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자본주의 맹아(萌芽)(1)
맑고 밝은 허적의 얼굴을 보았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재해의 탓인지 피부는 푸석하고 얼굴빛은 노랗고 눈가는 퀭했다.
내가 대국적인 일을 진행하지만, 세세한 실무를 담당하는 그의 고통을 어찌 모르겠는가.
다른 이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전반적으로 허적에게는 괜한 말을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전면 무역이외다. 하면, 국경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하되 관세만 제대로 거두면 되는 게 아니겠소?”
애초 변승업의 상단이 독점한 대청 무역이었다.
하지만 최근 철회가 되었기에, 이를 어찌할지 논의해야 했다.
“호판. 어째서 말이 없소?”
그런데 말을 끝맺을 때 허적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는 걸 봤다.
이는 필시 내 말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다고 여긴 게 확실했다.
그런데 나는 무조건 진심이었기에 오히려 세모눈을 하며 쳐다봤다.
“다시 말하지만…… 아니외다. 나는 우선 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알아야겠소.”
“어명인데 내가 어찌 알겠소?”
“지금 나와 농을 하자는 것이오?”
허적은 눈을 부라리며 나를 쳐다봤다.
당연하겠지만 나는 시선을 피했다.
심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간 일관되게 추진한 일이었소. 한데, 하루아침에 방침이 철회되었는데 사정도 몰라야 하오?”
말해주고 싶지만 말할 수가 없다.
중대본에서 금권 정치가 논의된다는 건 명백하게 공론화를 의미한다.
사태가 어디까지 번지게 될지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물론 허적이라면 알아야 할 위치이긴 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바쁘다.
일부터 해야 한다.
어물쩍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딱 그때였다.
“한데, 차라리 잘된 일이긴 하오.”
윤선도가 나섰다.
놀랍게도 내 편이었다.
이 부분은 감격해도 된다.
“사실 변승업과 김근행의 힘이 비대해지긴 했소. 만일 대청 무역까지 독점한다면 탈이 날 수도 있을 것이오. 이참에 분산하는 게 옳소.”
“내 말도 선생과 같소. 그러니 상단이라면 자유롭게 국경을 넘을 수 있게 하는 게 옳소.”
“한데, 나도 기본적으로 호판과 의견이 같소. 상단을 중대본에서 관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오.”
“선생과 나의 의기투합은 찰나에 불과하군요.”
결국, 허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차후 이를 정확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오.”
“그리하리다.”
“어쨌거나 무역 상단을 따로 선정하지 않으면 필시 탈이 날 것이오. 그러니 상단은 선정해야 하오. 아무리 전면 개방하여 무역한다고 할지라도 마음대로 국경을 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외다.”
“아니, 대체 무슨 탈이 난다는 말이오? 그리고 애초 전면 무역을 도모한 건 양국의 국경을 치우는 게 목적이었소. 한데, 이리하면 전과 무엇이 다르겠소이까.”
“대체 언제 상단이 자유롭게 국경을 오갔소? 애초 변승업의 상단에만 독점권을 주었소. 한데, 이제는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게 하자니요? 아니 될 말이외다. 조정에서 상단을 확실하게 통제하는 게 옳소.”
다시 초안을 거론하면서 단호하게 내 의견을 반대했다.
상당히 민망해져 버렸다.
그러나 나는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조정의 허가를 받으면 중소 상단이 참여하게 어려워질 것이외다. 나는 이를 우려하는 것이오.”
“……대체 초안은 왜 변승업 상단의 독점으로 진행한 것이오?”
허적은 비겁하게도 초안을 계속 언급했다.
속 사정을 말하지 않은 걸 이렇게 풀어내는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계속 이러면 사람이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초안을 독점으로 한 건 딱 한 가지 이유였다.
대청 무역의 이익을 중대본이 모조리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그건 불가능해졌다.
이때 내 판단은 아예 문을 열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러면 전체 상단이 완전 경쟁에 돌입한다.
그러니까 글자 그대로 자유경쟁이었다.
그중에서 몰락하는 군소 상단은 등장할 것이다.
한데, 이런 걸 내가 고려해줄 필요는 없다.
어쨌거나 생각대로 일이 잘 안 풀렸다.
답답함에 시선을 돌렸는데 윤휴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참으로 괴상했다.
움찔하여 조금 더 옆으로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유형원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아주 희한했다.
나는 두 사람이 나를 왜 저렇게 쳐다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나는 상단의 발전을 독려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금권 정치 불가론을 외치던 사람이 이러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나는 정말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반계가 내었던 대동법 말이외다. 이는 기근이 발생한 군현에서 재정을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소.”
“해서요?”
“그러자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소.”
“본부장이 반계의 안건에서 허점을 찾았다는 것이오?”
“허.”
“믿을 수 없소.”
“…….”
이 사람은 화법이 왜 이럴까?
일이 힘들어서 그런지 정말 까칠했다.
“조정으로 와야 할 재원이 군현에서 사용되는데, 언제 어떤 곳에서 얼마나 집행될지 가늠할 수가 없소. 또한, 군현에서도 언제 얼마나 사용할지 모르지 않소이까.”
한마디로 유형원의 원안은 변수에 취약하고 철저한 기근 대비가 힘들었다.
나는 너무 당연한 말을 한 것인데, 이를 언급한 사람은 없었다.
예측하지 못하거나 일부러 무시한 건 아니다.
원래 정책은 큰 틀을 정하고 실무적으로 세세한 내용은 끝없이 수정되는 것이다.
즉, 나는 대동미의 군현 사용을 확실하게 집행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꺼낸 것이다.
“대관절 상단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도록 장려하는 것이 군현의 재정과 무슨 상관이 있소?”
“그리하면 군현에서 상업이 육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맙게도 유형원이 말을 꺼냈다.
시선은 그에게 쏠렸다.
“모든 상단은 봇짐 하나만 들고서라도 국경을 넘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태하는 상단도 있겠으나, 큰 부를 축적하는 상단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질 겁니다. 결국, 그들의 거점에서는 장시가 활발하게 열리게 될 건 명약관화입니다.”
“선뜻 이해가 가지는 않는군. 장시가 열리는 것과 조정과 군현의 재원 문제를 해결하는 건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건가?”
“아주 간단하오.”
이번에는 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리고 딱 잘라서 한마디로 정리했다.
“비상시 그들의 재원을 사용할 수 있소.”
“……본부장 대감의 말씀대로입니다. 이 시기에 장시가 열린다는 건 일정 규모 이상의 상단이 등장했다는 걸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소. 일단 사용한 뒤 차후 대동미로 갚으면 될 일이오.”
허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장고에 돌입했다.
아무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이럴 때는 휴회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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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육조거리로 나와서 머리를 시켰다.
그러면서 물끄러미 시선을 움직이며 육조거리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한때 쉬지 않고 연좌가 이뤄지던 육조거리를 떠올리면 지금은 한산할 정도였다.
그러나 여전히 바쁘게 오가는 관리들이 보였다.
미우나 고우나 저들이 조선의 현실이었기에 ‘더’ 부지런하길 바랄 뿐이었다.
“대감.”
고개를 돌렸더니 유형원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빤히 쳐다봤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자연스레 육조거리를 바라보며 운을 던졌다.
나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해하지 말게.”
“오해라고 하셨습니까?”
“음. 하긴 아니겠군. 자네가 이런 일로 오해하지는 않겠지.”
“그저 대감의 의도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런. 오해한 게 맞나 보군. 하면 잘 듣게. 독점 무역의 폐지로 조선의 재계를 좌지우지할 거상의 출현은 불가능해졌네. 아니, 그런 경우를 아예 차단하고자 이 방책을 꺼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네.”
완벽한 자유 무역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절 자유 무역은 일정한 파이를 무한대의 상단이 나눠야 하는 구조다.
그러니 조선 조정을 흔들 수 있는 거상은 절대로 등장할 수 없었다.
내 말을 이해했을 유형원이건만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대감께서는 소생의 금권 정치가 틀렸다고 하셨습니다. 한데, 오늘 거론된 방책은 대감이 말씀하신 ‘진짜’ 금권 정치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결국 금권 정치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이런. 이것도 오해하셨나? 그러면 냉큼 넣으시게. 나는 이 방책이 그저 조정의 기근 방비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을 뿐이니까. 먼 훗날 어찌 될지 모르는 금권 정치가 아니라, 오늘의 기근 극복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니 말이니까.”
유형원은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눈동자는 여전히 의구심이 담겨 있었다.
“물론입니다. 어찌 소생이 오해하겠습니까.”
“할 말은 따로 있나 보군.”
“대감께서는 군현의 대동미를 조정으로 올릴 생각이 없습니다. 맞습니까?”
“허. 왜 그렇게 생각하나?”
“기근이 발생하는 군현에서는 대동미를 자율적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한데, 작금의 조선에서 기근으로부터 자유로운 군현이 몇 곳이나 되겠습니까.”
“해서?”
“결국 문제는 국고의 어려움이 아니겠습니까. 즉, 오늘의 방책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소생이 맞습니까?”
“음. 한데, 국고는 관세로 해결할 수 있지 않겠나?”
“결국 쌀로 징수할 예정입니다. 조정으로 운송되기도 전에 서북 지역의 구휼미로 사용될 것이니 국고로 얼마나 채울 수 있겠습니까. 또한, 확보할 수 있는 재원도 좋지만, 언제라도 꺼낼 수 있는 곳간이 있으면 더 좋은 겁니다. 어떻습니까.”
“자네는 속일 수가 없군.”
다른 사람은 내 의도까지 파악하지 못했다.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범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형원은 이미 이 시절 보편적인 조선인의 사고와는 결을 달리하는 인물이었기에 내 의도를 훤히 볼 수밖에 없었다.
“소생이 의아한 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또 무엇인가.”
“대감의 의도대로라면 조정이 상단을 더 철저하게 통제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이리할 때 명단에 적힌 상단만 압박해도 넉넉할 겁니다.”
“아.”
유형원이 정확한 부분을 지목했다.
나는 방긋 웃었다.
“하면, 관리와 상단의 유착관계가 발생할 수도 있지 않겠나? 나는 그것도 아까워서 그렇다네. 조정이 다 취해야 할 몫이니 말일세.”
“뇌물을 낼 사정이 되면 기반을 쌓으라는 거군요. 가령, 장시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허. 역시 자네는 너무나도 탁월하군.”
유형원은 이 시절에 나와 시장 경제에 대해서 제대로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장시에서 구휼미를 확보할 수 있을 수준으로 만들어야지. 나는 꼭 이를 도모할 것이네.”
말 그대로 여기저기서 쌀을 필두로 한 식량을 구할 수 있게 만들어보겠다는 말이었다.
유형원은 헛웃음을 지었다.
“단기간에 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 하는 것이 아닌가. 또, 바쁜데 어찌 백년대계만 보며 달리겠는가. 하루라도 앞당겨야지.”
“무슨 생각이십니까.”
“모든 규제를 풀 것이네.”
“예……?”
“관세나 조세만 잘 내면 상단이 하는 모든 규제를 풀 것이네. 상업만이 아니라 광업이든 뭐든.”
“규제라고 하셨습니다. 하면 혹시……?”
“사사롭게 백성을 동원해도 될 것이며, 신분을 앞세울 수도 없게 할 것이네.”
“허.”
“어떤가. 반계. 자네를 던져볼 매력을 느끼지 않는가?”
“나쁘지 않군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때마침 파발이 보였다.
평소라면 불안했겠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장계를 들고 오는 이의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나?”
“그렇습니다.”
“허 국장이나 박세당 중 어느 곳은 일이 잘 풀린 게 분명하군.”
“참으로 좋은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