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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43화 (243/298)

243화 우리가 걷는 이 길은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니, 송시열이 된 나는 어떤 길을 걸어온 것일까.

생각에 잠겼다.

되돌아봐야 할 때였으니까.

시작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었다.

이리한 이유는 간단했다.

성리학이 아니고서는 사지가 멀쩡한 통치학이 없는 시절이다.

하지만, 주희의 말은 경신 대기근의 위력에 조선을 유지하는 게 한계였다.

해서, 세종의 길을 제시했다.

세종의 치국(治國)이라면 주자가 남긴 글자보다 더 효과적으로 경신 대기근과 싸울 수 있다고 여겼다.

결과, 자연스레 위대한 길을 걷게 됐다.

그 옛날, 지옥보다 끔찍했던 이 땅의 난세를 끝장낸 개국 공신을 배우고자 했다.

그들이 주창했던 민본이야말로 경신 대기근의 위협에 직면한 작금의 조선에 가장 적합하기에 그러했다.

이제 진실로 되돌아봐야 할 때가 됐다.

과연 우리의 길은 어떠했는지.

과연 우리의 개혁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우리의 길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무엇 하나 쉽게 이룬 게 없었다.

200년의 역사가 만든 기득권과 쟁투를 펼쳤다.

그들이 만든 요새, 붕당은 시작부터 제압했다.

당색에 숨어서 떠들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말하고자 한다면 ‘사람’이 나서야 했기에 감히 떠드는 이는 없었다.

나아갔다.

거대한 성벽을 방패 삼아 농성하는 무리와 싸우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이 전쟁은 이 땅에서 주희를 섬기기는 모든 이와 겨룬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과, 우리는 기어이 승리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저항하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성벽은 무너졌고, 성문은 열렸다.

어찌 패배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개혁은 실로 위대했다.

우리는 이미 사문난적이 아니어도 되었다.

우리는 이제 세종을 배우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가 더는 위대한 길을 걷지 않아도 되었다.

세종이 되고자 했고, 위대한 길을 걷겠노라 하였던 시간은 끝났다.

우리는 이미 세종을 앞질렀고, 위대한 길의 끝을 지났다.

지금 우리는 중대본이었으며, 걷는 길은 곧 조선의 길이었다.

그야말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개혁이었다.

이제 알았다.

내가 반계와 다른 길을 선택한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금권 정치를 제압하고자 한 이유도 깨달았다.

오직 하나의 이유였다.

우리가 걷는 조선의 길에 내가 자부심을 느끼기에 그러했다.

그렇다.

나는 이미 조선의 위정자였다.

이제 더 돌아볼 필요는 없다.

우리의 길이 옳고, 조선의 길이 맞다.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들렸다.

“하여, 소생은 반계의 길을 막을 겁니다.”

윤휴의 결론이었다.

“비록 그가 틀리지 않았으며 그저 소생과 다른 것일지라도 막을 겁니다.”

아니다.

이제 내가 윤휴에게 전해줄 시간이었다.

“틀렸네.”

“틀렸다고 하셨습니까?”

“비로소 알게 되었네. 반계는 틀렸네.”

“대관절 무슨 말씀입니까. 그의 길이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데, 어째서 틀렸다고 단언하시는 겁니까.”

“자네가 자네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제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꺾일지언정 기어이 버텨낼 것이다.

“백 보 양보하여 금권 정치가 태동하여 이 땅을 기어이 잠식할 수도 있을 것이네. 한데, 백호. 그 모든 자양분은 조선에서 비롯하는 것일세.”

유형원이 수립한 방책은 훌륭했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효과적인 기근 대책이었기에, 금권이 성장하는 걸 방치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하지만, 유형원은 알 수 없다.

조선에서 금권은 곧 혁명이며, 혁명은 절대 계책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혁명은 이 나라 조선의 모순이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때 이뤄지는 걸세.”

번잡하게 원 역사의 무수한 사례를 꺼낼 필요는 없다.

당장 이 나라 조선만 하더라도 혁명의 길을 밟았다.

고려의 모순이 폭발한 결과가 조선의 건국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반계의 길은 이러하지 않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개혁이 이뤄지고 있는 나라에서 혁명은 불가능한 것일세.”

조선이라고 하여 어찌 모순이 없겠는가.

중대본의 개혁을 단행할 때 충돌한 모순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내가 이를 모를 수는 없다.

그러나 작금의 조선은 혁명이 필요 없다.

“반계가 일렀네. 이 나라 조선은 최소한의 개혁으로 위정자, 아니, 양반의 기득권을 보호한다고 말일세. 한데, 이는 그야말로 자가당착일세. 중대본 수립 이후 우리가 행한 개혁은 절대 최소한이 아니었으니까.”

유형원은 지금 조선의 역사가 원 역사다.

하지만, 나에게 원 역사는 따로 있다.

그러니 유형원은 지금의 개혁이 기근을 방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개혁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개혁은 조선이 조선을 뜯어고치는 최대한의 개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사문난적이 공언되었고, 5현을 끌어내렸네.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청국과 전면 무역을 감행할 정도로 유연해졌네. 일국에서 수년 사이 집행되었던 개혁의 강도가 이토록 강렬했던 역사가 동서고금에 있었던가. 없었노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네.”

우리는 종기의 뿌리까지 뽑아내고 있다.

한데, 어찌 혁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어찌 내일을 함부로 예단할 수 있겠는가. 조선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금권 정치는 여전히 역사를 이어갈 수도 있네. 하여, 금권 정치가 기어이 빛을 볼 수도 있을 것이네. 그러나 그건 반계의 방식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일세.”

“대감의 생각이 궁금하군요. 어찌 다를 것입니까.”

“금권 정치는 조선이 점진적으로 상업을 육성하여 상단의 발전이 이뤄질 때 태동하는 것일세. 그 옛날 사대부가 고려를 책임질 때 조선이 수립되었듯, 상단이 조선을 책임질 역량이 될 때 변화가 시작되는 것일세. 변승업과 김근행의 상단이 조선이 잠식하는 건 금권 정치가 아니라,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유형의 권신이 등장하는 것에 불과하네.”

모든 걸 털어내니 냉정하게 모든 상황이 보였다.

작금의 조선은 금권 정치가 수립될 토양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상업의 발전을 도모하는 방침을 수립, 집행하고 있다.

단적으로 청과 일본, 양국과의 전면 무역이 그러했다.

언제고 폭발적인 대항해 시대가 개막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금권 정치의 밀알을 뿌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이라는 나라의 역량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소수, 아니, 단 두 개의 상단이 조선을 끌고 가는 형식은 아니었다.

이는 언급한 것처럼 전무후무한 권신의 탄생으로 귀결될 뿐이었다.

그건 금권 정치가 아니다.

그저 세상이 혼탁해지는 것에 불과하다.

이를 지금에서야 알았다.

우리의 뜨거운 열정은 단지 경신 대기근만을 방비하는 게 아니었다.

조선의 변화와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이미 조선은 환골탈태를 시작했는데 말이다.

이러한데 반계의 금권 정치가 어찌 감히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는가.

하여, 나는 자신감을 가지며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공포하였네. 반계의 방침은 모두 수렴하여 집행할 것이야. 설령 그 길의 끝에 금권 정치의 태동이 존재할지라도 전혀 상관하지 않을 것이네.”

“허. 어째서 그러합니까?”

“자신 있네.”

진심이었다.

모처럼 빙그레 웃었다.

“훗날 그때가 될지라도, 이 나라 조선은 금권 정치조차 품어낼 것이라고 자신한다네.”

피로 점철된 숙청의 역사로 제압하는 게 아닐 것이다.

조선이라는 두 글자가 모두 포용해낼 것이라고 여겼다.

진실로 이처럼 생각했다.

“대감.”

“이르게.”

“대감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겠습니다.”

윤휴의 표정도 개운해 보였다.

다만, 벗을 걱정하는 마음까지는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해서, 말했다.

“자네가 잘 달래주게.”

“그리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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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의 표정은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진심으로 벗을 걱정하는 마음이 눈동자에 담겼다.

“금권 정치가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권신이 탄생하는 길이라.”

“그렇다네.”

“딱히 반박할 논거가 떠오르지 않는군.”

“반계. 정녕 괜찮으신가?”

누구보다도 유형원을 잘 알았다.

그는 좌절을 가장 두려워했다.

속에 품었던 꿈이 완벽하게 잘렸고, 후학은커녕 저서도 남길 수 없게 됐다.

어찌 마음이 쓰이지 않겠는가.

유형원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심지어 복잡하게 얽혀지던 눈동자는 점차 맑아졌다.

“백호.”

참으로 개운한 목소리였다.

윤휴가 의아하여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로 그러했다.

“사지가 멀쩡한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반계…….”

“나는 정말로 괜찮다네.”

“…….”

“하하하. 정말일세.”

호탕하게 웃는 모습은 참으로 의연했다.

하지만 오히려 윤휴의 마음은 미어졌다.

지금 유형원이 보이는 모습은 좌절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걸 알기에 그러했다.

“허. 이 사람. 내가 어찌해야만 믿어주겠는가.”

“차라리 원통하다고 말하게.”

“어찌 그리할 수가 있겠는가.”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내가 자네에게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걸세.”

“허. 참으로 서운한 말을 하는군.”

“자네가 양반 중심의 질서를 더 강화하길 바란다는 걸 알고 있으니 하는 말일세.”

대화가 이어지면서 어느새 유형원의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겼다.

조금 전까지 의연하고 호탕하던 모습은 잠시나마 자취를 잃었다.

“적어도 이 순간, 이 사안에서는 우리는 동지가 아닐세. 첨예하게 대립해야 할 상대란 말이네. 한데, 내가 어찌 자네에게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그건 참으로 몹쓸 행동이지.”

“우리는 동지일세.”

“그렇지. 동지이며 벗일세. 한데…….”

유형원의 말을 막듯 윤휴의 손이 내저어졌다.

투박하고 거칠었다.

“눈길의 방향이 다를 수는 있네. 하지만 적어도 아직은 함께 걷고 있거늘, 어찌 동지가 아니라고 하는가. 자네의 눈 끝에 금권 정치가 있고, 양반을 해체하는 세상이 있다고 한들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곳에 이르기 전까지 자네는 벗일세.”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데 어찌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는가.”

“같은 성질의 개혁을 도모하기 때문일세. 양반 중심의 질서를 강화하고자 한 나의 방책과 금권 정치를 꿈꾼 자네의 방책이 대체 무엇이 다른가. 나는 이것이 너무나도 의아하네.”

어느새 윤휴의 목소리는 격정적으로 변하였다.

뜨거운 열기까지 품은 그의 말은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같은 개혁을 도모하고 있네. 다만 그 끝이 다를 뿐이야. 자네는 이 길의 끝에 금권 정치가 있다고 믿고 있지 않은가. 한데, 나는 양반이 제대로 각성하는 조선이 보인다네.”

“…….”

“이 끝에 어떤 조선이 있을지 감히 장담할 수 있는가? 자네도 나도 그건 예단할 수 없네.”

“…….”

“나는 확신한다네. 또한, 자신이 있어. 작금의 개혁은 조선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더 좋고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일세.”

윤휴는 여전히 이글거리는 눈으로 유형원을 바라봤다.

묘한 건 그의 눈동자에는 신뢰가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겨뤄보지.”

“백호…….”

“내 말이 옳을지, 자네가 옳을지.”

“…….”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함께 보자는 말일세.”

오직 진심만 담긴 윤휴의 말이었다.

끝내 유형원은 엷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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