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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49화 (249/298)

249화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1)

조선이 아무리 법도를 중시한다고 할지라도 현대적 의미의 법치국가는 아니었다.

법도를 집행하는 건 명시된 활자가 아니라 사람이었기에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되돌아보면 송시열이 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내가 법도를 부르짖으며 다니긴 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엄격하게 법도를 적용하고자 하긴 하였으나, 자로 잰 듯 완벽한 잣대라고는 할 수 없었다.

변승업이 우리가 만든 허술한 법안의 허점을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덮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거. 우리가 실수했네.

이러면 끝이다.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변승업이 불만을 가질 수는 있으나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아니긴 했다.

많이 유연해졌기에 잠시 잊을 수는 있으나, 여전히 조선은 조선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대신들도 그냥 도륙해버리는 시대가 아니었던가.

구태의연하게 과거의 사례를 찾아서 꺼내올 필요는 없다.

다가오는 내일의 군주, 현종 아들 숙종의 역사가 그러했으니 말이다.

이러한데 고작 상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이 사안을 논의하고 있으나 누구도 심각하지는 않았다.

작금의 조선은 언제라도 상단을 무력화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논의하는 건 내가 변승업에게 한 약조의 무게 따위에서 비롯한 것도 아니었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득이 될지 판단하기는 해야 했다.

딱 이 정도였다.

자연스레 우리 시선은 요약정리를 하던 유형원을 바라보게 됐다.

“소생의 생각으로는 원안을 고수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변승업의 행동을 묵인하자는 의미였다.

그래도 되긴 했다.

하지만, 유형원은 전적이 있는 사람이라서 의도가 궁금했다.

선뜻 동의하는 게 머뭇거려지기도 했고.

내 시선을 느꼈을까?

유형원은 다소 쓰게 웃으며 말했다.

“화폐라는 건 참으로 묘합니다.”

“대뜸 무슨 말인가?”

“대감. 이미 양국의 국경이 열렸습니다. 무역 거래의 수단은 은화가 되었지요. 한데, 우리 조선은 동화가 주된 화폐가 아닙니까.”

“자네답지 않게 다 아는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인가? 나 닮아가나?”

“허. 참으로 치욕스럽군요. 어쨌든 여태까지도 은화와 동화의 가치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아니었습니까. 한데, 전면 무역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면, 가치의 차이는 더 가속화될 겁니다.”

“아무래도 그러하겠지. 무역에서는 오직 은화만 사용할 수 있으니 원래의 가치보다 더 폭등하겠지.”

“허. 놀랍군요.”

“왜 놀랍다는 건가?”

“아닙니다.”

“이런.”

“어쨌거나 은화의 가치가 상승한다면 동화의 위치를 흔들 겁니다. 아니, 은화가 동화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달러가 원화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왜?

원화는 아직 대중적이지 않지만, 달러는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건 쉽게 예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때 유형원과 눈이 마주쳤다.

“대감. 지금 우리는 ‘은화’의 성질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평소 보고 사용했기에 ‘은화’가 가까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무역에서 오직 은화만을 사용할 수 있기에 은화는 명확하게 청국의 화폐가 되는 겁니다. 즉, 은화의 사용이 청국 화폐의 사용과 같은 시대의 초입에 도달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조각을 하나씩 붙여서 그림을 만들면 능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 보였다.

“이는 곧 종래 조선의 조정이 추구한 이권 재상론을 허무는 결과로 이어질 겁니다.”

화폐 주조를 조정이 독점하여 발생하는 이권을 독점해야 한다는 것이 이권 재상론이었다.

조선은 꾸준하게 이와 같은 방침을 유지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권 재상론은 허물어지고 있다고 해야겠군요. 최종적으로 조선의 조정, 아니, 군왕의 권능을 청국 상단이 가져가게 된 것입니다.”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게 무역이 아니었다.

일국의 방침과 방향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변수라는 것이 살아서 숨 쉬는 수준이었다.

“이해할 수 없군. 이미 전면 무역은 진행이 되었네. 그런데 이를 지금 제기하는 건 무슨 이유인가.”

“제기한 게 아니라 상황을 말씀드린 겁니다.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알겠네. 하면, 변승업의 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가. 아니, 자네의 말대로라면 변승업을 더 제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조성이 최대한 많은 수량의 은을 가지고 있어야만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니 말일세. 한데도 자네는 그냥 두자고 말했네. 이는 어찌 된 일인가.”

“대감. 소생은 줄곧 작금의 상황은 우리가 손을 쓸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어차피 주도권은 은화를 많이 가진 세력 즉 청국 상단이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아무리 용을 쓰고 은화를 모아내더라도 그들을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한데, 여기에 변승업이 보탠다고 한들 얼마나 차이가 나겠습니까.”

이런 현실론은 또 새로웠다.

악을 쓰고 은화를 모아봤자 청국 상단을 감당할 수 없으니 그냥 흐린 눈을 하자는 말이었다.

일전에 논의한 것과는 아예 내용이 달라서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물론 유형원은 말을 바꾸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차라리 변승업이 은화를 마음껏 운용하여 최대한 많은 쌀을 확보할 수 있도록 두는 게 옳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발생한 상황에 가장 적합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결국, 택일입니다.”

“원안을 선택하여 화폐 주조의 이권을 최대한 사수하는 것과, 쌀을 한 톨이라도 더 확보하는 것 중 고르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정녕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가?”

“무역을 중단하면 됩니다.”

“정말 극단적이군. 그리하면 아마도 나는 황제를 능멸했다는 죄로 잡혀갈 것이네.”

“하면, 소생이 제기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지요.”

“음.”

“하지만, 이걸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껏 꾸준하게 쌀의 비축을 도모해왔습니다. 그토록 험난한 길을 걸어 대청 전면 무역을 도모한 것도 결국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니었습니까? 비축미 천만 석을 바라봐야지, 은화 천만 냥을 꿈꿀 게 아니라고 여깁니다. 아닙니까?”

다 맞는 말인데 정말 외통수였다.

아. 지금 유형원의 눈이 반짝이는 건 덤이었다.

추가적인 말을 하지 않았고, 내가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필시 처음 금권 정치를 도모할 때 여기까지 내다본 것이 확실하다.

변승업의 행보는 유형원의 초안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사는 사람인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고민이 깊어지긴 했다.

심지어 허적도 쉽사리 의견을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우암. 더 고민할 필요가 있겠나? 반계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네만.”

도통 무역에는 의견을 개진하지 않던 송준길이 말했다.

심지어 아주 강력한 의사 표현을 한 것이다.

너무 의아하여 쳐다봤는데

“탈이 생기면 다시 거두면 될 일일세.”

이어지는 말이 걸작이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그랬다.

“은화가 아무리 많아도 기근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지 않은가. 백성을 구제하려면 쌀이 있어야 할 것이니 말일세. 반계. 천만 석이라고 했나? 좋군. 참으로 좋아. 그 정도는 있어야만 기근을 대비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지금부터 애를 쓰면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이네.”

천만 석으로 경신 대기근을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쳐다도 볼 수 없는 규모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 푼도 안 쓰고 10년을 모아도 될까 말까 한 수치였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송준길이 언제 이렇게 저돌적으로 바뀌었을까?

완전 불도저였다.

지금도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었다.

“다들 어찌 생각하시오?”

“당장 뾰족한 수가 없긴 하오.”

“그렇긴 하오. 이미 국경 지척에 이른 상단도 있는데, 갑작스러운 방침의 변화는 혼란만 가중할 뿐이니 말이외다.”

“그렇긴 하지요. 이대로 합시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처음 이 문제가 논의된 건 역시 변승업의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들에게 상단의 도전이라는 건 전혀 심각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냥 발로 차버리면 다 해결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대사헌의 의견이 옳소. 지금 우리가 은화의 확보나 주도권을 신경 쓸 때가 아니외다. 이는 난세를 극복한 이후에 생각하는 게 옳소. 아니면 후대가 감당하겠지요.”

허적이 인상적인 말로 쐐기를 박았다.

그래.

우리가 무역하는 이유는 국고의 무궁한 영광이 아니라 쌀의 확보였으니 말이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일단락되었을 때였다.

갑자기 중대본의 문이 열리더니

“하하하! 다들 잘 지내셨소?”

호탕하고 유쾌한 웃음과 함께 허목이 모습을 보였다.

“모두 모여 있으니 참으로 좋소. 그렇지 않아도 내가 긴히 할 말이 있었소.”

뭐라고 해야 할까.

사람이 조금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전에는 느낄 수 없는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오자마자 할 말이 있다는 건 무엇일까?

“본부장. 내가 안건을 하나 발의해도 되겠소?”

“안건이라. 무엇이오?”

“위생국의 길을 찾았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허목이 직접 삼남 지방을 다녀왔다.

단지 관리 감독이 목적이 아니라, 위생국의 새로운 길을 찾겠다며 달려갔다.

그곳에서 전대미문의 폭우로 엉망이 된 사방을 보며 고심하여 창출해온 위생국의 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고단하고 늦었더라도 이를 듣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데

“가장 많은 백성을 죽이는 건 폭우도 가뭄도 아닌 바로 역병이오.”

너무 놀라운 사실이라서 하품이 나올 뻔했다.

그래서 흐린 눈으로 쳐다 봐줬다.

물론, 허목도 관록이 있기에 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건넸다.

“허 국장. 중대본도 그걸 알기에 그간 위생국의 역량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소. 어디 이뿐이었소? 무당까지 동원하여 위생을 보급하고 있소.”

“본부장.”

“이렇게 쳐다보면서 대화하니 영 그렇군요. 다시 다른 곳을 쳐다봐 주시겠소?”

“실없는 소리는 좀 넣으시오.”

“좋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위생을 보급하는 건 대비였고, 의원을 육성하는 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함이었소.”

“해서요?”

“우리는 중간의 과정, 즉 가장 중요한 부분을 배제했소. 나는 이를 말하고자 하오.”

“우리가 배제했다는 부분이 무엇이오?”

“역병에 걸린 병자를 고을과 멀리 떨어진 산성 따위에 격리하는 것이 방침이었소.”

“그렇소. 그래야만 역병이 더 번지는 걸 차단할 수 있으니 말이외다. 설마 이를 문제 삼겠다는 것이오?”

“아니외다. 나는 격리가 아니라 분리를 말하고자 하오.”

격리와 분리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역병에 걸린 병자를 대상으로 할 때 같은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

모르지 않을 허목이었는데도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전에 병자나 허약한 이를 제대로 분리하지 않았기에 역병이 창궐한 것이오.”

허목의 말은 나의 말문을 아예 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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