“그렇군요. 이참에 양반의 움직임을 재평가해볼 생각이신 겁니다.”
“꼭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네.”
유형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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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은 환하게 웃었다.
너무 기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정말인가? 참으로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선생.”
승려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미 역병을 제압했으니 어찌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드디어 길이 열렸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