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개혁과 혁명 사이(5)
참으로 작다.
보잘것없다.
그리고 가엾다.
이 나라 조선이 그러했다.
지금이라도 김근행과 변승업이 마음만 먹으면 나라의 경제가 휘청일 것이다.
기근 극복은커녕 내수(內需)시장의 혼란을 막는 데 시간을 다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당대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유형원이 이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들이 그럴 능력이 있는데도 아무런 악행을 자행하지 않는다고 보는가?”
“아니겠지요.”
“그렇지. 했다가는 내가 사지를 찢어버릴 것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세.”
“해서, 기근 방비의 묘안을 내어 은밀하고 진하게 진행한 것입니다.”
만일 내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았다면, 금권정의 밀알이 뿌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흩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실제로 유형원의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었다.
적어도 동부 재개발이 완공되기 전후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시기까지 하나씩 묻는 건 의미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유형원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지겨운 이야기를 한 가지 하겠네.”
“하하하. 좋습니다. 소생은 원래 고리타분한 대화를 선호하지요.”
“모처럼 마음에 드는군.”
“늦게나마 그리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일국을 운영하는 위정자가 자네의 말처럼 재력만으로 등장한다면 철학이나 번뇌가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이야말로 지옥일세.”
“부족한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던 기득권이 있습니까? 예상되는 일부의 사례로 논지를 흐리지 마십시오.”
나도 이 문제를 길게 언급할 생각은 없다.
어떤 시스템을 구축할지라도 자격 미달의 위정자는 무조건 등장하는 것이니까.
물론, 이는 본론으로 가기 위한 서두에 불과하다.
“신라처럼 혈통이 중시되는 진골 귀족.”
금권이 지배하는 세상은 오히려 더 외부를 배척한다.
“고려의 무신처럼 폭력을 용인하는 세력.”
금권이 지배하는 세상은 저열하다.
“조선의 양반처럼 폐쇄적인 집단.”
오직 자신들의 이권을 위할 것이다.
이들의 이권은 유형원이 말한 것처럼 시장의 확대가 아니다.
상단이 가진 부의 증진에 불과하다.
“이 모든 걸 더하여 금권이라고 할 것이네.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탄생할 수 없네.”
내가 금권을 경계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유형원의 주장을 하나씩 반박했다.
“상단이 이권을 탐하면 국고를 사유화할 것이네. 그러나 양반이 이권을 탐하면 제 곳간을 채우는 게 전부겠지.”
“…….”
“상단의 개혁은 오직 상단의 이익만을 도모할 것이네. 한데, 양반의 개혁은 적어도 백성의 숨통은 열어주지 않았나?”
“…….”
“상단이 쇄국을 외칠 때 무역이 중단될 것이네. 그런데 그들이 쇄국을 선택하는 건 국익이 아니라 제 세력의 팽창을 위한 방책에 불과할 것이야.”
“…….”
“나라를 통제하는 금권이 무능력하면 백성은 쌀 한 톨도 구할 수 없을 것이네. 그러나 양반은 무능력해도 쌀은 내어준다네.”
이것이 오직 이권을 바라보며 성장한 상단과 철학을 가진 위정자의 차이였다.
“그들은 국익이 아니라 상단의 이익에 앞장설 것이네. 만백성의 생존과 조선의 국익을 훼손할지라도, 무역의 길을 열 수만 있다면 기어이 이 길을 선택할 것이야.”
“대외 무역에서 상단이 힘을 내려면 자국의 국세가 그만큼 팽창되어야만 합니다. 제 이익을 그토록 중시하는 무리가 어찌 그런 결정을 하겠습니까. 또한, 상단의 성장은 결국 조선의 국세가 나아가는 걸 의미합니다. 해서, 대감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합니다.”
“끌. 그걸 왜 상단이 결정하나? 조정에서 상업을 장려하는 게 옳네. 해서, 나는 다시 지겨운 말을 꺼낼 수밖에 없다는 걸세. 적어도 위정자가 철학은 가져야 하는 법일세.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나라에 대해서 생각은 해봐야 한다는 것이네. 한데, 금권은 이조차도 바라보지 않을 것인데, 정녕 옳다고 생각하나?”
나는 진정 이렇게 생각했다.
“조선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도구가 아닐세.”
금권은 조선을 도구‘화’할 것이다.
“자네의 눈에 보인 양반의 역사가 비루할 수도 있을 것이네. 하지만 적어도 양반은 조선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네. 아무리 양반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악을 썼더라도 도구로 활용하지 않았다는 걸세.”
어찌 금권의 강점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내게 그건 보이지 않았다.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할 수 없는 이 시절에 금권은 ‘악(惡)’일 뿐이다.
거스를 수 없기에 언젠가는 등장할지라도, 나는 이를 최대한 늦춰낼 것이다.
“종래 양반의 조선은 폐쇄적이며 경직되었다는 걸 알고 있네. 한데, 나는 이를 옹호하지도 않았고, 바꾸고자 하지도 않았네. 자네도 알듯 그저 기근을 방비했을 뿐일세.”
이만하면 된 것이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변화다.
개혁과 혁신도 조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서얼과 승려의 부각으로 사족은 변화를 시작했어. 이만해도 조선의 변화가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네.”
“정녕 변화를 원한다면 한 번에 바꿀 수 있습니다. 어찌 그리 멀리 돌아가고 하는 겁니까.”
“다시 말해야 하나? 나는 변화를 주도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아. 기근을 대비할 수만 있다면 양반‘만’ 득세해도 그냥 둘 것이네. 그저 그 길을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일세.”
“참으로 괴이하군요. 기근 방비의 최선은 응당 소생의 제안이었는데 반대하셨습니다.”
늘 그렇듯 유형원이 꺼낸 방책은 아주 혁신적이었다.
제도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 기근 방비에 가장 효율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리고 강력하게 조선을 뜯어고치고 있었다.
체질의 변화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국호만 남기고 다 바꾸고자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말이 옳을지 모른다.
내가 변화를 막는 마지막 장벽이라는 표현 말이다.
“나는 반대하지 않아.”
“예……?”
“군현의 재정 자립을 도모할 것이네. 상단의 성장도 견인할 것일세.”
지독한 모순이었다.
금권의 태동을 막고자 하면서 길을 열어둔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길을 선택했다.
“위정자가 되기 위해 누구나 양반이 되어야 한다면 금권을 억누를 수 있네.”
전근대다.
교지 한 장에 상단을 모조리 도륙할 수 있는 세상이다.
나는 이를 유지할 것이다.
온몸으로.
최선을 다하여.
“대감.”
유형원의 눈은 더 붉어졌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진하게 전해졌다.
“묻습니다.”
“말하게.”
“승려가 백성에게 언문을 이르고 의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입니까.”
유형원은 본질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기근의 방비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나는 진실로 그러했다.
“이 또한 그저 기근의 방비에 불과하다고 이르실 겁니까.”
“그렇다네.”
“허.”
“백성이 언문을 익혀 의술을 배운다면 좋은 일이네.”
“이들은 위정자가 될 수 있습니까.”
“종래 조선의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양반이 된다면 왜 불가능하겠나.”
“오직 상단만 안 된다는 겁니까.”
“상인이 조선의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양반이 된다면 막을 수 없겠지.”
나는 유형원의 머릿속에 남은 마지막 ‘잘못’을 뿌리째 뽑아버리기로 했다.
“금권이 지배하는 조선은 상인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육조 판서가 되어서 군권을 휘두르며 비변사를 좌지우지하는 세상이 아닐세.”
“무슨 말씀입니까.”
“금권은 그들이 상단에 앉아서 조정의 대신을 부르고 보낼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걸세.”
“…….”
“관직이 아닌 비선으로 존재하기에 누구의 비판도 받지 않으며 탄핵도 당하지 않아. 이것이 금권의 본질일세. 이러한 금권은 일말의 정치적 책임감도 없이 조선을 마음껏 휘두를 것이네. 오직 자신들의 이권만을 위해서 말일세.”
조선이 조선인 이유는 공의(公議)가 통치의 기본이기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군왕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책임 정치가 가능했다.
하지만 금권은 아니다.
“하여, 나는 금권 조선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네.”
물론, 상인이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것도 최대한 늦출 것이다.
막대한 재력을 가진 그들이 관복을 입는 건 별로 바람직한 게 아니니 말이다.
나는 이처럼 모순적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논제였으니까.
그리고
“그렇군요.”
유형원의 입이 열렸다.
“알겠습니다.”
무엇을 알겠다는 것일까.
지금 유형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강하게 밀려왔다.
속이 너무 퍽퍽했다.
“애초 소생은 낙향하여 홀로 글이나 쓰던 비루한 신세였지요.”
“…….”
“그러나 중대본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도모해봤습니다.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반계…….”
“또한, 모처럼 즐거운 토론이었습니다. 아니, 이토록 속이 시원했던 적이 있었나 싶군요.”
“반계. 기어이 이리해야겠는가.”
“하하하. 대감. 소생은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유형원은 고개를 들어 눈동자를 서서히 움직였다.
나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만 봤다.
답은 나와 있으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말해야 한다.
나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동지로서 말을 꺼냈다.
“반계…….”
하지만, 말이 길게 나오지 않았다.
그저 호명할 뿐이었다.
“대감. 참으로 많이 배웠습니다. 하여,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해서, 소생은 너무나도 즐거웠습니다.”
“반계.”
“대감. 괜찮습니다.”
유형원은 고개를 바로 하며 나를 바라봤다.
붉어진 눈시울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돌렸다.
“소생은 변화를 도모할 뿐, 기근 방비에 최선을 다하는 중대본에 혼란을 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피하지 않겠습니다.”
“반계. 나는 그들에게 금권을 꺼내면 죽이겠다고 했네.”
어찌 감히 그들과 유형원을 동률에 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예정된 결말이었다.
나도 알았고.
유형원도 알았다.
알고 시작한 논쟁이었다.
아니, 대화였다.
“후회는 없습니다. 소생은 밀알을 뿌린 것으로 만족합니다.”
“하아…….”
유형원이 없는 중대본.
쉽사리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상상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토록 위험한 사고를 하는 사람을 그냥 둘 수는 없다.
언제라도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니 말이다.
쓰게 웃었다.
“말하겠는가.”
“소생이 감히 조선의 국체를 부정했습니다.”
금권 정치는 조선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천만한 체계다.
상단이 성장하여 자연스레 무언가를 도모하는 것과 유형원의 행동은 아예 다르다.
작게는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중대본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내가 먼저 파악하였기에 수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 금권 정치를 도모했다는 건 절대 용납받을 수 없다.
“소생은 감히 역모를 꾀하였습니다.”
그랬다.
유형원은 감히 역모를 꾀하였다.
역모가 아니었으나 역모였다.
“죽음으로 이 죄를 감내하겠습니다.”
기어이 내 눈시울도 붉어졌다.
힘겹게 말했다.
“반계.”
“예. 대감.”
“전하께 고하겠네.”
“감사합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소생이 경험한 처음이자 마지막 조선의 성군께 처우를 맡겨주셔서.”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제 남은 건 이연의 교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