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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55화 (255/298)

255화 압도적 명분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하던 일은 기어이 발생하고 말았다.

“청국 상단의 패악질과 관련한 장계가 벌써 십수 건이나 올라왔소.”

압록강을 넘은 청국 상단은 어느새 평양까지 내려왔다.

한데, 그들은 어떤 상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이런 행동은 아직 무역 초기였으니 시장 분석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오만가지 난동을 피운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패악질에 화가 난 듯 속이 꽉 찬 허적의 말이 이어졌다.

“멀쩡하게 점포가 운영되는 곳에 가서 자리를 비우라고 하거나 길가는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빈번하오. 또한, 우리 관리에게도 겁박하니 도무지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오. 아니, 수령이 나서도 마찬가지라고 하오. 이건 말이 안 되오.”

백성은 발로 차고, 관리는 비웃고, 수령은 무시한다고 한다.

시작이 이토록 창대하면 앞으로는 어찌 될지 훤히 보였다.

조선 땅에서 조선인이 청국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너무 바쁘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황제의 백성이라는 절대적인 치외법권으로 계속 행패를 부릴 것이니 말이다.

이건 청국 사신단의 정사 뇌호를 우리가 압박한 것과 다른 일이었다.

정치와 경제는 접근 방법이 절대 같을 수가 없다.

더욱이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의 규모일 그들을 어찌 통제하겠는가.

서너 명이라도 청국으로 넘어가서 허튼소리를 하면 천고일제로 유명한 강희제가 노발대발할 것이다.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선은 이 바닥의 전문가이자 당상관으로서 장차 국성을 하사받을지도 모르는 변승업 ‘영감’에게로 향했다.

시작부터 진땀을 흘리며 눈알을 굴리던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사회생활을 잘하는 변승업이라고 할지라도 국사를 논의하는 중대본에 결합하니 중압감이 상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중대본 초년생의 어려움을 하나씩 다 받아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건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그냥 물어봤다.

“저들이 왜 저런다고 생각하나?”

“아.”

“바쁘니 빨리 말하게.”

변승업은 잠시 버벅거렸으니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청산유수처럼 말을 시작했다.

“어차피 물건은 사고팔아야 합니다. 그런데 소인이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청국의 상단이 이렇게 행동했던 적은 없습니다. 그들은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있기에 늘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랬겠지. 장사의 기본은 신뢰일 테니 말일세.”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뢰를 잃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나오는 건 달리 살펴봐야 합니다. 즉, 저들이 목표는 정당한 상행위가 아니라 대국의 위세로 우월한 입지를 가지겠다는 의도로 보입니다.”

“하. 결국 정치라는 말인가.”

“대감. 냉정하게 보셔야 합니다. 지금 조선과 청국의 무역은 전처럼 그저 물건을 사고파는 수준이 아닙니다.”

“…….”

“지금은 하기에 따라서 상단이 상단을 통째로 삼킬 수도 있고, 특정 지역의 상권을 완벽하게 독점할 수 있는 길까지 열려 있습니다. 이러한데 신뢰를 내세우며 적당하게 이권을 바라볼 이유는 없습니다. 신뢰를 얻는 것보다 대국의 위세를 내세우는 게 백 배는 더 효과적이니 말입니다. 오늘 청국 상인의 작태를 들어보니, 압록강을 넘은 우리 상단도 크게 고전하고 있을 겁니다.”

“자네 말대로라면, 청국 상단은 우리 조선의 거점을 아예 삼키려고 간을 본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점차 도성에도 진출하여 점포를 하나씩 차지할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대국의 위세를 걷어내더라도 청국 상단은 우리 조선의 상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들의 헛기침에 우리 조선 상단은 몸살이 날 수도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이건 정말로 곤란한 일이었다.

설마하니 초장부터 이렇게 공세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이건 조기에 해결하지 못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다.

고민이 깊어졌다.

“대감. 소인이 가서 그들을 상대해보겠습니다.”

변승업이 나설 만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저들도 상단이었으니 심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나서서 협상에 임하는 게 좋다.

그런데 우리 수령까지 무시하는 이들이다.

변승업과 제대로 대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설령 협상이 진행될지라도 얼마나 불리한 내용이 들어가겠는가.

심지어 저들은 청국을 대표하는 사신단이 아니다.

즉, 단일 집단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수백 개의 상단이 뒤를 이어서 들어올 것이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선례를 앞세워 우리를 압박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진짜 조선이 파산할지도 모른다.

경신 대기근이 아니라 청나라 자본으로 망해버리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단 하나라도 내어주어서는 곤란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자네가 가더라도 결국 협상에 임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가 아닌가.”

“대감. 협상이 아니면 저들을 어찌할 방법은 없지 않습니까. 무력으로 쫓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그건 당연한 말일세. 우리가 무력을 사용하는 순간 무역에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지. 청국 황제가 노발대발하면서 책임자를 소환할 것일세. 애석하게도 나는 청국에 끌려가서 죽을 생각은 전혀 없네.”

만일 유혈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강희제가 진짜 마음 독하게 먹으면 소환령을 내릴 수도 있다.

이때 버티는 건 미친 짓이다.

그냥 가야 한다.

기어이 안 가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조선에서는 이연밖에 없다.

대신 막대한 배상금을 내어야 할 것이다.

“한데, 대감. 협상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만일 저들이 상인으로서 상업의 이야기를 한다면 응당 자네가 가야겠지. 한데, 정치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도 정치인이 나서야 하는 것일세. 이왕이면 조선 최고의 정치력을 가진 내가 가는 게 가장 합당할 것이고.”

“본부장. 실성하셨소?”

“잠을 설치셨소?”

“체하셨소?”

“그냥 가만히 있으시오.”

여기저기서 격한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정치력을 보여주기로 했다.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시오.”

“본부장. 정말 묘안이 있소? 저들은 청사 뇌호처럼 연좌로 어찌할 수 있는 무리가 아니외다. 뇌호는 공식 일정도 있고 교지를 받아야 하기에 우리에게 발목이 잡힌 것이오. 하지만 저들은 그냥 떠나면 그만인데, 이를 어찌 감당할 것이오?”

“우선 박세당에게 연락해야 하오.”

“방법부터 말해보시오.”

“모두 잘 들으시오.”

간결하게 이어간 내 말에 중대본은 그냥 얼어버렸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상대의 급소를 정확하게 찌르는 방법이었다.

아니, 그동안 우리 중대본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지상 최강의 무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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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고 평양부로 달려왔다.

대국의 겁박이라는 건 시일을 끌수록 안 좋은 결과만 도출되는 것이기에 진짜 최선을 다해서 달려온 것이다.

“휴.”

아직 병충해의 피해가 완벽하게 극복되지 않았다.

사방에는 오리와 닭의 분뇨(糞尿)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백성들은 삶의 의지를 이어가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이 속에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무리가 너무나도 잘 보였다.

나는 그들을 빤히 쳐다봤다.

미친놈들처럼 고함을 지르며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이제 막 복구하는 점포에 들어가서는 괜한 시비를 걸기도 했다.

물건을 들었다가 집어 던지더니 멀쩡히 길 가는 백성을 희롱했다.

하지만, 그들의 위세에 주눅이 든 우리 백성은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부랴부랴 달려온 관리들이 보였으나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온 병졸이 참으로 가련해 보일 정도였다.

대국의 위세가 이렇게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조선이 어떤 나라였던가.

사신단 정사인 뇌호도 씹어 먹었던 저력이 있는 나라였다.

그 위대한 역사의 중심에 바로 나 송시열이 있었다.

나는 가자미눈을 하며 걸었다.

그런데

“갈!”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동북면으로 안 가고 버티고 있는 이완이었다.

딱 봐도 고위 무관으로 보이는 그의 등장에 청국 상인들은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던 길을 갔다.

그런데 이대로 넘어가면 이완이 아니다.

“감히 예가 어디라고 패악질이더냐!”

그의 외침에 청국 상인들은 멈췄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듯하더니 다시 걸었다.

이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선왕께서 이를 보시면 통곡하실 것이다!”

기어이 효종을 찾더니 급기야 손이 칼자루로 향했다.

저 인사는 조만간 불러서 교육 좀 시켜야겠다.

이건 정말 아니기에 재빨리 나섰다.

“아니, 백주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정확하게 조선어로 또박또박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완은 멈칫하더니 칼자루로 가던 손을 치웠다.

청국 상인들도 나를 쓱 쳐다봤다.

아까부터 이완의 말에도 대꾸하지 않더니 내 말도 무시했다.

그러나 장담하는 데 내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조선과 오랜 세월 무역했던 이들이었기에 기본적인 조선어는 탑재하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무시당하니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싸늘하게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제야 청국 상인들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당한 고관대작으로 보이자 제법 멈칫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냥 무시하고 하던 짓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길을 가는 게 아니라 패악질을 다시 이어간 것이다.

이 정도면 의도가 분명했다.

내가 가장 고위직을 보이니 확실하게 기선제압을 하려는 것이다.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아직은 절정은 아니었기에 화를 누그러트리며 외쳤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나를 비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당장 멈추라고 하였다!”

눈을 부라리며 삿대질까지 해줬다.

그런데도 비웃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슬쩍 길을 막았다.

그러자

“하!”

상인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를 밀쳤다.

그 즉시 나는

“으악!”

그 길로 쓰러졌다.

동시에 품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슬쩍 떨어뜨렸다.

손 위치를 최대한 조작하여 글자가 잘 보이게 했다.

글자는 아주 간략했다.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 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한마디로 요약하면 청 태조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누르하치의 위패였다.

아니, 그러니까 현시대의 최고 존엄이었다.

우리의 핵무기였고.

나는 위패를 부여잡고 오열했다.

“아, 아니 이럴 수가!”

그리고

“아니, 대감. 대국의 태조 황상의 위패가 어찌 땅에 떨어진 겁니까!”

박세당이 뛰어왔다.

그 뒤로 십수 명의 사대부도 달려왔다.

그리고 나는 봤다.

급격하게 안색이 어두워지는 청국 상인들을.

온 힘을 다해서 외쳤다.

“어찌 감히 대국 태조 황상 폐하의 위패를 땅에 집어 던질 수가 있는가?!”

나는 위패를 꼭 부여잡으며 관리들에게 외쳤다.

아니, 이완에게 외쳤다.

“훈련대장은 무엇을 하시는 것이오! 당장 저 무도한 무리를 포박하여 잡아 가두시오!”

압도적 명분은 무엇이라도 가능하게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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