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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54화 (254/298)

254화 왕은 다 할 수 있다

이연은 아주 맑게 웃고 있었다.

어떠한 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맑은 웃음이었다.

반면, 변승업은 감히 용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기에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물론 나는 어깨도 펴고, 등도 펴고,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었다.

이연과 시선이 마주쳤다.

의미심장하게 웃기까지 했다.

조금 당황했다.

그새 이연의 말이 시작됐다.

“역관 변승업이라고 하였나?”

“그,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간 참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고 들었다.”

“그저 작은 일을 한 것에 불과하옵니다. 부풀려진 것이니 어심에 담아둘 일이 아니옵니다.”

“내가 그 정도 사리 분별도 하지 못하는 왕은 아니다.”

“화, 황공하옵니다. 신은 그저…….”

“무슨 말인지 아니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도다.”

“그, 그저 황공하옵니다.”

변승업은 아직도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심지어 말까지 더듬거렸다.

되돌아보면 평소 나를 상대로도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금권 정치가 불거지기 전만 해도 나와 팽팽하게 협상했다.

그러나 왕이라는 존재는 모든 조건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절대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는 게 왕이라는 존재였다.

더욱이 작금의 군왕인 이연은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하고 있다.

심지어 만백성에게 명군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더 말하면 입만 아팠다.

이러하니 변승업은 괜한 처세로 몸을 납작 엎드린 것이 아니었다.

곁눈질로 힐끗 봤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등짝은 식은땀으로 가득할 것이다.

또, 냉철하게 움직이던 이성은 아예 찾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다.”

변승업은 중대본과 ‘거래’를 했다.

그런데 이연은 ‘공’이라고 했다.

두 가지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변승업은 이를 파악할 정신이 없는 듯했다.

“신은 그저 훈련대장 이완의 요청을 받은 것에 불과하옵니다.”

“조정의 형편이 어려워 평양부의 병충해를 알고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만일 자네가 아니었다면 어찌 가여운 백성들을 제대로 구할 수 있었겠는가.”

“신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참으로 장하도다. 이토록 열의에 찬 신하를 보고 있노라니 이 나라 조선의 내일이 밝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여, 나는 참으로 기쁘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변승업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묘한 쾌감까지 담겨 있었다.

이연은 흡족한 듯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 내가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다.”

“전하. 신이 어찌 공을 탐하겠사옵니까.”

“무릇 공과는 분명해야 한다. 너의 공이 이토록 크고 갸륵하거늘 그냥 넘긴다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욕할 것이다.”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전하.”

“음.”

변승업이 완곡하게 거절하자 이연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묘한 말을 꺼냈다.

“듣자니 상단을 괴롭히는 양반들이 많았다고 하였다. 맞는가?”

“그것이…….”

“재물을 요구하거나 패악질도 일삼는다고 들었다. 그러한가?”

“신이 어찌 함부로 나서겠사옵니까.”

“허. 참으로 무도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 내가 이번에 친히 교지를 내릴 것이다. 부당한 이유로 재물을 요구하는 이가 있다면 극형에 처할 것이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온데 전하.”

이미 변승업이 중대본에 결합하면서 내가 강력하게 경고한 일이다.

그 이후 누구도 그에게 재물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를 이연이 아예 새로운 일처럼 언급하니 참으로 놀라웠다.

변승업도 이제 분위기 파악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조선의 왕, 이연이었다.

“사양하지 말라. 너는 조선의 양반 중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한 것이다. 평양의 백성을 다 살렸는데 내가 이 정도도 내어주지 못할 이유는 없다.”

“전하.”

황망함에 고개를 든 변승업의 표정은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곁눈질로 바라보던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러니까 평양부의 일을 변제(辨濟)할 여력이 없다는 걸 아는 이연이 그냥 후려치는 것이었다.

이로써 중대본은 공식적으로 변승업에게 빚이 없어졌다.

이건 좋은 일이긴 한데, 이연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긴 했다.

“너의 상단만이 아니라 조선의 모든 상단을 대상으로 할 것이다. 이만하면 만족하겠는가?”

이건 또 스케일이 다른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연은 짓밟은 금권의 씨앗에 숨통을 트이게 하고 있었다.

상단에게 이유 없이 재물을 갈취하는 건 당연히 막아야 하는 일이다.

옳은 일이지만 금권의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막을 명분은 없다.

일단 옳은 일이니까.

나는 사태를 관전했다.

그리고 변승업의 눈동자는 격하게 떨렸다.

“한데, 본부장.”

“예. 전하.”

“일전에 내게 위생국의 새로운 정책에 대해서 고하였소. 나는 흔쾌히 동의하면서 재원 집행 방안을 가져오라고 했소. 한데, 어찌하여 아직 소식이 없소?”

이런.

이제 이연이 무엇을 위하여 오늘의 자리를 만들었는지 알게 됐다.

그러니까 변승업의 골수까지 뽑을 기세였다.

누구도 상단에 재물을 갈취하지 못하지만, 군왕은 정책으로서 모든 걸 뽑아낼 수 있다는 걸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런 반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덜덜 떨고 있는 변승업을 슬쩍 쳐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그나저나 말이 나왔으니 우선 쉬운 것부터 풀기로 했다.

“실은 신이 고할 사안이 있사옵니다.”

“허. 급히요? 무엇이오?”

오늘따라 손발이 잘 맞았다.

그러고 보니 나와 이연이 손잡고 이런 적이 없긴 했다.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전하. 위생을 강조하는 일은 백 번이라도 부족하옵니다. 또한, 역병의 창궐에 대비하는 것은 목민관의 중대한 일이옵니다. 하여, 기미가 보일 시 관청이 임의로 모든 서원과 향교 그리고 사찰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향교와 사찰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서원이 쉽사리 협조하겠소?”

“전하께서 교지를 내리신다면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경쟁하기로 했사옵니다.”

“허. 그렇소?”

“그러하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서인은 이 싸움에서 질 생각이 없사옵니다.”

“하하하. 이런 경쟁이라면 어찌 반대하겠소? 당장 교지를 내리겠소.”

“하옵고 전하. 사대부의 사가도 포함한 건 어떻겠사옵니까?“

“백성이 다 죽게 생겼는데 뭔들 못하겠소? 왕실의 종친들부터 사가를 개방하라고 할 것이니 당장 집행하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장황하게 풀어냈다.

변승업은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을 것이다.

“한데, 본부장. 하교에는 언제 답할 생각이오?”

이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움찔하며 몸을 수그렸다.

고개를 숙이는 건 덤이었다.

“설마 아직도 재원 대책을 수립하지 못한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하. 본부장과 중대본이 어명을 이토록 가볍게 여기는 것이오? 참으로 당혹스럽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일이옵니다.”

“아무리 막대한 재원이 필요할지라도 백성의 생사가 걸린 일이오. 내가 위생국의 정책을 들어보니 참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었소. 하여, 어명을 내려 방안을 마련하라고 하였소. 한데, 아직도 초안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 여겨야 하오? 감히, 어명을 거스르자는 것이오?”

진짜 믿을 뻔했다.

정말로 귀신도 놀랄 수준의 연기력이었다.

군왕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다.

나도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신들이 어찌 어명에 항거하겠사옵니까. 그저 부족한 탓이옵니다. 하오니 조금만 더 시일을 내려주시옵소서.”

“참으로 답답하오. 변 역관.”

“예, 예. 전하.”

“너는 어찌 생각하는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이 세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옵니다.”

“음. 그래. 이러면 되겠군. 네가 맡아서 해보겠는가?”

“전하. 중대본의 일이옵니다. 어찌 신이 감당할 수 있겠사옵니까.”

“나는 내 판단을 믿네만.”

“화, 황공하옵니다.”

이렇게 나오면 변승업은 퇴로가 완벽하게 막힌다.

나는 슬며시 말을 보탰다.

“전하. 이는 중대본의 일이옵니다. 어찌 상단에 위탁하고자 하시옵니까.”

“오늘부터 중대본에 변 역관의 자리를 마련하시오.”

“전하.”

“적당한 관직도 내릴 것이니 그리 아시오.”

일사천리였다.

정말 저항할 틈이라고는 없었다.

아마 지금쯤 변승업의 정신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전하께서 하교하셨는데 신이 어찌 반대할 수 있겠사옵니까.”

“좋소. 그렇지 않아도 일이 순탄하지 않았기에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오늘 변 역관이 이렇게 나서니 모두 해결되었소. 참으로 기쁘오.”

“전하께서 그러시다면 신도 그러하옵니다.”

변승업은 여전히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너무 안쓰러워서 발언권을 슬쩍 넘겼다.

“자네는 어찌하여 말이 없는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은 어떤 자리로 가게 되는 것이옵니까.”

“하하하. 말하게. 무엇을 원하는가.”

역시 변승업이었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다면 확실하게 얻어가고자 마음을 바꾼 듯했다.

“신이 감히 당상관을 탐해도 되옵니까.”

“자네가 조선을 살렸는데 당상관이 어렵겠는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원한다면 말하라. 국성(國姓)을 내릴 수도 있으니.”

양반 사회로 진입하는 최고의 레드카펫이었다.

변승업의 눈동자는 격하게 흔들렸다.

이로써 오늘 군왕은 조선의 모든 재물을 총동원할 수 있는 모든 명분 아니, 현실을 입증했다.

총동원령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연이 기어이 해내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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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현을 끝내고 나왔다.

변승업은 숨을 크게 내쉬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게 따지지 말게. 전하께서 하교하신 일이라는 건 자네도 알고 있을 것이네.”

“압니다. 한데, 위생국의 정책을 소인이 홀로 감당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대감께서 잘 아실 겁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막대한 부를 축적한 변승업이라고 할지라도 위생국의 정책안을 홀로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변승업이 개입되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사실이었다.

‘일단’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세세한 건 중대본에서 논의해볼 일이다.

나는 여전히 미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그건 잘 조율해봐야지. 다른 손도 좀 빌려야 할 것이네.”

“한데, 소인에게 다시 이런 기회를 내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분명 금권의 싹을 자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듯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자네, 전하의 뜻을 잘못 이해했군.”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는 금권을 꿈꾸는 상단이 아니라, 조선 최고의 부를 가진 양반이 된 걸세.”

“…….”

“자네의 행보가 곧 양반의 선행이 될 것이네.”

“허…….”

“잊지 말게. 자네는 이제 양반일세. 그것도 당상관이자 중대본의 일원이 된 것일세. 그러니 앞으로는 금권정치 말고 양반 중심의 질서를 강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주게.”

“…….”

싱그럽게 웃으며 농을 던졌다.

“감축드립니다. 영감.”

변승업의 얼굴이 참으로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었고.

“아. 곳간을 여는 건 우리 세밀하게 잘 논의해보도록 하지. 아마 반계가 자네를 찾아갈 것이네. 아주 격하게 반길 것 같군.”

“좋습니다. 해보지요.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우리 상단이 압록강을 넘어가고 있겠군요.”

드디어 때가 되었다.

바로 그들에게 우리 조선의 내일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우려되는 지점도 있었다.

“그 말은 청국의 상단도 압록강을 넘는다는 말이겠군.”

“그렇습니다.”

“부디 무탈하길 바랄 뿐이네.”

아무리 상단이라고 할지라도 대국의 상인들이었다.

그들이 패악질을 부리면 우리로서는 손쓰기가 어렵다.

해서, 내 걱정이 기우이길 바랐다.

“아. 자네, 국성은 어째서 거절했는가?”

“과유불급은 최고의 격언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말하게. 국성은 자네와 가문을 지켜줄 최고의 도구가 될 것이니까.”

“그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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