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개혁과 혁명 사이(2)
군현의 재정 자립화.
기근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으나, 알 사람은 다 안다.
이 방책이 큰 효과를 낸다면 종래 조선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중앙집권이 흩어지고 군현 자치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뤄지는 나라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
집행은 집행이며, 기근 방비는 기근 방비다.
나는 당연히 내일의 모습도 머릿속에 그려야 했다.
하여, 작금의 조선에서 이를 가장 잘 예견할 두 사람을 만났다.
바로 변승업과 김근행이었다.
그리고
“…….”
“…….”
두 사람은 말을 아꼈다.
일전에 내가 서슬 퍼런 경고를 했기에 조심스러워진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내가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되돌아보면 처음 변승업과 의기투합했을 때만 해도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다고 여겼다.
그의 어려운 처지를 긍휼히 여겼기에 편의를 제공하긴 했으나, 막대한 재원의 지원을 상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그런 시기는 지났고, 수준도 넘어섰다.
종래 조선은 조정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상단의 방향과는 크게 관계가 없었다.
어차피 조성의 정책이라는 건 세밀하지 않았고, 상업과는 무관하였기 때문이었다.
억상 정책이 강화될지라도 도도하게 흐르는 상업의 발전을 조정이 막을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조정은 상업의 발전을 주도한 게 아니라, 발전하고 ‘있는’ 상업을 뒤따르기에 급급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작금의 조정이 집행하는 정책과 상단의 이권은 너무나도 진하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의 결정이 곧 상단의 발전이었다.
상단의 후퇴가 곧 중대본의 위기였다.
밀접해도 너무 밀접해졌기에 두 사람의 태도는 틀렸다.
또한, 더 결정적인 게 있었다.
나는 이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다시 경고하게 됐다.
“일전에 내가 자네들에게 금권의 태동을 경계하여 경고했네.”
“소인들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태연한 답변이었다.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걸까?
혹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일을 처리하길 바라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어림도 없다.
“그러니까 내가 자네들에게 직접 경고하게 되었다는 것이네. 일개 군현의 수령이나 흔한 사대부가 아니라 바로 내가 말일세.”
내가 찾아와서 직접 물었건만 답하지 않고 버틴다는 거 자체가 문제였다.
그러한데 이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서로 피곤해진다.
“과거였다면 어땠을까.”
고개를 들면서 수염을 쓸어내듯 만졌다.
몇 번이나 반복하며 두 사람을 지긋이 쳐다봤다.
눈동자의 움직임, 볼의 씰룩거림, 입술의 떨림까지 놓치지 않았다.
모든 걸 종합하였을 때 두 사람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당혹감.
설마 내가 또 압박할 줄은 몰랐다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나는 무언가를 적당하게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송시열이며 송자이기에 그러했다.
그래서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자네들이 감히 이럴 수 있을까?”
분명 내가 일방적으로 짓누르고 있다.
하지만, 상황을 더 정확하게 세밀하게 봐야 한다.
그러니까
“지난날 있었던 나의 경고에 불만을 품고, 오늘 나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 것.”
상황은 직관적이었다.
그러니까 상단의 주인이 나 송시열에게 개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냥 직관적으로 말했다.
“자네들, 진정 팔다리가 잘리고 싶나?”
“송구합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정확한 근거를 찾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정말 솔직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또, 피곤한 사람들이었다.
늘 힘의 우위를 가늠하며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래서 말했다.
“이 자체가 너무 불쾌하네만, 자네들은 어찌 생각하나?”
“대감. 소인들이 재차 결례를 범했습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키우는 걸 어찌 막을 수 있나? 한데 내 앞에서마저 이러는 건, 정말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네만.”
두 사람은 내가 억지로 안 보려고 해도 보일 정도로 흠칫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스치는 게 있었다.
오래전 유형원과 나눈 대화였다.
-이 길이 조세 제도의 문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긴 합니다.
-우리의 길이 그러할 것이라는 건가?
-만일, 이러하다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다시 생각해보겠지.
-그렇군요.
-한데, 이를 왜 말하는 것인가? 무엇이 조세 제도를 어지럽힐 수 있다는 것인가.
-아. 먼 훗날 그리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요.
-먼 훗날……?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확실한 건 작금의 개혁이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지요.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저 그렇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먼 훗날을 고민하기에는 지나친 사치가 아니겠습니까.
-음.
-우선 작금의 위기부터 극복하고 벗어나는 게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제도의 문란은 언제라도 찾아온다.
모순은 반드시 존재하니 말이다.
해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다.
지금 왜 이 대화가 내 머릿속에서 강렬하게 숨을 쉬는지 말이다.
그래서 상념을 밀어내며 말했다.
아니, 물었다.
“누군가.”
“예?”
“내가 말해야겠군.”
“무슨 말씀인지 소인들은 도통 모르겠습니다.”
“자네들, 반계와 만났나?”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이 굳었다.
그리고
“…….”
“…….”
내 말에 대한 답변을 침묵으로 화답했다.
입꼬리가 하늘까지 올라갔다.
나는 아직도 내가 이 상황을 도출할 수 있었던 논리적 근거를 찾지 못했다.
오직 직관이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해야 했다.
“군현의 재정 자립화. 상단의 이권과 관련이 있는가.”
“대감…….”
“사지를 찢고 상단을 사분오열 내기 전에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이네.”
“……대감께 어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다 솔직하게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변명 그리고 핑계. 그런 걸 들어주기에는 내가 마음이 불편하네만.”
“……군현의 재정 자립화는 상단의 이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도를 말하게.”
“전례 없는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끌.”
상단이 커질 수도 있다.
상업이 크게 발전할 수도 있다.
여러 개혁을 관철하고 집행하면 응당 이리될 수가 있었다.
지금껏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가장 중요한 건 경신 대기근의 방비와 극복이었기에 무조건 억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금권의 태동은 용납할 수 없었다.
먼 훗날 결국 그리될지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또한, 기어이 그런 세상이 열릴지라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기에 막을 수 없을 수준이어야만 했다.
나는 아직도 금권을 신뢰하지 않았다.
아무리 삐뚤어진 눈으로 볼지라도 조선의 위정자는 백성을 위한다.
제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백성을 긍휼히 여긴다.
양반의 기득권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백성을 살핀다.
이러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위정자의 권세는 백성의 존재로 유지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양반의 특권은 조선의 번영으로 강화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시절 금권은 아니었다.
상단의 이권은 백성과 전혀 무관하다.
조선의 백성이 죽어도 타국과의 무역으로 이권을 도모할 수 있는 무리가 작금의 상단이었다.
상단의 발전을 위해서 조선의 국익 따위는 버릴 수 있는 이들이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이를 규정하는 근거는 바로 법도를 바라보는 시각과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편에서 나오는 본질이었다.
결국 군현의 재정 자립화는 정말 조선의 체질을 통째로 뜯어버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싱긋 웃었다.
“그래. 무엇을 주고받은 것인가.”
“소인들은 아무것도 내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사실입니다. 그저 조선을 뜯어고칠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하였습니다.”
유형원.
시대를 원망하며 사라졌던 개혁가 혹은 혁명가.
조정에서 할 수 없으니 외부에서 일을 도모한 것이다.
정말 지독한 인사가 아닐 수 없다.
이토록 엄청난 일을 기어이 추진해내다니 말이다.
“기다리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응당 그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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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 내가 찾아올 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묻지. 기어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대감께서 금권의 태동을 무척이나 경계한다고 들었습니다.”
“알면서 이리한 이유가 무엇인가.”
“어렵지 않습니다. 대감께서 경계하는 모든 것이 조선의 혁신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진정 모르십니까?”
유형원의 입가에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조선의 변화를 대감이 주도한 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감이야말로 조선의 모순, 그 자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십니까?”
“뭐……?”
“불쾌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조선이 혁신을 이룬다면 마지막에는 대감이 있을 겁니다. 대감이야말로 조선의 혁신을 막는 최후의 장벽이니까요.”
“썩 기분 좋은 표현은 아니군.”
“낙향하여 세상을 바라볼 때와 중대본에서 직접 현실을 직접 맞이하며 많은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지요. 그 끝에는 양반 조선의 유지와 강화가 보였습니다.”
“해서?”
“조선이 2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어찌 모순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때마다 위정자는 본질적인 문제는 그대로 두면서 미봉책으로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최소한의 개혁, 이것이야말로 조선 아니 양반 조선이 수명을 이어올 수 있던 근거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상의 부조리함을 바라보던 과거의 나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지요.”
유형원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담담했다.
“진골 귀족의 패악질로 호족이 등장했습니다. 문벌귀족의 일방적인 독주에 무신이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귀족의 전횡에 사대부가 역성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는 그러한 일이 없을 겁니다.”
“오늘에서야 자네의 진짜 속내를 들을 수 있겠군. 아니지. 어째서 그러한 일이 없는지 내가 말해도 되겠나?”
“이런. 소생도 오늘 대감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먼저 말씀하시지요.”
“조선은 새로운 위정자가 양반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양반이 되고자 할 것이네.”
“…….”
“자네의 표현을 빌리지. 최소한의 개혁? 그것은 양반 내부의 변화가 존재할지라도 ‘양반’이라는 두 글자를 치워버릴 수 없게 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는 걸세. 또, 자네의 표현대로 조선은 그 어떤 나라도 시도할 수 없었던 꾸준한 자강을 도모했네. 이 또한 양반이 버틸 수 있는 근거라면 근거겠지.”
“이거 참으로 놀랍군요.”
묘한 떨림까지 느껴졌다.
듣기에 따라서 흥분한 듯 보일 정도였다.
다만 확실한 건 유형원은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다.
“소생과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 줄 전혀 몰랐습니다.”
“결론까지 말해주겠네. 조선은 이대로 두더라도 몇백 년의 더 역사를 이어갈 수 있을 거네.”
“정정하지요. 조선이 아니라 양반 조선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미 조선은 변화가 시작됐네. 양반의 역사가 이어질지라도 양반 조선이라는 비하는 옳지 않아.”
“대감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양반이 권세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요.”
“그게 대체 왜 문제가 되는가?”
“하여, 대감이 조선의 혁신을 막는 마지막 장애물이라는 것입니다.”
반론을 펼치거나 듣기 전에 하나 물었다.
아니, 한 가지를 말했다.
“자네와 나의 가장 큰 차이를 아는가?”
“무엇입니까.”
“나는 이 순간도 버거워.”
진심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쉬지 않고 내일을 바라보고 있군.”
나는 오늘을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의 최선이 모여 조선의 변화를 추동하고 있었다.
이것이 나와 유형원의 가장 큰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