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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47화 (247/298)

247화 대륙을 향하여(1)

사실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뇌호를 잘 정리했다고 할지라도 역시 최종 결정권자는 황제였다.

그가 싫다고 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우리 황상 폐하께서는 참으로 통이 크셨다.

시원하게 원안을 윤허하시지 않았는가.

나는 너무나도 감격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미촌. 참으로 고생하셨네.”

“되었네. 어차피 될 일이었어. 나는 그저 확인을 빨리 받았을 뿐이네.”

손목 걸고 장담하는데 절대 호락호락했을 리가 없다.

작금의 청나라 황제는 중국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군, 천고일제로 불리는 바로 그 강희제였다.

이름만 들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데 얼마나 깐깐하게 굴었겠는가.

안 봐도 확실했다.

윤선거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이런 쾌거를 이뤄 낸 것이다.

다만, 강희제가 어떤 부분에 가장 주력했을지가 궁금했다.

떠오르는 게 있기는 했으나 현장을 직접 다녀온 사람이 바로 앞에 있으니 물어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양국의 국경을 허무는 것에 관심이 많더군.”

과연 대륙의 황제답게 양국의 경제 단일화에 집중했다.

강희제라면 과거 원나라와 고려의 경제가 사실상 통합되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런 제약 없이 엄청난 수량의 물품이 오갔고, 쌀이 통과했다.

또한, 원나라의 화폐였던 원보초가 국제 화폐로 통용되었고, 이는 고려에서도 부의 상징으로 직결됐다.

이후, 원이 무너지면서 고려의 경제가 처참하게 몰락했을 정도로 양국의 시장은 밀접했다.

당연하게도 대륙과 반도는 시장 규모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자유 무역이 시작되는 것이니, 무조건 청에 유리하게 귀결된다고 보았을 것이다.

가장 걸림돌은 어류세였으나 이 역시 한시적인 보류에 불과했기에 큰 제약도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의 성과가 곧 청의 성과로 귀결된다는 걸 알고 있겠지.”

윤선거의 말대로 강희제가 모든 조건이 청국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였기에, 최종 승인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관세는 은화로 하기로 했네.”

나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현물로 관세를 주고받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청국처럼 상품화폐 경제가 발전한 나라면 더 그랬다.

다소 번거롭겠지만 우리 상단도 좋아할 일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마지막 남은 장애물은 넘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도모해야 할 때가 됐다.

모처럼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허적을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시작하지요.”

드디어 시작이었다.

허적의 손이 유려하게 움직이며 문서를 내밀었다.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일제히 내용을 살폈다.

동시에 첨부하듯 허적의 말이 이어졌다.

“모두 알겠지만 대청 무역과 대일무역을 좌우하는 건 바로 은화요. 우리가 청국에서 쌀을 대거 확보하려면 은화가 필요하오.”

이 시절 달러를 말하라고 한다면 무조건 ‘은’이었다.

점차 은화가 없다면 땔감, 채소 따위 등 사소한 물건까지 교역하기 어려워졌다.

“현재 우리가 은을 구할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소.”

허적이 문서 한 장을 넘겼다.

우리도 뒤따르듯 한 장 넘겼다.

“대일 전면 무역이 시작된 이후 매년 20~30만 냥의 은이 유입되고 있소. 그간 동의 확보에 치중한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최소치라고 볼 수 있소.”

일본에는 은이 많았다.

“우리 광산에서 확보하는 은의 양도 상당하오.”

“허. 수치가 상당하구려.”

“그렇소. 채광을 상단에게 맡기는 조치로 68개 읍에서 은점(銀店)이 설치됐소. 또한, 단천 은광에서 매년 1,000냥을 수세 할 수 있소. 그 외에도…….”

조선의 화폐 주조권은 동광의 확보에 달려 있다.

이는 김근행이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했기에 군소 상단은 대부분 은광으로 달려갔다.

어차피 기초 통화인 동이 활발하게 거래되면 은이 고가 화폐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장기적 안목의 결과였다.

이러하다 보니 우리는 대청 무역을 포문을 여는 게 수월했다.

그때 유형원이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가 동전을 주조하고 보급하지만, 은이 고액으로 유통되기도 합니다.”

은화와 동화의 수량을 잘못 계산하면 심각한 물가 인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가뜩이나 기근으로 모든 게 불안한 내수인데 물가까지 폭등하는 건 너무나도 끔찍했다.

“현재 우리는 대명률의 규정에 따라서 동 1근을 동전 150문과 교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은 1냥은 400문, 미가는 시세에 따라 전 4문에 1승으로 정했습니다.”

현재 동전 1문의 무게는 약 1.34전이었다.

7근의 동으로 1관(10냥)의 동전을 주조하는 상황이었으니 동 1근에 143문의 동전을 주조한 것이었다.

최근 중대본은 대규모로 동전을 주조하고 있는데 제대로 중심을 잡지 않으면 은화와의 교환 가격이 크게 요동칠 건 불 보듯 뻔했다.

유형원은 이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소생이 볼 때 이러한 내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은화를 외부로 반출(搬出)하면 상당한 혼란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장기적으로 은 1냥은 전 2냥으로 규정해야 합니다. 해서, 은을 적당하게는 확보하고 있어야 합니다.”

동화의 가치와 은화의 수량은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또한, 청과 왜국 사이라는 특징으로 조선의 은화는 결국 이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 내부로 은을 유입하고 확보하기보다는 유출이 더 크게 작용할 것이니 말입니다. 이를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국고와 민간에서도 적정 수준의 은화는 늘 확보해야 합니다.”

허적은 진심으로 동의했는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30만 냥은 확보하고 있어야만 변수에 대처할 수 있네. 특히, 이 난세가 끝나기 전까지는 청국 상단의 공세를 조정에서도 힘써 막아야 할 것이니 말일세.”

“청국과 직접 맞닿아 있는 평안도의 여러 창고에서도 은을 비축해야 할 겁니다.”

“물론일세. 평안도에도 30만 냥은 비축할 계획일세.”

모든 은화를 동원하여 쌀을 확보하라는 방침은 절대 내릴 수 없었다.

은이 국제적인 기축통화로 작용할 것이기에 조정에서는 일정 수량을 반드시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안 그러면 청국 상단에게 조선이 잡아 먹히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 시절 자유 무역은 정말 정글 그 자체일 것이니 말이다.

강희제가 관세를 굳이 은화로 변경하게 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어쨌거나 은화가 대량으로 유통되는 건 청국에 유리한 것이니 말이다.

나는 환기하듯 손을 내저으며 내수 문제를 밀어냈다.

이런 건 유형원과 허적처럼 경제 전문가들이 더 심도 있는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더 대국적인 논의에 집중하는 게 옳았다.

“결국, 우리 상단이 물건을 팔아 은화를 구한 뒤 다시 쌀을 구해야 하는 구조라고 볼 수 있소.”

“해서, 조정에서 전력으로 나서서 청국 상단의 눈을 사로잡아야 하오.”

한마디로 수출품을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청국의 상인이 매력을 느낄 만한 상품이 조선에는 많지 않았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했다.

약간의 침묵이 이어진 뒤 내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결국, 인삼이군요.”

“휴. 답답하지만 그렇소.”

“인삼이라…….”

“다른 건 없는 것인지…….”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나왔다.

인삼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불안한 기후는 인삼 재배를 확신할 수 없게 했다.

다들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그동안 두 손 들고 논 건 아니었다.

사실 없는 특산물을 어디서 만들겠는가.

현대국가처럼 공장을 만들어서 제품을 제조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허적도 멋쩍게 웃더니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인삼은 영호남의 것을 나삼, 관서와 강원 그리고 강계의 것을 강삼, 관북의 삼을 북삼이라고 하오. 이 중 가장 품질이 좋은 건 나삼이오. 그 뒤로 강삼과 북삼이지요. 당연하게도 값은 나삼이 강삼의 두 배, 북삼의 다섯 배에 이르오. 또한…….”

허적의 말이 이어질 동안 더 생각해봤다.

인삼이라도 제대로 생산해서 팔 수만 있다면 참으로 좋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론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조정에서 인삼을 재배하지요.”

“본부장. 그건 무슨 말씀이오?”

“인삼 재배는 민감에 맡기지 말고 조정에서 직접 관리하자는 말이외다. 모든 인력과 재원을 동원하여 인삼을 대량으로 재배해야 하오.”

한 마디로 인삼을 재배하는 지붕 없는 공장을 제안한 것이다.

하늘이 언제 어떻게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이럴 때 모든 걸 총동원하여 한 뿌리라도 더 재배하는 게 옳다.

조선에서 이를 할 수 있는 곳은 중대본이 유일했다.

“상단에 맡기지 않고 조정이 직접 나서자는 말이오?”

“그렇소. 그들에게 인삼을 배분하면서 쌀을 확보하면 될 일이오.”

“음.”

“무엇보다 상단은 우리처럼 대규모 인력을 동원할 수 없소. 사람을 쓰는 것도 막대한 재원이 들어갈 것이니 말이오.”

“조정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아니지요. 우리는 급료를 주는 고정 인력이 있소. 그들을 활용하면 되오.”

“훈련도감을 이르시오?”

“바로 그렇소.”

“좋소.”

재원 문제가 해결되니 허적은 대번에 동의했다.

나는 화답하듯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끝으로 중요한 건 왜국으로 인삼이 유출되지 않게 하는 것이외다. 우리가 이러한 도박을 하는 건 은화를 확보하기 위함이 아니라 쌀을 구하는 것이니 말이외다.”

“옳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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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논의를 진득하게 했더니 급격하게 피로가 밀려왔다.

눕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간절하여 가마꾼을 재촉했다.

먼 산을 바라보며 사가에 도착했더니 뜻밖의 방문객이 있었다.

죽을상을 하며 나를 기다린 사람은 바로

“대감.”

변승업이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오랜만에 봤다.

저렇게 눈알 굴리면서 안쓰러운 표정을 하는 변승업을 말이다.

물끄러미 쳐다본 뒤 말했다.

“들어가지.”

“감사합니다. 대감.”

가마에서 내린 뒤 뒷짐 쥐고 사랑방으로 냉큼 들어갔다.

변승업도 따라 들어왔다.

잠시 뒤, 하인이 냉수 한 잔씩 내어왔다.

이를 본 변승업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무슨 의미인지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 상기시켜줬다.

“그거 다 들이켜면 일어나게.”

“……소인이 손을 대지 않으면 계속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이런.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소인은 잔꾀가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은 어떤 꾀를 가져왔는지 궁금하군.”

내 말이 끝나자마자 변승업은 대뜸 엎드렸다.

그리고 절절하게 말했다.

“대감. 소인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혹시 그 기회라는 건 특혜를 말하나?”

“그렇습니다.”

“내게서 긍정적인 답변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건 자네도 알 것이네. 한데도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있을 것일세. 이를 말하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군.”

여전히 변승업은 내게 정수리만 보였다.

그의 표정이 어떠한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기회라는 두 음절에 담긴 본질은 자네가 자생으로 성장할 기회마저 박탈하지 말라는 의미겠군.”

“…….”

“혹시 내가 틀렸나?”

변승업의 고개가 조금씩 움직였다.

서서히 올라왔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아무래도 아직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꿈은 마약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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