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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45화 (245/298)

245화 자본주의 맹아(萌芽)(2)

새로 들어온 장계에는 대략 삼남 지역의 역병을 점차 제압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장 역병만 해결해도 살릴 수 있는 백성의 수가 엄청났다.

이는 방어에 급급하던 우리 중대본으로서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모두 표정이 환해졌다.

“사찰이 큰 공을 세웠다고 하오.”

“서얼도 관청의 일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오.”

이번에도 일등 공신은 승려와 서얼이었다.

그렇다고 사족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곧장 올라온 박세당의 장계를 살펴보면 사족의 역할이 참으로 대단했소.”

박세당을 수장으로 한 원리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는 평안도 지역의 사족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줬다.

“구휼미를 내리고 사가를 열어 백성을 구제했으니 어찌 참된 사대부의 모습이 아니겠소.”

“하하하. 과연 그렇소. 평안도 사족이 우리 사대부의 체면을 살려주니 참으로 기특하오.”

조금 전과는 확실하게 온도 차이가 나긴 했다.

아무래도 이들 역시 양반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했다.

썩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으나 이해할 수도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났을 때 완화되길 바랄 뿐이었다.

그때였다.

“그러나 기호 지역의 사족의 활약과 비교하면 부족한 면이 있소. 본부장이 직접 순회한 결과가 확실하게 도출된 듯하오.”

내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특히, 무속인까지 동원하여 백성의 위생을 챙겼다고 하니 어찌 놀랍지 않겠소이까.”

“하하하. 기호 지역의 사족들이 참으로 훌륭하지 않소?”

나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너무 크게 웃었다.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당색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보이니 감회가 새롭소?”

“오랜만에 당색을 나눠서 겨뤄보자는 것이오?”

“피가 뜨거워지고 심장이 뛰고 있소?”

허적과 윤선도가 번갈아 가면서 나를 타박했다.

그제야 내가 실언했다는 걸 깨닫고 변명했다.

“남인의 영향력이 큰 지역은 아직도 서원에서 5현을 섬긴다고 들었소. 그 정성이면 얼마나 많은 백성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나 보오.”

내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속을 긁어대자 윤선도가 따졌다.

“지금 뭐하오?”

“분발하라는 말이오.”

“허.”

“영 성과가 없어서 한 말이오. 기분 상하셨다면 더 분발하시오.”

“참으로 무도하도다.”

“오랜만에 들으니 정겹소. 한데, 나는 졸렬하니 너무 잦으면 탈이 날지도 모르오.”

“……언젠가는 사화와 숙청으로 갚아주겠소.”

“하하하. 거는 기대가 참으로 큽니다. 그러나 그 전에 사직할 것이외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들과 내게 사화와 숙청이라는 끔찍한 단어도 소소한 웃음이 재료가 되었다.

물론, 과거의 참혹한 시간을 가볍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이런 식의 농을 할 정도의 관계가 되었다는 걸 의미할 뿐이었다.

“한데, 박세당의 장계를 보면 백광현이 나타났다고 하오.”

“호판. 지금 백광현이라고 하셨소?”

백광현이 나타났다.

그는 정말 내게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두문불출이 무엇인지 보여주듯 의술에만 심취했다.

그런데 이번에 등장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해부학을 집대성했다는 것이다.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잔뜩 고였다.

잠시 생각했다.

그를 이대로 두어도 알아서 병자를 살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떠돌이 의원은 한계가 있다.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백광현을 조정으로 부르지요.”

“어려운 일은 아니외다. 실력이 있으니 위생국에서 큰 활약을 할 것이오.”

사실 이번 재해를 경험하면서 확실하게 느낀 게 있었다.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절 사람이 가장 ‘손쉽게’ 재해와 싸울 태세를 갖추는 건 놀랍게도 의술과 위생이었다.

가뭄을 상대로 비가 오게 할 수 없고, 폭우가 내리는데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병은 어떻게든 싸워볼 수 있다.

즉, 그간 우리가 꾸준하게 역량을 키워온 위생국, 서원의 의료기구화 등의 방침이 점차 힘을 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추진한 백광현의 해부학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하니 평시라면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역병이 가장 손쉬운 상대가 된 현실이 놀랍지도 않았다.

생각을 정리할 때 허적이 말했다.

“하면, 다시 대책을 논의하도록 하지요.”

애석하게도 봄날은 짧았다.

“상단의 일은 본부장의 안건대로 집행하지요.”

서두에서 곧장 논쟁이 있었던 부분을 정리했다.

고민이 많아 보였으나 결국 동의한 듯하다.

나는 그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함을 표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다시 방비에 집중해야 하오.”

허적은 정확한 핵심을 언급했다.

이번 추위와 폭우는 광범위한 범위를 포괄했다.

그렇다면 개별 군현의 재해 극복에 전념해온 중대본도 새로운 방침을 준비해야 한다.

허적이 하삼도로 내려간 이유가 위생국에 대한 고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호판의 말이 옳소. 지금부터 우리는 무조건 쌀을 비축한다는 식으로 방침을 정할 수 없소. 이제는 더 구체적이고 포괄적이며 공세적으로 기근을 대비해야 하오.”

“그렇소. 특히, 평양부에서 훈련도감이 석탄을 사용하였소. 결과, 백성이 추위에서 벗어났소.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오.”

“그렇소. 결국, 사람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는 재앙이 있다는 걸 의미하오. 해서, 중대본에서 확실하게 추진해야 할 사안을 하나 제안하고자 하오.”

의술, 위생과 마찬가지로 방한 대책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두만강 이북의 모피를 확보해야 하오. 이제 이를 중대본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됐소.”

이미 조선의 최고 통치권자로부터 전폭적인 지원까지 약속받은 사안이었다.

“무조건 성사해야 하오.”

국책사업이다.

최대한 많은 모피를 확보하여 양말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때 유형원은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동북면과 관련한 정보가 있습니다.”

“아니, 자네가 그걸 어찌 파악하셨나?”

“변승업과 김근행이 진출을 꾀하기에 소생이 적당히 거들었습니다. 하여, 그들이 파악한 정보도 알게 된 것이고요.”

이런.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정보다.

정말 유형원과 손발이 잘 맞았구나.

물론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서둘러서 말했다.

“어떠하던가?”

“정세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청국의 영토인데 분란이라도 있다는 건가?”

“세세한 내용까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청국과 아라사의 분쟁이 여전하다고 합니다.”

분쟁이라고 쓰고 전쟁이라고 읽었다.

사실 우리는 효종 시절 청국의 나선 정벌에 병력을 파견한 사례가 있었다.

이를 상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유형원이 구체적인 언급을 자제하였으나 말투와 표정에서 사안의 심각함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중대본은 찬 바람이 불었다.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유에 모피가 분명히 포함될 겁니다. 이때 우리가 모피를 구하고자 섣불리 국경을 넘으면 청국이 어찌 나올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예외적으로 유형원이 신중론을 꺼냈다.

나는 눈을 껌뻑이며 그를 쳐다봤다.

“자네가 몸을 사릴 줄은 몰랐군.”

“상황이 그렇다는 겁니다. 상단을 보내지 말자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런. 내가 자네를 오해했군.”

윤선도가 볼을 긁적이며 나를 쳐다봤다.

“본부장. 전하께서 이 일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명하셨다는 걸 알고 있소. 한데, 모피를 확보하려다가 청국과 마찰이 생기는 건 곤란하오.”

“해서, 선생께서는 포기하자는 의견이시오?”

“내가 언제 그랬소? 방책을 세우자고 하였소.”

“방책이라고 하셨소?”

“전하께서 어명을 내리셨을 때 우리는 두만강 이북의 정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소. 그러하니 무역을 진행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방어 태세를 갖추기로 한 것이 아니오?”

“그렇소.”

“하지만 상황은 이미 달라졌소. 그렇다면 방책도 변해야지요.”

“공세를 의미하시오?”

“물론이오. 두만강 이남에 청 태조의 사당을 건립한 뒤 상단을 북상시키면 되오.”

농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윤선도의 표정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우리는 정사 뇌호와 무역을 논의할 때 국경의 범위를 정하지 않았소. 만일 청 황제가 원안을 허락했다면 두만강을 넘어도 무방하오. 그러나 북방의 정세가 심각하다고 하니,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을 차단하고자 사당을 건립하는 것이오.”

“…….”

“인근에 있을 서원 하나를 밀어서 세우면 간단하오.”

나만 침묵했다.

“이대로 있으면 백성들이 얼어 죽소. 우리는 이를 방기할 권한이 없소. 설마하니 우리 상단이 두만강을 넘었다고 청 황제가 대군을 출병하겠소? 청국 태조의 사당까지 건립했는데 말이오.”

“그건 아니오만…….”

“전하께서 윤허하신 일이오.”

윤선도가 나를 질책하더니 갑자기 설득까지 한다.

이래서야 마치 내가 반대하는 것만 같았다.

“음. 반계. 청국과 아라사의 주된 교전 지역이 어딘가?”

“흑룡강 유역으로 파악됩니다.”

“흑룡강이라.”

“예. 흑룡강은 곡식이 생산되고, 모피를 얻을 수 있는 짐승이 많습니다. 그 외 여러 물산이 풍부합니다. 분쟁이 첨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의 세력이나 사정도 파악하고 있나?”

“송구합니다. 해당 지역으로 우리 사람이 진출한 건 아닙니다. 두만강 이북에서 전해진 소식을 중심으로 파악한 것이기에 세세한 정보까지는 없습니다.”

“음. 하면, 그곳을 피하면 적어도 군사적 위험에 노출되지는 않겠군.”

“그럴 겁니다.”

“그러면 넘어야지.”

놀라운 대화를 들으며 눈을 껌뻑였다.

허적과 시선이 마주쳤다.

급기야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청국 사신이 트집을 잡으려고 압록강을 넘는 순간, 도성 일대의 모든 서원에 청 태조의 위패를 올리면 아무런 문제가 없소.”

“…….”

“청국의 겁박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일단 백성부터 살려야지요. 안 그렇소?”

“…….”

“아.”

송준길이 오랜만에 등판했다.

“혹시 모를 일이외다. 압록강 이남 국경부터 도성까지 이어지는 길에 작게라도 청 태조의 사당을 건립‘할’ 준비까지 하면 더 좋을 듯하오.”

“대사헌. 준비라고 하셨소?”

“어렵지 않소. 위패만 어디 구석에 챙겨뒀다가, 청국 사신단의 소식이 전해지면 일제히 꺼내면 될 일이오. 서원은 곳곳에 있으니 말이외다.”

“그거 좋은 방법이오.”

나는 그냥 듣기만 했다.

이게 옳았다.

“소생에게 묘안이 있습니다.”

윤휴가 등판했다.

“이번 사안은 철저하게 공무역으로 진행될 겁니다. 하면, 이에 걸맞게 준비해야지요. 일찍이 선왕 시절 우리는 청국의 요청으로 병력을 파병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상단에 훈련도감의 정예를 포함한다면 미연의 사태도 적절하게 대비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절대 그냥 듣고만 있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백호. 그건 심각한 외교 갈등을 초래할 수도 있네. 국경을 개방했다고 하여 어찌 무장한 병력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겠는가.”

“본부장.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오.”

“호판.”

황당해서 쳐다봤다.

그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윤선도도 동의했다.

“우암. 이는 자네가 생각을 달리하게.”

송준길도 이랬다.

“우암 대감께서 양보하시지요.”

유형원도 보탰다.

나만 반대하는 꼴이었다.

눈만 껌뻑였다.

“전하께는 내가 고하겠네.”

송준길이 쐐기를 박았다.

대체 중대본이 언제 이렇게 호전적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표정 풀게. 훈련 대장을 보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나?”

“음. 대사헌. 그것도 고려해보는 게 좋지 않겠소?”

“훈련 대장이 직접 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긴 하지요.”

아주 미쳤다.

그냥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연이 반대하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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