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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38화 (238/298)

238화 개혁과 혁명 사이(4)

상상해볼 수 있다.

이 땅의 위정자가 양반이 아니었다면.

이 땅에 아로새겨진 국호가 조선이 아니었다면.

아니, 만일 개국 직후 열의로 가득했을 시기 경신 대기근이 도래했다면.

지금과는 너무나도 달랐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재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쌀 한 톨을 더 구하고자 치열한 정략과 힘겨루기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걸음 더 걸어가고자 할 때 제도 개혁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판타지다.

이 땅의 위정자는 양반이며, 국호는 조선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어쩌면 이러하기에 유형원이 나를 변화의 마지막 장벽이라고 지칭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유형원의 말을 하나씩 반박했다.

아니, 그저 답한 것일지도 모른다.

“귀족과 양반은 다르다고 자네가 말했네. 귀족은 모순을 방치했으나 양반은 개혁을 도모했어. 어찌 같다고 할 수 있는가.”

“태생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귀족의 뿌리는 귀족일 뿐이며, 양반의 뿌리는 사대부이기에 발생한 지극히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양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진심으로 심장이 따가워질 지경이었다.

“양반은 이 땅에 존재했던 그 어떤 위정자보다 교활하고 뛰어나며 총명합니다. 하여, 모순을 위하여 나선 게 아니라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발끝을 조금 움직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보십시오. 그 결과가 세상 모든 모순을 안고 있는 양반입니다. 중대본이 작은 무언가라도 하고자 할 때 걸림돌이 되는 양반입니다.”

어쩌면 나와 유형원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다른 게 아니었을까?

대화가 길어질수록 좁혀질 수 없는 간극(間隙)이 너무나도 지독할 정도로 느껴졌다.

“비단 이것만이 아닙니다.”

유형원은 작심한 듯 속에 담은 말을 다 꺼냈다.

“임진년 그리고 병자년. 두 번의 전란으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습니다. 어쩌면 왕조가 바뀌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한데, 어찌 되었습니까. 개밥을 던지듯 최소한의 개혁을 도모했습니다. 결과, 200년 역사에 찾을 수 없는 최대치의 부귀영화를 영위하고 있습니다.”

분명 조선은 개혁을 일궈냈다.

그런데 유형원은 양반의 권한이 더 강해졌다고 바라봤다.

개혁이란 가진 자의 무언가를 박탈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가.

“세상에 꺼낸 게 고작 개밥에 불과했거늘 이조차도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폐쇄적인 개혁의 단행이었습니다.”

“폐쇄적인 개혁의 단행이라고 했나?”

“위계의 강화. 더 놀라운 건 단지 법도가 아니라 백성의 의식을 지배하는 주입으로 진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과, 양반은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흐름을 끊은 것이 바로…….”

유형원은 갑자기 엷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웃음이 참으로 처연하였다.

“대감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고 있다.

원 역사에서 예송논쟁이라고 불렸던 극한의 대립을 내가 마무리했으니 말이다.

“만일 대감이 아니었다면 서인과 남인은 복제를 두고 치열하게 다퉜을 겁니다. 필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전부였으니 말입니다. 한데, 대감이 이를 끝냈습니다.”

“…….”

“왜 그러셨습니까.”

“소모적이라고 생각했을 뿐일세.”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소모적이라고 바라보셨습니까.”

“윤증이 말하였네. 백성의 옷이 더 중요하다고. 나 역시 그렇게 여겼을 뿐일세.”

“거기서 시작된 모든 건 서원 세력에 일침을 가하는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한데도 부족한가?”

“참으로 고약한 상황이 아닙니까. 아니, 얄궂은 상황이라고 해야 합니까? 조선의 변화를 막는 최대 장애물이 대감이거늘, 대감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진행되었습니다.”

“반계. 듣게나. 겉으로 본 현상만 그러할 뿐일세. 최소한의 개혁은 양반의 권한을 축소하고 있네.”

“…….”

유형원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작게라도 내 말을 동의하지 않는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는 양반의 권한이 약해질 때 대안 세력이 고개를 든 게 아니라 양반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괴현상에 집중한 것이다.

즉, 종래 존재했던 순수 양반의 권한‘만’ 약해졌을 뿐, 양반 세상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조차도 변화라고 봤으나, 유형원은 전혀 아니었다.

“원래 소생이었다면 응당 그랬을 겁니다. 아무리 조선을 원망하였다고 할지라도 어찌 감히 양반의 질서를 송두리째 부정하겠습니까. 그들이 곧 조선을 이끌어간 위정자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보고야 말았기에, 그렇게 멈추기에는 소생의 피가 너무나도 요동쳤습니다.”

“대체 무엇을 보았는가?”

“대감이 시작하고 이끌었던 개혁에서 소생은 보았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어쩌면 피를 보지 않고도 이 땅의 위정자를 교체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

“태조께서 단행하신 역성이 피를 보지 않은 왕조의 교체였다면, 소생이 본 건 위정자를 교체할 수 있는 혁명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상인이었나……?”

“아닙니다. 단지 상인이 아니라 대감께서 그토록 경계하시는 금권입니다.”

가슴 한쪽이 답답했다.

숨 쉬는 게 불편할 정도로 꽉 막혀버린 것만 같았다.

“묻겠네. 어찌하여 그들을 선택하였나.”

“이 나라 조선에서 무언가를 책임질 수 있는 무리 중 그들보다 혁신적이며 기존 질서에 때가 묻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까.”

“종래 조선의 위정자로부터 완벽히 탈피한 세력을 선택했다는 말인가.”

“가장 적합했습니다. 누구보다 능력이 있으나 양반의 권세에 눈치를 살피며 늘 빼앗겼던 이들이니 말입니다. 조선에서 이들보다 위정자로서 성장 가능성과 능력을 갖춘 집단이 있습니까.”

이는 진실로 나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내가 변승업을 만났고, 김근행과 대화했다.

그들이 중대본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기존의 조선 질서에서 볼 수 없었던 상업의 호황기를 앞에 두고 있다.

분명 그들은 일국의 위정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형원은 이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해서, 그들에게 길을 내어준 것이다.

어떠한 대가를 받지 않고, 오직 나아갈 길을 알려준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길을 만들어서 일러주기만 했을지도 모른다.

필시 이러했을 것이다.

“선대로부터 재력을 물려받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단은 뒤늦게 덤벼 크게 일궈낼 가능성이 여전히 있는 세계입니다. 이들을 어찌 폐쇄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유형원의 눈빛은 강렬했다.

마주보기 버거울 정도로 뜨거웠다.

“양반이 이권을 탐하면 백성이 굶어 죽지만, 상단이 이권을 탐하면 나라의 재원이 넉넉해집니다.”

“…….”

“양반의 개혁은 기득권을 적게 뺏기기 위한 행위지만, 상단의 개혁은 무역의 팽창을 도모하기 위함이니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

“양반이 폐쇄적인 신분 질서를 강화하면 나라는 썩지만, 상단이 쇄국을 외치면 나라가 보존될 것입니다.”

“…….”

“양반이 무능력하면 백성이 도탄에 빠지지만, 상단이 무능하면 다른 상단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이니 어찌 위험하겠습니까.”

유형원은 숨을 마셨다.

그리고 서서히 내쉬었다.

꽉 쥔 주먹에서 그의 진심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전해졌다.

“이러한데 소생이 어찌 그들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그들이야말로 작고 가난한 이 나라 조선을 환골탈태시킬 수 있다고 여깁니다.”

나는 유형원을 바라봤다.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냥 잠시 그렇게 바라봤다.

열의로 가득하던 그의 눈동자가 차분해졌다.

씁쓸함을 밀어내며 말했다.

“자네가 착각하는 게 있네.”

“무엇입니까.

“나는 양반의 질서를 옹호하지 않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감은 분명 그러셨습니다.”

“그저 양반의 힘이 필요하기에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뿐일세.”

“하면, 상인의 힘이 더 커진다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겁니까?”

“애석하지만 그럴 수는 없네.”

“오늘 비로소 대감의 속내를 모두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결론부터 말하지. 나는 온몸으로 금권 조선의 태동을 막을 것이네.”

“…….”

“자네가 말한 것처럼 변화의 마지막 장벽이 될 것이네.”

진심으로 말했다.

“살아 있는 유일한 성현, 송자로서의 모든 힘을 동원할 것이며, 모든 권위를 끌어낼 것이며, 죽더라도 살아 생명을 불태울 것이네. 기어이 그리할 것이네.”

죽음을 넘어선 나의 각오였다.

유형원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다.

왜……?

“나는 적어도 수백 년간 조선의 국시로 남을 말을 남길 위치에 있기에, 능히 할 수 있네.”

나는 송자이기에 그러했다.

“지독할 정도로 막으시는 저의가 대체 무엇입니까. 이런데도 양반의 질서를 옹호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어찌하여 이토록 금권을 경계하는가.

현대 국가에서 재벌의 횡포를 보았기에 그러한가?

혹은 역사가 발전하면서 나타난 금권의 위력을 보았기 때문인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아니었다.

나는 고작 그런 유치한 이유로 금권의 태동을 짓누른 게 아니었다.

“금권은 견제 세력이 존재할 수 없네.”

“아닙니다. 금권은 견제 세력이 존재합니다. 양반이 그러할 것이며, 군왕이 그러하며, 금권의 내부에서도 끝없이 견제할 것입니다.”

“금권이 조정을 지배한다면 양반은 양반이 아닐 것이며, 군왕도 군왕이 아닐 것인데 대체 무엇을 견제한다는 것인가? 금권 내부의 견제는 상단의 경쟁에 불과할 뿐 금권 자체에 대한 견제가 아닌데,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면, 어찌하여 금권은 견제할 수 없는가.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그들은 학문과 경륜이 아닌 오직 재력으로 정치적 권력을 확보하고 이어갈 것이네. 지금도 변승업과 김근행의 재력은 중대본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수준일세. 만일 그들이 작금의 역할을 권력화할 수 있다면, 누가 감히 감당할 수 있겠나? 못하지. 누구라도 막을 수 없네.”

“선대로부터 재력을 넘겨받아 거상이 되는 이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상단이란 후천적인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몰락하게 됩니다. 또한, 개인의 노력으로 큰 부를 이루는 이도 얼마든지 등장합니다. 오직 성리학으로 통치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지금보다는 개방적이고 탄력적입니다.”

“그들이 또 재력을 후대로 넘기겠지. 하면, 상단의 재력은 일국을 뒤흔들 수준이 될 것이네. 조선처럼 작은 나라라면 참으로 쉽겠지.”

나는 이번에 봤다.

그런데 나만 본 것이 아닐 것이다.

“성균관의 쇠고기부터 대일 독점 무역과 대청 독점 무역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는가.”

“…….”

“고작 두 명이었네. 변승업과 김근행. 이 두 명이었네. 이 두 명의 재력에 조선이 움직였네. 한데, 만일 그들이 이를 권력화하면 어찌 되겠나? 자네, 이를 고려는 해보았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유형원의 논리를 논파할 것이다.

아니, 토론할 것이다.

오늘은 이래야만 했다.

끝은 예정되었으니까.

그래서 과정은 치열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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