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개혁과 혁명 사이(1)
서얼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종일 시신을 수습하느라 옮기고 불을 지폈기 때문인지 그냥 엉망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을 쏟아내지는 않았다.
지금 흘리는 땀방울이 기어코 바다로 나아가는 강물로 성장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관청의 실무를 담당하며 군현을 정비하는 일에도 크게 일조했다.
수령과 향리의 부재로 공백 상태가 되었던 일을 우직하게 추진하여 역병 관리를 잘 이뤄냈다.
허목은 진심으로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만일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토록 탈 없이 일을 치를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장해, 참으로.”
극찬이었다.
서얼들은 민망한 듯 멋쩍게 웃다가 솔직한 속내를 꺼냈다.
“아닙니다, 선생. 소생들의 공이 아닙니다. 이는 의원들이 한 것입니다. 그들이 다 했습니다.”
“허. 그런가?”
“예. 실은 소생들이 어려워할 때 그들이 하나씩 일러줬습니다. 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재해와 정면으로 싸우는 중대본의 위생국이었다.
이곳의 소속 의원이라면 능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또, 그들에게 공을 넘기는 서얼들의 자세도 참으로 훌륭했다.
이토록 큰일을 했는데 공을 탐하지 않는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허목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선생께서 어찌 직접 오셨습니까.”
의아하여 묻던 서얼들의 눈에 그제야 승려들이 보였다.
되돌아본다.
이 자리에 있는 서얼들은 의술이 일천하다.
그러나 상당수의 서얼이 의원의 길을 걸었다.
그러한데 승려가 잡과에 응시한다는 소식에 모두 얼마나 놀랐던가.
경계하고 시기할 만큼 승려들의 재주가 뛰어났다.
작금의 재해를 극복할 때 그들의 의술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서얼 중 한 명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 설마 역병의 해결책이 마련된 것입니까?”
“하하하. 바로 그러하다네. 승려들이 역병의 처방을 알아냈어.”
“저, 정말입니까?”
“선생.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아니, 선생. 정녕 사실입니까?”
허목의 말에 주변에서 바라보던 모든 이가 나서서 물었다.
또, 모두 흥분했는지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였다.
그저 허목만 즐거운 듯 너털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다들 참으로 고생했네.”
또, 백성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잘 버텨주었네. 이제 고생은 끝난 것일세.”
조만간 변승업의 목장에서 상당한 수량의 고기가 당도할 것이다.
미리 연락받은 서찰에 의하면 적당한 수준의 쌀도 함께 보낸다고 했다.
이러면 당장 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허기는 채울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다시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남은 건 삶의 터전을 복원하는 것일세. 이는 기쁘게 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백성들은 눈물로 화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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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본은 현상만 대처하는 곳이 아니었다.
세상이 아무리 험난해도 다가올 미래도 대비해야 한다.
이미 유형원이 온돌 보급이라는 거대한 일을 세상에 꺼내면서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늘도 무언가를 도모하고자 모두 모였다.
물론 현장으로 달려간 허목은 제외하고.
그리고 이번에도 소집과 안건을 발의한 사람은 유형원이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모든 지역에서 대동법을 시행해야 합니다.”
드디어 중대본에서 대동법이 언급됐다.
조선 최고의 법안이라는 찬사로 시작하는 이 법안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물론 단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미 조선의 주된 조세로 자리 잡아가는 지금 대동법을 헐뜯는 건 무의미했다.
지금 가장 핵심적인 건 대체 어찌하면 기근 대처에 대동법을 잘 활용할 수 있는가였다.
“전 지역의 대동법이라. 작금의 난세를 극복할 때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인가?”
“물론입니다.”
늘 그렇듯 유형원은 자신감이 넘쳤다.
“대동법이 무결한 정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간 꾸준하게 지역을 확대하여 시행했습니다.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네 말이 옳지. 그런데도 대동법은 여론 논쟁의 여지가 있네. 그 이유를 안다고 생각하네.”
“물론입니다. 공납을 대동미로 징수하는 것이 대동법의 골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조선은 육로가 험하여 막대한 양의 쌀을 옮길 수 없습니다. 결국 수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량의 쌀을 징수하려면 조운선이 몇 배는 더 필요하지요.”
“자네 말이 참으로 지당하네. 그래서 그간 우리 조선은 대동법을 점진적으로 확대했네.”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데 10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기득권의 저항이라고 알려졌으나 실상은 달랐다.
말 그대로 조선의 내부 역량이 대동미를 운송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게 결정적이었다.
그래서 조정의 일각에서도 대동법 효과는 인정할지라도 여전히 반대하는 이가 많았다.
또, 우리는 아직 대동법을 전 지역에 시행할 수 있는 교통로를 확보하지 못했다.
여전히 시기상조였다.
그러한데 유형원은 이를 기어이 주장하고 있었다.
“그동안 대동법의 전면적 시행을 막았던 근거가 지금 집행해야 할 이유입니다.”
“어렵군. 더 자세히 말해주겠나?”
“대감. 어차피 조정으로 운송할 방법이 부재하거나 어려워서 지속하여 미뤄진 대동법입니다. 그렇다면 운송하지 않으면 될 일입니다. 어차피 운송에도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니 더 잘됐습니다.”
“자네 혹시……?”
“대동법을 시행하되 기근이 발생한 군현은 조세를 조정으로 보내지 않고 진휼미로 사용하는 유진(留賑)을 집행하면 될 일입니다.”
“…….”
나는 먼 산을 쳐다봤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일제히 먼 산을 바라봤다.
사실 유형원의 제안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우선 이미 환곡을 돌려 군현의 재정자립을 도모하는 방책이 순차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근 지역에서 ‘유진’을 집행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현재 조선은 모든 군현의 재해에 허덕이고 있다.
결국, 대동미를 군현에서 모두 사용하게 될 것이다.
군포까지 폐지했는데 대동미까지 이리한다면 조정은 조세를 징수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니 제안은 고려할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제안자가 유형원인 걸 감안하면 이 제안을 고려해야 할지도 몰랐다.
“대감. 만일, 이를 진작에 시행했다면 삼남 지역의 홍수 극복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당장 백성에게 필요한 건 굶지 않을 수준의 쌀이 아닙니까. 더욱이 작금의 정국에서는 파발이 오가는 시일이 전보다 더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이러하니 조정에서 구휼미를 내릴지라도 시일이 너무 허비됩니다. 어차피…….”
유형원은 특유의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정의 국고는 구휼미로 사용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괜한 시간 낭비, 운송비용 낭비를 하지 말자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자 지금껏 귀에 힘을 주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하면, 대안이 있을 것이네. 조정의 국고를 확보할 대안 말일세. 나는 이를 알고 싶네만.”
“대안은 조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무슨 말인가.”
분명 아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주고받은 말은 현황과 원론에 불과했으니까.
유형원이 정리하듯 말했다.
“대감. 이번 추위와 홍수로 그간 조선이 취해온 방책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이럴 때 과감한 변화를 도모하지 않으면 백성은 생존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음.”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강력한 중앙 집권을 추구하는 조선의 기존 방침과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 말이다.
또, 이건 말처럼 간단한 문제도 아니었다.
그저 돈을 중앙으로 보내지 않고, 군현에서 알아서 사용하겠다는 말로 쉽게 정리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조선을 200년간 지탱한 체계를 대대적으로 뜯어내야 하는 일이었다.
각종 절차와 법도를 수정하지 않으면 군현에서 재원을 자립적으로 운용하는 게 불가능할뿐더러, 억지로 하더라도 무조건 탈이 생긴다.
그런데 이게 또 희한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완벽하게 정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이미 주상께서 경국대전조차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이연이었다.
조선의 군왕이 한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이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이상, 그 연장선상에서 논의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작게라도 유형원의 질주를 잠시 멈추게 할 필요는 있었다.
그래야 숨을 돌리고 논의를 조금 더 밀도 있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이네. 뜯어내야 할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닐세. 감당할 수 있겠는가?”
“법도는 고치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죽은 백성은 살릴 수 없지요. 하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는 자명합니다.”
내게 온돌의 보급을 말할 때는 분명 능글거리는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파격적인 개혁을 말하는 지금은 누가 봐도 혁명가 그 자체였다.
정말 입체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소생이 아주 흥미로운 현상도 보았습니다.”
“무엇인가.”
“작금의 재해를 능동적으로 방비하는 군현은 모두 공통성이 있습니다. 조정의 지원을 막연하게 기다리지 않고 직접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자립성이 강합니다.”
서원을 무력화하고 사찰과 서얼 그리고 상인과 무당까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집단을 총망라한 군현일수록 극복이 빨랐다.
물론, 이런 현상을 유형원의 말처럼 군현에서 자립화를 일궈낸 결과라고 보는 건 무리가 있었다.
중대본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존재하기에 유기적으로 일이 진행된 것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정확했다.
그런데도 굳이 이를 언급하지 않는 건 해당 발언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전체적인 틀이지 근거의 정황석이 아니었다.
즉, 바로 지금 군현에서 재정까지 어느 정도라도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면 재해 극복이 더 수월할 수도 있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니 말이다.
“대감.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기존의 조선이 감당할 수 없다면 새로운 조선으로 바꿔 보는 게 가장 확실한 해결책입니다. 이미 우리 조선은 이를 보고 있습니다. 아니,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참에 조선의 체질도 뜯어고치자는 말이었다.
아예 싹 다.
또한, 이러한 방향은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현상을 가져올 것이다.
내가 원 역사를 알기에 장담하는 게 아니었다.
조선이 만백성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결과로 귀결될 것이니 누구나 알 수밖에 없다.
나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쯤 되니 경신 대기근이 재앙인지 하늘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물론, 재앙이다.
다만 그 속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래서 말했다.
“반론이 없다면 반계의 안건을 집행하겠소.”
그리고 누구도 반론을 꺼내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대동법을 내세워 군현의 재정 자립화를 결정했다.
중앙 집권의 나라, 조선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