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경고(警告)
모처럼 훈풍이 불었던 중대본 논의였다.
모두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지만 기어이 해내기로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게 도박이긴 했다.
냉정하게 작금의 조선이 이토록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장담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강행을 선택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쌀을 비축하는 게 최선의 대책인 시절이다.
그러나 허목의 말대로 굶어 죽는 사람만큼 역병의 창궐로 죽는 백성의 수도 엄청나다.
이를 인지하여 대처하기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아예 제대로 총력을 다해보자는 말이었다.
물론, 허점이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일단 덮는다.
남은 건 하나였다.
허목이 제안한 파격적인 수준의 개혁안이 집행되려면 무조건 교지가 필요했다.
개혁이라고 쓰고 변혁이라 읽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어찌 중대본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잠시 훈풍이 불었던 순간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어려운 건 알고 있소. 그러나 선생의 말씀이 다 옳은데 어찌 반대하겠소.
허적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역병을 막아낼 수만 있다면 천만금이 있던 국고가 고갈되어도 해야 하오.
-호판. 비축은 엄두도 낼 수 없을 것이오.
-딱 1년만 탕진해봅시다.
-…….
허적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교지만 받아주시오.
-이런. 결국, 또 그 말이오?
-하하하.
허적은 호탕하게 웃으며 유형원을 바라봤다.
-반계. 동부 지역처럼 말끔할 수는 없을 것이네. 그러나 최대한 효과는 내야겠지.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소생은 다 할 수 있습니다.
재수 없다.
-하하하. 좋군.
허적의 맑은 웃음이 잔잔하게 번졌다.
남은 건 이제 나의 역할이었다.
모두 나를 쳐다봤다.
그냥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반대하실 리가 없지요.
그랬다.
그랬는데
“역병도 결국 굶주림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오?”
이연은 시작부터 짧고 정확하게 허점을 치고 들어왔다.
사실 오만가지 방법을 다 동원할지라도 굶주림을 해결할 수 없다면 결국 모두 원점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이번 개혁안의 치명적인 허점이었다.
“본부장. 잊으셨소?”
“전하.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애석하게도 조선은 늘 선택해야 하는 나라요.”
“…….”
“이 지독하게 가난한 나라는 하나를 택하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하오. 하여, 매사 신중해야 하며 백 번을 고민해야 하오.”
뼈를 때리는 이연의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바로 반론을 펼쳤다.
“전하. 일전에 방한 대책에 주력할 것을 명하셨사옵니다.”
“예. 분명히 그랬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대비해야 하나고 말이외다.”
“그렇사옵니다. 이번 안건도 마찬가지이옵니다.”
“내 말이 그 말이외다. 이토록 큰 토목이라면 엄청난 재원이 들어갈 것이오. 하면, 비축하여 기근을 대비하는 게 옳소.”
결국 한정된 자원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물러나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니, 나는 할 수만 있다면 허목의 개혁안을 집행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감내할 수만 있다면 이 일로 얼마나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을지 가늠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전하. 신이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하온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것이옵니다.”
“실성하셨소? 내가 길 가던 사대부로 보이시오?”
“신이 아직 그 정도로 눈이 흐릿한 건 아니옵니다. 아주 잘 보이옵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참으로 불경한 신하로다.”
“신이 송자이옵니다. 잊으셨사옵니까.”
“시끄럽소. 해서,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것이오?”
나는 고약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이연의 눈이 가늘어지자 그만 웃었다.
자고로 선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다.
“전대미문의 폭우로 삶의 터전이 무너진 지역이옵니다. 어차피 복구 작업을 진행할 것인데 더 좋고 쾌적한 고을을 만들어내는 것이옵니다.”
“조정에서 백성의 가옥을 하나씩 축조할 수는 없소. 한데, 지금 중대본은 이를 행하자고 하오. 심지어 특정 지역이 아니라 광범위한 범위를 대상으로 말이외다. 조선의 국고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전하. 결국 백성의 일이옵니다.”
“허.”
“어차피 그들은 가옥을 새로 축조할 것이옵니다. 조정은 새로운 방향만 제시하는 것이옵니다. 물론, 더 고된 시간이 될 것이기에 원성이 있을 수는 있사옵니다. 하오나 해야 하는 일이옵니다.”
“말이 참으로 고약하오?”
“사실이 그러한데 어찌하겠사옵니까.”
“성현의 위치에 올랐는데도 졸렬함은 바뀌지 않소?”
“전하. 백성의 책무를 고하였는데 어찌 졸렬하다고 하시옵니까. 또한, 맥락에 전혀 어울리지 않사옵니다. 하옵고, 사족이 전면에 나설 것이옵니다. 조정의 재원은 최소한으로 사용할 것인데 어찌 반대‘만’ 하시옵니까. 오늘 전하를 알현하니 과거 남인의 모습이 떠올라 신은 참으로 가슴이 아프옵니다.”
“죽고 싶소? 퇴궐하는 길에 사약을 받아 가시겠소? 아니면, 사가로 보내줄 수도 있소.”
“살려주시옵소서.”
“조심하시오.”
“예. 전하.”
아슬아슬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물론 살기는 없었다.
우리는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였다.
“전하. 어차피 구휼미는 내려질 것이며, 사족은 곳간을 열 것이옵니다. 하면, 백성의 끼니가 해결될 것이옵니다. 가옥을 다 세울 때까지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는 것인데 어찌 어려움이 있겠사옵니까?”
“불가하오.”
“어찌하여 반대‘만’ 하시옵니까. 참으로…….”
“본부장.”
“예. 전하.”
“정녕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오?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오?”
이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이건 농이 아니었다.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구휼미는 말 그대로 구호(救護)이기에 시일이 짧소. 하지만 토목을 일으키면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책임져야 하오. 한데, 중대본에서 이를 논의한 흔적을 어찌 찾아볼 수 없는 것이오?”
중대본의 개혁안을 완벽하게 분쇄하는 논리였다.
우리가 이를 덮은 건 아니었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놓친 것이었다.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전하. 신은…….”
“또한, 쌀만 내리면 위생국의 원안대로 가옥을 세울 수는 있소? 그 외에도 다양하고 품목이 막대하게 필요할 것이외다. 구휼미도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조정에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백성의 가옥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이오?”
“전하. 조정에서 전적으로 책임지는 일이 아니옵니다.”
“국정은 그렇게 운영하는 게 아니오.”
이연의 목소리는 싸늘해졌다.
절로 움츠려질 정도였다.
“민간의 역량이 보태진다고 할지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열외로 봐야 하오. 상황이 어려워지면 언제라도 파기할 수 있는 게 민간의 약조이기 때문이오. 보태지면 좋은 것에 불과한 불확실한 역량의 약조를 믿고 이 난세에 그토록 큰일을 도모한다는 것이오? 나는 백성의 생사를 건 국정을 그토록 허술하게 운영할 수는 없소.”
“…….”
“적과 싸우는 관군이 의병의 역량만 믿고 작전을 수립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
이보다 명확한 반대 의사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연은 단호했다.
“도성의 동부 지역에 토목을 일으킨 것과 이는 전혀 다른 일이외다. 아니, 이 사안만 봐도 알 수 있소. 고작 그 정도 일에도 중대본이 숨을 헐떡이며 집행했소. 내 말이 틀렸소?”
반론을 펼칠 수가 없었다.
이연의 기세를 떠나서 논리가 부족했다.
중대본에서 정확하게 놓친 부분이었기에 그러했다.
이연은 고르듯 숨을 내쉬었다.
“오늘의 일을 가볍게 넘길 수 없소.”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내가 중대본에 전권을 준 건 중심을 잡고 기근을 대비하라는 의미였소. 한데, 최근 중대본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소. 보기에 따라서 치적에 집중하는 느낌이 들 정도요.”
“…….”
“적과 싸우라고 군권을 내렸는데 전공을 세우는 것에만 급급하다는 말이오. 내 말을 이해하셨소?”
“……황공하옵니다.”
여러 생각을 들게 하는 말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할 때였다.
문밖에서 내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전하. 평양부에 병충해(病蟲害)가 발생했사옵니다!”
메뚜기떼……?
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힐 뻔했다.
“들으셨소?”
이연의 눈빛이 차가웠다.
“위생국의 안건을 집행하려면 평양의 병충해로 고통받는 백성을 포기해야 하오.”
“…….”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늘 선택의 순간에 놓여 있는 것이오.”
“…….”
“만일, 위생국의 안건을 집행하고 싶다면 더 책임감 있는 방안을 마련하시오. 나는 국고의 비축을 더는 미룰 수 없으니 말이오.”
한마디가 더 보태졌다.
“똑바로 하시오.”
“……황공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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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몸을 지탱하며 중대본까지 왔다.
오는 내내 이연의 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지금은 번뇌 따위에 휩싸여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장계로 확인한 평양부의 사정이 막연한 예상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메뚜기가 평양성 전역을 뒤덮은 것이다.
“하…….”
지긋지긋했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이제 겨우 추위에서 벗어나 추스르는 백성의 터전에 메뚜기가 횡포를 부리는 건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이게 가능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침통함만 가득한 상황을 밀어내며 말한 건 허적이었다.
“이건 방법이 없소.”
말 그대로였다.
메뚜기떼는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싸울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가 있을 뿐이었다.
“병충해가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려야 하오.”
“…….”
“그 뒤 구휼미를 보내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오.”
무조건 구휼미를 보내야 한다.
그냥 두면 굶주린 백성에게 역병이 빠르게 다가갈 것이다.
굶주림과 역병은 공식처럼 연결되는 것이니 말이다.
“지금부터 구휼미를 추산하여 운송할 준비를 하겠소. 본부장. 우리가 이 이상 더 논의할 수 있는 건 없소. 하루라도 빨리 병충해가 끝나길 바라는 것이 유일하오.”
“그러하겠지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지만 미련이 잔뜩 남았다.
속이 아릴 정도로 쓰렸으나 어찌할 방법도 없었다.
그저 한스러울 뿐이었다.
또한, 이연의 말과 지금 상황이 겹치니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 전하를 알현하였소. 그런데…….”
이연의 말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전했다.
애석하게도 원론적으로나 지금의 상황으로 보나 틀린 내용이 없었다.
그러니 감히 반론을 꺼내는 이도 없었다.
최초 발의자인 허목도 아쉬운 듯 잘게 입술을 깨물며 낮게 한숨을 쉴 뿐 무슨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특히, 메뚜기떼가 평양을 집어삼켰는데 허목의 안건을 고려할 시간이나 여유가 존재할 수는 없었다.
“한데, 본부장.”
“허 국장. 아쉬운 건 알지만 우리 조금만 더 고려해보는 게 어떻겠소?”
“그게 아니라 서원과 향교 그리고 사찰을 관청에서 운용하는 건 어찌 되었소?”
“……말도 못 꺼냈소.”
“허.”
“아니, 고의가 아니었소. 병충해의 일이 전해졌는데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소.”
“그건 그렇지만…….”
“차후 다시 전하께 고할 것이니 우려하지 마시오.”
“알겠소.”
“하지만 이건 쉽사리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대화의 끝에 끼어든 사람은 유형원이었다.
“소생이 방안을 찾아보겠습니다. 대감들께서는 병충해에 집중하시지요.”
그래도 우선 평양이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