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냉전
분명 시작은 신성모독이었다. 그런데 ‘이건 신실하지 못한 몇 명이 일으킨 신성모독이 아니라, 신냉전을 꾀하는 것이다!’라고 상황을 재정리해줬다.
교황청 내부의 일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분쟁으로 이어질 사안이라고 하였으니 뇌호로서는 얼마나 당혹스럽겠는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그의 눈동자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증좌가 있소?”
“대국 태조의 위패를 모시고 사당을 건립하려던 소인을 습격했습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훈련도감의 병력으로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죄인들을 놓쳤을 것이니 우리 백성은 청국 상인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을 겁니다. 이후 청국 상인이 국경을 넘을 때마다 충돌이 생겼을지도 모르지요. 심지어 소인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훈련대장 이완이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리되었을 겁니다. 참으로 불순한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리할 이유가 없소.”
“소인이 죄인들의 속내까지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어디서든 뭐라도 반대하는 무리는 있기 마련입니다. 전면 무역 자체가 불만일 수도 있지만, 조선과의 순탄한 외교로 순항 중인 대인을 반대하는 세력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소인은 양국의 관계가 험악해지길 바라는 무리의 소행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미 심리를 흔들었기에 두서없는 말을 쉬지 않고 이어서 했다. 했던 말을 교묘하게 바꿔가며 서두와 말미에는 꼭 냉전을 언급해줬다. 과연 뇌호의 안색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또한, 죄인들이 이미 자백했습니다.”
“자백이라고 하셨소?”
나는 상인들의 지장이 예쁘게 찍힌 문서를 내밀었다.
대충 ‘죄송합니다. 사실 우리는 테러범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엄청난 위협과 적당한 고문으로 얻어낸 문서였다. 이 시절 국문이라는 건 뭐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뇌호도 이를 알지만, 자백 문서의 존재 자체가 백 마디의 말보다 무게감이 있는 법이기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소인은 이번 사안을 그냥 넘길 수 없습니다. 발본색원하여 뿌리부터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양국의 불화를 꾀하는 무리가 쉬지 않고 활동할 것입니다. 참으로 끔찍합니다.”
“……내가 이 일을 최대한 수습할 것이오.”
“소인은 늘 대인을 믿습니다. 한데, 이 일은 단지 청국만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본부장의 요구가 무엇이오?”
“소인이 황상께 알현을 청할 것입니다.”
“…….”
“조선의 충심을 고하고, 대국에 있는 불순한 무리의 척결을 청할 것입니다. 대인께서도 소인을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본부장. 이미 황상께서도 대로하셨소. 그러한데 본부장이 알현까지 청하면 일은 걷잡을 수도 없이 커질 것이외다.”
“……대인. 지금 죄인들을 비호(庇護)하시는 겁니까?”
“허. 말이 과하시오.”
“하면, 어찌하여 소인이 황상 폐하께 알현을 청하는 걸 반대합니까.”
“나는 그저 일을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함이외다.”
제후국의 대신이 대죄를 지은 죄인의 멱살을 잡고 직접 황도로 입성한다면 황제는 어찌하겠는가? 체통과 위신을 위해서라도 더 화를 낼 것이다. 심지어 ‘너희 나라에 냉전을 꾀하는 무리가 있다는데?’ 이런 말을 할 것이니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물론, 상대가 천고일제 강희제이기 때문에 어설프게 사기 치려다가 일이 복잡하고 더럽게 꼬일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미 의심을 모조리 걷어낼 방도도 마련해둔 상태였다. 동시에 뇌호의 눈과 마음도 사로잡을 것이다.
“허. 대인.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이미 죄인들의 무도함이 만천하에 밝혀졌는데 덮으려고 하다니요?”
“본부장. 덮자는 게 아니외다. 이미 황상께서 알고 계시오. 한데, 어찌 은폐할 수 있겠소? 다만, 본국의 일이니 내가 인계하겠다는 말이었소.”
불쾌함을 억누르고 있는지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기가 담겼다. 하지만, 고작 뇌호의 기세에 밀릴 거라면 이 판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아니지요. 황상께서도 이 일은 모릅니다. 이제 밝혀진 사안이 어찌 아십니까?”
“그 일도 내가…….”
“소인이 해야 합니다.”
“본부장. 더는 나를 난처하게 하지 마시오. 그러니 뒷일은 내게 맡기고 편히 도성으로 돌아가면 될 것이오.”
“허.”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발가락에 있는 황망함까지 최선을 다해서 끌어 올렸다.
“소인이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한데, 그냥 돌아가라고요?”
조금 전까지 날카롭게 몰아치다가 대뜸 억울함을 호소하니 뇌호는 멈칫했다.
“그게 아니라…….”
“하면, 본국에서 대국 태조의 위패를 상하게 하는 이가 있어도 대충 넘기면 됩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또한, 양국을 이간질하려는 무리가 다시 등장해도 그냥 돌려보내면 되는 겁니까? 하. 조선은 제후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당을 건립하고자 정1품인 소인이 직접 움직였고, 훈련도감의 병력으로 호위까지 했습니다. 한데, 대인이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이러면 대체 양국의 우호는 대체 왜 필요합니까? 하면, 평소 시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황명이 내려오면 고개나 끄덕이면 되는 겁니까? 좋습니다. 그리하지요.”
“본부장.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하시오.”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군현에서 대국 태조의 사당을 제대로 건립하는지도 확인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대국의 상인이 국경을 넘을 것이니, 알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잘되어 있는지 직접 확인하라고 하십시오.”
“아니…….”
“그러나 고작 상인 따위가 우리 관리에게 지적하면 기분이 별로일 것 같습니다. 하나씩 모아서 공식 외교 문서로 전해주십시오. 이게 절차이지요.”
두서도 없는 말을 속사포로 쏟아냈다.
뇌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물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송시열의 졸렬함을 마음껏 휘둘렀다.
“또 소인도 다쳤습니다. 몇 달은 조정의 일을 수행하지 못할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본부장. 내가 대신 사과하리다.”
“하! 지금 누가 사과 못 받았다고 이러겠습니까? 나 송시열입니다. 조선의 일인지하 만인지상 본부장 송시열로서 주상 전하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살아 있는 유일한 성현으로 모든 사대부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송자입니다. 한데, 사과를 못 받았다고 이러고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죄를 청하라고 하리다.”
“대인.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명백한 죄인입니다. 한데, 어째서 계속 ‘그들’이나 상인이라고 하십니까?”
“…….”
“그리고 소인의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죄인들에게 소인에게 죄를 청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송시열이며 송자입니다. 한데, 대인께 구걸이라도 해야 하는 겁니까?”
“…….”
“참으로 불쾌합니다. 소인을 그렇게 가볍게 여기셨군요. 당장 우리 사대부들에게 이를 전할 겁니다.”
“아, 아니외다. 사대부들에게는 절대 전하지 마시오. 다들 바쁜데 뭐 하러 전하오? 나와 대화합시다.”
뇌호에게 사대부는 도끼를 들고 날뛰는 무리다. 그래서인지 진땀을 흘리며 사정까지 했다. 강렬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상대방이 진심으로 해명한다고 하여 마음을 풀어주면 송시열이 아니다.
내 기분이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 따위는 고려하지 않아야 졸렬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처럼 칼자루를 들고 있다면 절대 물러서지 않아야 송시열이다. 이래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도성으로 돌아갈 겁니다.”
“잘 생각하셨소.”
“가면서 사당 건립을 모두 중단하라고 한 곳도 빠지지 않고 들러서 전할 겁니다.”
“본부장.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그 문제는 이미 합의가 된 것이오. 한데, 파기한다는 것이오?”
“허. 황상을 알현하는 걸 막고, 관여하지 말라고 하며 소인을 무시했습니다. 한데, 본국에서 대국 태조의 위패를 어찌 모시겠습니까?”
“…….”
“아. 아니지요. 이미 양국의 우호를 해치려는 무리가 등장하였는데 대인은 이를 덮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한데, 소인이 뭐 하러 그렇게까지 애를 써야 합니까?”
“…….”
“생각해보십시오. 소인이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아무 말도 안 했소.”
“어쨌든 우리 조선은 적법한 처우가 내려지기 전에는 사당의 건립을 모두 중단할 겁니다.”
“…….”
“대인. 소인은 조선의 정1품 관리입니다. 한데, 직접 의주부터 도성까지 위패를 모시고자 움직였습니다. 수령에게 명해도 되건만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우리 조선이 이 일에 얼마나 진심으로 달렸는지 말하는 것입니다. 한데, 청국의 상인이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하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찌해야 합니까?”
“그 말은 아까 하셨소. 그러니 진정하시오.”
“되었습니다. 하지 않을 겁니다.”
내 말만 했다.
하늘 아래 존재하는 엄포란 엄포는 모두 총동원했다.
거를 타선 하나 없는 졸렬함을 보여줬다.
이러하니 뇌호도 의주를 떠나기는커녕 지금도 내 앞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마음이 상했다는 걸 전혀 숨기지 않았다.
“왜 안 가십니까?”
“하하하. 모처럼 만났는데 곧장 가려니 서운해서 며칠 더 머물기로 했소.”
“허. 황상 폐하께서 진노하셨는데 참으로 태평하시군요. 아. 대국의 일에는 입도 대지 말라고 했지요? 소인이 또 실언했습니다. 송구합니다.”
“휴. 본부장. 그러지 말고 마음을 푸는 게 어떻겠소?”
“지금 소인이 옹졸하다는 겁니까?”
“내가 언제 그리 말하였소? 누구라도 마음이 상할 만한 일이라는 걸 알기에 한 말이었소.”
“하면, 소인이 그것도 모르겠습니까?”
“하하하…….”
누가 보면 내가 대국의 사신이고, 뇌호가 조선의 관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만큼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졸렬함을 보였고, 뇌호는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만 밀고 가면 감정이 상할 수도 있다. 아니, 뇌호가 문제가 아니라 강희제가 걸림돌이다. 어차피 조작 사건이니 제대로 하지 않으면 덤터기 쓴다.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결과가 별로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버럭 화를 냈다.
“이 일은 소인도 존망이 걸린 일입니다!”
“아니, 대체 무슨 말이오?”
“진정 모르십니까. 양국의 관계를 이렇게 만들고자 소인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입니다. 심지어 대인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변승업을 당상관으로 만들어 중대본까지 올렸습니다.”
“허. 그게 정말이오?”
“그러한데 불순한 무리가 양국의 관계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아직도 조선에 가득한 친명파들이 이를 알면 개떼처럼 들고 일어나서 모든 걸 무위로 돌리고자 할 겁니다. 소인은 도무지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한데, 대인은 너무나도 평안하시군요.”
“그게 아니라…….”
“황상께서 노여워하시면 뭐 어떻습니까. 그 불벼락 우리가 맞습니까? 나쁜 놈들이 맞겠지요!”
“…….”
분명한 개연성을 확보하면서 적당하게 뇌호도 달랬다.
그러면 다시 졸렬해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