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대륙을 향하여(2)
과거 내가 알던 변승업은 신분의 위계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위계를 넘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며, 양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자 늘 노심초사했다.
아니, 전제가 틀렸다.
신분의 위계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신분의 위계가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이건 사람이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과 동률에 놓일 정도로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기에 그러했다.
하지만 유형원으로부터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세계를 접했다.
이미 좌절되었으나 도무지 떨칠 수 없었던 그는, 방편을 모색하다가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제법 당당하던 말투와는 달리 눈동자에서 초조함이 보였다.
이마에 조금씩 흐르는 진땀은 불안함을 담고 있었다.
움츠릴 듯 말듯 움직이는 손가락은 긴장한 심리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의 답변에 따라서 꿈을 계속 꿀 수 있을지 박탈당할지 결정될 것이니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서슬 퍼런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꿈을 꾼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온 이유는 안다.
내 눈을 피해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고루한 성리학자인 송시열이 시장의 흐름을 읽어내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것이니 말이다.
내가 생각을 이어 가는 동안, 침묵이 길어지자 변승업의 떨림은 점차 커졌다.
그동안 함께 지내 걸었던 시간이 존재했기에 인간적으로나마 딱해 보였다.
그러나 이는 사감을 대입할 일이 아니었다.
“우선 물어봐야겠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헛된 꿈을 꾸고 대감께 접근한 건 아니었습니다. 이후에 가지게 된 꿈이었습니다.”
“아. 오해하지 말게. 삭주에서 만난 변승업과 얼마 전 내 말에 답변하지 않았던 변승업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네. 사람은 늘 변하기 마련이라고 나 역시 그때 말했던 것 같네만.”
“송구합니다. 소인은 그저 오해를 풀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또한 이해할 수 있네. 자네는 분명 나랏일을 했고, 대체 불가의 존재였어. 그때 길이 열렸다면 걸어보고 싶었을 수는 있지. 나는 이를 탓할 생각이 없네.”
“감사합니다. 대감.”
“그러니까 인간 송시열이 이해‘만’ 할 수 있다는 걸세. 몇 번을 반복할지라도 나의 결정은 변함이 없을 것이네. 아무래도 자네가 오해할 듯하여 이를 다시 언급한 것일세.”
“……소인이 어찌 오해하겠습니까. 하면, 이르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물어볼 말이 있다고 했네.”
“……송구합니다. 소인이 너무 경황이 없습니다.”
무릇, 송시열 혹은 송자로서 가지는 권위라는 건 늘 싸늘하게 인상을 쓰거나 눈을 부라리며 노려본다고 유지하는 게 아니다.
그냥 내 존재 자체가 권위이며, 위력이다.
만일, 내가 변승업을 옥죌 요량이었다면 문전 박대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굳이 들어오게 했으니 편히 대해 줄 필요도 있었다.
정치는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환기하듯 가볍게 옷소매를 내저었다.
“되었네. 어쨌거나 내가 궁금한 건 자네의 말이 제법 모호하다는 걸세. 자네의 상단이 이익을 꾀하는 걸 막지 말아 달라는 것인지, 금권의 길을 걷는 걸 모르는 척해 달라는 건지 모르겠네만.”
변승업은 명확히 후자를 가져왔다.
그러나 나는 용납할 생각이 없기에 다시 공을 넘겼다.
이리하면 알아서 판단할 것이니까.
“소인은…….”
말을 끌었다.
정말 꿈이라는 건 이토록 무서운 것이었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며, 상단이 흔적도 남기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이런다.
나는 상황을 더 정확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반계는 저서를 남길 수 없는 형벌을 받았네. 그는 살았으나 죽은 것일세. 한데, 자네와 김근행은 독점의 권한을 박탈당했으나 엄밀히 따질 때 가진 걸 빼앗겼다고 할 수는 없지. 굳이 비교해야 한다면 자네의 상단 자체라고 한다면 되겠군.”
당대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유형원이다.
또한, 현재의 제도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다소 삐뚤어진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런 인물에게 ‘저서’라는 건 목숨보다 귀중한 것이다.
영혼을 뽑힌 것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변승업에게는 상단 자체가 바로 이러할 것이다.
내가 굳이 ‘일개’ 상단과 후대의 조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지도 모를 유형원의 저서를 동률에 둔 건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변승업의 상단은 어쩌면 일개 상단으로 남지 않고 조선의 변화와 발전을 이끌 제3의 변수로 성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리된다면 유형원의 저서와 변승업의 상단은 가치가 같아질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나는 변승업에게 다시 기회를 준 것이었다.
더 쉽게 말하면 대답 잘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소인은 상단을 천하제일로 만들고자 합니다.”
변승업다운 답변이 들렸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이미 조선 제일일세. 한데, 굳이 천하제일이라고 한 건 중원을 움켜쥐는 상단이 되겠다는 의미인가?”
“그렇습니다. 소인이 해낼 것입니다.”
만일 조선의 상단이 청국의 상단을 압도하는 금권을 가지면 어찌 될까?
순수한 영향력으로는 조선의 왕보다 한 수 위가 될 것이다.
정치적으로 어찌 해결될지는 미지수이겠지만 말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금권 정치를 경계한다고 할지라도 상단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겠다는 상단주를 탓할 수는 없다.
그의 속내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알아도 그러했다.
본질은 금권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이건 조금 달랐다.
어쩌면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엄청난 차이가 있긴 했다.
노골적으로 금권 정치를 도모하고자 위정자에게 뇌물을 바치고, 관련 정책을 입안하는 것과 상단이 크게 성장하여 자연스레 물이 넘치는 건 아예 다르지 않겠는가.
변승업은 이를 정확하게 꿰뚫고 말한 것이다.
사회생활 잘하던 사람이 이제 노련한 정치인 흉내도 낼 줄 알게 됐다.
됐다.
잡설이 길었다.
조선의 상단이 천하제일을 해보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다.
안되면 어쩔 수 없고, 가능하면 조선의 풍요로움에 이바지할 것이니 말이다.
“그리하게.”
“정말입니까.”
“물론일세. 그러나 따로 특혜를 줄 수는 없을 것이네.”
“지금껏 어떠한 특혜를 받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자네도 우리를 지원해 줄 필요는 없네. 조정에서도 자네의 어선이 가져올 어류에 값을 치를 것이니까.”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까.”
“아닐세. 선은 분명하게 해야 하는 법일세. 자네의 마음은 알겠으나 어찌 받을 수 있겠나.”
“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일전에 대감께서 소인더러 중대본에 물적 지원을 그만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면, 당연히 어류의 지원도 중단되어야지요. 소인은 이미 그렇게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음. 중대본에서도 값을 치를 것이라고 여겼습니다만 아니었습니까?”
“하하하…….”
멋쩍어서 웃은 게 아니었다.
변승업의 마음가짐을 확실하게 알았기에 웃은 것이었다.
“자네 정말 제대로 해볼 생각이군.”
“예. 오직 소인의 힘으로만 나아가 볼 생각입니다.”
“그건 막지 않겠네. 원 없이 힘써 나아가 보게.”
“감사합니다. 대감.”
“감사할 일은 아니지. 결국, 자네가 일궈야 할 것이니 말일세.”
“작금의 조선은…….”
변승업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감당할 수 없는 재해가 발생하지만, 위정자의 탓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극복하고자 종래 조선에 존재했던 법도를 철폐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전례 없던 상업의 성장도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소인은 이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마음 잊지 말게. 위정자들도 고민이 많다는 걸 말일세.”
“물론입니다.”
본론은 끝났다.
그래서 슬쩍 물어봤다.
“한데, 자네는 무엇을 들고 국경을 넘을 생각인가?”
“이런. 대감. 어찌하여 소인의 비기까지 꺼내라고 하십니까.”
“그저 궁금하여 물어본 것일세. 말하기 어렵다면 넣어 두게.”
“청에서 가장 필요한 걸 들고 갈 것이고, 조선이 절실하게 필요한 걸 들고 올 겁니다.”
“인삼을 들고 가서, 쌀을 들고 올 생각인가?”
“비슷합니다.”
변승업은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었다.
영업 비밀이라서 더 말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더 묻지는 않았다.
기업의 장사 수완까지 하나씩 다 관여할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어차피 높은 확률로 인삼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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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예상도 하지 못한 결과였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유형원도 당혹스러워 보였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변승업이 이리 나올 줄은 몰랐소.”
“…….”
“거. 정말 지독한 사람이 아닐 수 없소.”
“…….”
그랬다.
변승업이 정말 놀라운 행동을 했다.
나는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국경을 넘을 때 은화만 가져갈 생각인 듯하오.”
“…….”
“청의 쌀을 구하여 다시 국경을 넘겠지요.”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다.
유형원이 정리하듯 말했다.
“애석하게도 청으로 향하는 우리 상단이 가져가는 은화에 관세를 책정하지는 않습니다.”
무역하러 가는데 얼마 들고 가는지로 관세를 책정할 수는 없다.
“또, 무역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는 상단이 실어 올 쌀에도 관세를 책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중대본은 목적은 쌀이었다.
그런데 상단의 목적은 이익이었다.
그들은 가져올 쌀로 취할 이익을 기대할 것이다.
이러한데 상단이 가져올 쌀에도 관세를 책정하면 그들은 다른 물품에 더 집중할 것이다.
아무리 전근대라고 할지라도 조정이 할 수 있는 일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만일, 무리하게 관세를 책정하면 상단은 상당한 반발을 할 것이다.
억지로 짓눌러도 한계가 있다.
밀수가 성행할 것이고, 쌀의 수량을 줄이기도 할 것이다.
이는 또 전근대라서 발생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조정이 모든 걸 파악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즉, 변승업은 아직은 미약한 조선의 ‘무역법’이 가지고 있는 빈틈을 완벽하게 찾아 낸 것이다.
관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 방법이었다.
이는 초안은 쌀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었으나 강희제의 불허 방침이 만든 수정안의 허점을 파고든 것이다.
또 다른 문제점.
“본국의 은화가 얼마나 유출될지 가늠할 수가 없겠지요.”
변승업이라면 조선 전역에 존재하는 은화란 은화를 모조리 취할지도 몰랐다.
그의 상단이 그만큼 대단한 걸 떠나서 조선의 내수 경제가 그 정도로 좁고 취약했다.
결국, 변승업은 조선의 은화를 들고 가서 청국의 쌀을 구한 뒤, 중대본에 넘기면서 막대한 차액을 남길 의도였다.
일전에 변승업과 만나 대화한 일을 잠시 상기했다.
-청에서 가장 필요한 걸 들고 갈 것이고, 조선이 절실하게 필요한 걸 들고 올 겁니다.
청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건 인삼이 아니라 은화였다.
어쩌면 인삼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인삼은 불안정한 기후로 생산량을 가늠할 수 없다.
그러한데 막대한 관세를 부담하며 압록강을 넘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이다.
“역시 무역은 우리보다 그가 한 수위라고밖에 볼 수 없겠군요.”
유형원의 최종 결론이었다.
그런데 문제긴 했다.
아무리 자유 무역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게 자유로울 수는 없는 시절이다.
관세도 관세였으나 예상하지 못한 은의 유출은 중대본으로서도 심각한 부담이긴 했으니 말이다.
남은 건 우리가 어찌 대응할지를 논의하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질 때 유형원이 핵심을 꺼냈다.
“김근행은 동, 변승업은 은을 지배하는 구조가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