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후대(後代) 그리고 양보(讓步)
내가 너무 못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무 한심했다.
이렇게 모자란 놈이 어디 있을까.
분명 징후는 있었다.
변승업과 김근행의 묘한 분위기를 애초 알았다.
상인으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들이 티를 낼 정도가 아니었던가.
그때 무언가를 파악했어야 했다.
감히 그들이 주체적으로 나섰을 리가 없건만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바라봤다.
조금만 더 생각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두 내 탓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원망했다.
조선의 최고 통치권자에게 사태의 심각함을 말하는 지금도 나를 원망했다.
“전하.”
“…….”
이연은 대꾸하지 않고 하늘만 바라봤다.
오늘따라 용포가 너무나도 고독하게 느껴졌다.
바람의 펄럭임에서조차 쓸쓸함이 담긴 것만 같았다.
“역모라…….”
용안(龍顏)은 번뇌가 가득했다.
“금권의 정치라고 하였소?”
“그러하옵니다.”
“…….”
이연은 다시 말문을 닫았다.
하지만, 나 역시 섣불리 말을 보태지 않았다.
지금 이연에게 필요한 건 나의 몇 마디 말이 아니라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바람의 이끌림에 용포가 외로운 펄럭임을 몇 번이나 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재력의 많고 적음이 위정자의 자격이 되는 세상이라…….”
이 시절 조선에서 금권 정치는 상상의 범주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하니 이연도 상당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더욱이 내가 이를 역모에 준하는 행위로 언급했다.
아무리 총명하고 정치에 능한 이연이라고 할지라도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웃을 일이건만, 그들은 꿈을 꾸었다……?”
“그러하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인데,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전하의 왕권이 이토록 강건하며, 조선의 국호가 이 땅에 아로새겨져 있사옵니다. 하여, 가당치도 않은 일이며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옵니다. 그러하니 이미 어심에 담아둘 일이 아니옵니다. 그런데도 고한 것은 역모에 준하는 일이기에 어명을 받잡고자 한 것이옵니다.”
“그렇소?”
“예. 전하.”
“한데, 본부장. 그들을 어찌 비웃을 수만 있소? 능히 가능한 일인데 말이외다.”
“전하……?”
대체 어떤 사고를 거쳐야 이 시절에 금권 정치의 가능성을 볼 수 있을까?
변승업과 김근행도 거상이지만 철학의 부재로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유형원이 이론을 제공하고 상황을 도출했기에 현실로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또한, 유형원도 애초 금권 정치를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대안 세력을 찾다 보니 상인이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하니 이연의 말은 아예 결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전하.”
“만일 정말 어불성설이며 허무맹랑한 일이라면 본부장이 이렇게까지 나설 일도 없지 않았겠소? 이미 정치적 행위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 않소이까.”
“말 그대로 정치적 행위에 불과하옵니다.”
이연이 금권 정치를 공론화한다면 그 싹이 조선 전역에 뿌려지게 된다.
하여, 나는 이를 망상의 범위로 밀어서 그들을 벌할 생각이었다.
광인들의 광기로 치부해버릴 것이다.
잔인하지만 이리하는 게 옳았다.
“음.”
이연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숨길 뿐이었다.
또한, 어심에 금권 정치가 뿌리조차 내리지 않길 바랐다.
“그 옛날 유학은 참으로 천시되었소.”
“전하……?”
“진골 귀족이 이 땅의 주인일 때 유학자의 꿈은 토사구팽이었소. 잠시 쓰일 수만 있어도 만족할 만큼, 학문의 경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이었소.”
“전하.”
“고려의 무신에게 유학자는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소.”
“…….”
“그때 그 시절에 그들이 상상이나 했겠소? 도구에 불과했던 유학자가 확고부동한 위정자로 자리 잡은 나라가 생길 것이라고 말이외다. 또한, 유학의 성취가 위정자의 자격이 될 것이라고 말이외다. 가장 확실한 사례가 바로 본부장이외다.”
옳다.
정녕 그러했다.
혈통과 칼이 중시되던 시절, 미천한 신분이 붓을 들고 떠드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도구였고, 심지어 소모품이었다.
하지만, 천년의 역사를 버티며 기어이 승리했다.
그 증거가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였다.
그 산 증인이 바로 나 송시열이었다.
“지금은 금권 정치라는 말이 황당무계하지요. 한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나라가 펼쳐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소?”
놀랍게도 이연은 이러한 역사에서 금권 정치의 가능성을 찾아낸 것이다.
더욱이 무려 유학의 역사를 통해서 말이다.
“듣자니 이미 싹이 트였거늘, 어찌 어림도 없다고 하오?”
“신이 모조리 거두었사옵니다. 혹시라도 떨어졌다면 찾을 것이며, 망령되게 뿌리를 내렸다면 기어이 뽑아내겠사옵니다.”
“다시 말해야겠소. 경도 가능성을 보았기에 이토록 냉정하게 나서고 있는 것이외다. 이를 역모로 규정할 정도로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소이까. 한데, 내가 어찌 가능성을 배제하며 태평하게 있을 수 있소?”
이미 어심에 금권 정치가 자리 잡았다.
그 네 글자가 정사에 기록될 상황이었다.
막아야 했으나 이연의 말이 빨랐다.
그러나
“하여, 경은 유형원을 벌하자는 것이오?”
이연은 죄를 논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다.
빠르게 결정하여 아무도 모르게 정리할 것이다.
“유형원만이 아니라 변승업과 김근행까지 벌하시어야만 하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의외가 아닐 수 없소.”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경은 여태껏 기근 방비에 도움이 된다면 그 무엇도 용납했소.”
“…….”
“한데, 보시오. 대관절 금권 정치가 어떠하기에 이토록 경계하는지 놀라울 정도요. 유형원과 상단주를 역모에 준하는 죄로 벌하고자 하니 말이외다.”
“…….”
뒤통수를 둔기로 맞은 것만 같았다.
그랬다.
나는 지금껏 티끌이라도 모아서 기근을 방비하고자 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 유형원과 변승업, 김근행이라는 중대본의 기둥을 뿌리 뽑고자 한다.
조선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조선이 아니라 백성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송시열이 아닌 나에게 조선은 백성을 지키는 도구가 아니었던가?
해서, 조선이라는 두 글자의 권위를 바로 세우고자 했었다.
한데, 내가 지금은 조선을 지키고자 기근 방비의 대들보를 치워버리고 있다.
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본부장.”
이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금 상념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
당장 저들을 벌해야 했다.
그런데
“역모가 아니외다.”
이연은 벌하지 않고자 한다.
“본부장. 역모가 아니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하. 넘기실 일이 아니옵니다.”
“역모는 거병하여 왕을 공격하는 것이오. 왕성을 바꾸는 행위요. 한데, 저들이 이리하였소?”
“전하. 국체를 부정하는 건 곧 역모이옵니다.”
나와 이연의 처지가 바뀌었나?
정녕 그러한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나는 이연의 말을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 국체를 부정하는 건 본부장이오.”
“전하. 신은 조선의…….”
내가 머뭇거리며 허우적거릴 때 이연의 말이 이어졌다.
“기근부터 막아야 하오.”
다시 이어졌다.
“백성이 다 죽는데 조선의 국호가 유지되면 뭐 하오?”
어딘가가 저릿했다.
“백성이 없는데 양반이 위정자면 무엇하오?”
어딘가가 따가웠다.
“전대미문의 기근으로 조선은 벼랑 끝에 섰소. 나라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소. 한데, 존재하지 않는 금권 정치를 꺼내어 저들을 역모로 벌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지금 내가 바라보는 건 금권 정치라는 단어가 아니라, 저들이 기근의 방비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외다.”
어딘가가 쓰렸다.
“해서, 지금 국체를 부정하는 건 본부장이라는 것이오. 이 나라 조선의 근본은 백성이니 말이외다.”
이는 진심이었다.
물론 백성을 위하여 옥새를 넘기거나 용상에서 내려온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말이 아니었다.
그들을 우선하여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금권 정치를 덮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본부장의 우려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요. 하여, 가장 적절한 조처를 할 것이오.”
“…….”
“변승업과 김근행이 가진 청국과 왜국의 독점 무역을 거두겠소.”
이를 적절한 방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차피 그들을 벌하면 독점 무역은 불가능한 것이니, 고려할 필요는 없소.”
상황이 이러했다.
“또한, 이리만 해도 개별 상단‘만’의 성장은 최대한 억제할 수 있으니 어찌 문제가 발생하겠소이까.”
이 또한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나의 속내를 읽었을까?
이연의 의미심장한 말이 이어졌다.
“본부장. 우려하지 마시오.”
“…….”
“신라의 6두품이 유학을 익혔소. 이들의 후예가 고려에서 유학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소. 그리고 조선을 열었소. 해서, 묻겠소.”
무엇을 묻고자 하는 것일까.
“작금의 상단은 어디에 위치하오? 이들은 신라에 있소? 아니면, 고려에 있소? 이조차 아니면 역성 직전이오?”
“…….”
“내가 말한 시간에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오?”
“그들은…….”
지금 그들은 어디까지 왔을까.
냉정하게 생각했다.
우습게도 답은 너무나도 쉬웠다.
“기껏 신라에 이르렀사옵니다.”
“신라의 귀족이 유학자가 위정자인 세상을 왜 걱정하오?”
“…….”
내 걱정이 기우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저 시기상조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는 안일한 자세가 아니었다.
“그러하니 기근부터 막아야지요.”
결국, 다시 원점이었다.
아니, 본질이었다.
작금의 난세는 모든 걸 덮어버리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내가 무언가를 도모하지 못할지라도 후대가 곤혹스러운 일은 없도록 할 것이오. 설령 내가 어떤 빌미를 제공하여 세상을 어지럽게 한 암군으로 평가될지라도, 후대는 모든 걸 제압할 토대를 마련할 것이외다. 하여, 두려움은 없소.”
금권 정치의 태동을 막지 못할지라도 기근의 대비를 기어이 해내겠다는 의지였다.
후대를 위하여 그들을 제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가 그들의 처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발판은 마련한다는 말이었다.
작금의 조선은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지금 이연을 이를 말하고 있었다.
내가 잊었다.
이연에게도 내일은 지독한 사치였다.
그 누구보다도 작금의 난세와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잊은 게 하나 더 있었다.
후대(後代).
바로 이연의 후대를 잊었다.
그의 아들은 절대적인 정통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원 역사에서 환국 정치로 피 바람을 일으킨 숙종, 이순이었다.
그래.
맞다.
이순이 이어갈 조선에서 금권은 절대로 살아 숨 쉴 수 없다.
당대 최고의 권세가들을 도륙했던 그의 조선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에게 이 시절 개념 바깥에 존재하는 역모를 걱정하는 건 사치다.
이토록 사치스러운 고민은 후대에게 양보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반계 유형원은 어찌 벌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신은 어명을 따를 것이옵니다.”
아직 오늘 내가 가진 치열한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내게는 약간이라도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