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영원한 우호
뇌호가 조선 전문 외교관으로 된 건 단지 우연과 상황의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역시 몇 번의 외교 협상을 진행하면서 조선 조정의 주요 캐릭터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그러니 송시열에게 졸렬함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다는 걸 알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 나의 행동을 볼 때 ‘이 새끼 왜 이래?’가 아니라 ‘또……?’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내가 졸렬한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지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번에 깨달은 게 많습니다.”
“……또 무언가를 깨달아버린 것이오?”
“대국에 사신을 보내려면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참으로 통탄할 뿐입니다.”
“보, 본부장.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분명 그러셨습니다만.”
“내가 언제 사신의 파견을 싸잡아서 말했소? 이번만 열외로 하자는 말이었소. 더욱이 이 일은 정식 사신단이 아니라…….”
뇌호는 장황하게 횡설수설했다. 통역이 제대로 안 되는 수준이었다.
나도 지금 막 생각이라는 걸 해보니까 뇌호는 지금 절대 황도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열이 뻗친 조선이 청나라 태조 사당 건립 중단을 선언해버렸는데 이걸 황제에게 전달한다? 이건 ‘죽여주세요~’라면서 목 내미는 꼴이었다.
이 상황에서 조선이 눈 딱 감고 ‘사실은 신성모독이 아니라 냉전이던데요?’ 이러면 뇌호의 삼족이 죽어 나갈 수도 있다.
그러니 잔류해서 어떻게든 나를 달래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데, 대인. 조선에서도 이 정도입니다. 하면, 청국으로 넘어간 우리 상인들은 얼마나 험한 꼴을 당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 대체 계속 무슨 말이오. 본부장. 일단 조금 쉬는 게 어떻소?”
“아니, 대인. 생각해보십시오. 죄인들은 조선 땅에서 정일품의 대신을 암살하고자 했습니다. 하면, 청국 땅에서 우리 상인은 얼마나 핍박당하겠습니까. 하루에 열 명이 죽어 나갈 수도 있겠군요.”
“보, 본부장. 대체 암살은 또 어디서 나온 것이며, 열 명이 왜 죽소?”
“우리 땅에서 발생한 문제도 대충 이렇게 덮으시려고 하는데 청국에서는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소인은 앞이 캄캄합니다. 그리고 암살이 어디서 나오다니요? 소인은 지금도 온몸이 아픕니다. 위생국을 수립하여 수년간 의술 역량을 강화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일어나지도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암살 시도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야 합니까? 소인은 위패를…….”
하늘을 향해서 뻗어가는 졸렬함에 크게 내상을 입었을까? 뇌호의 눈동자는 초점을 상실했다. 하마터면 손으로 훠이훠이 해볼 뻔했다.
“…….”
“되었습니다. 소인의 몸이 아픈데 대인이 대신 사죄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소인은 그저 우리 상인의 처지가 걱정될 뿐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대처 방안이 전혀 없으시군요.”
“……내가 요동에 잘 말하겠소. 아니, 황상께도 적절하게 고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러니 이제 좀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으시오. 지금 본부장은 너무 격한 상태인 듯하오.”
“소인은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압록강을 넘은 우리 상인은 그나마 탈이 없겠지만, 두만강을 넘어간 우리 상인의 안전은 어찌 될지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군요.”
뇌호는 눈을 껌뻑였다.
내 말의 의미를 되새기느라 잠시 버퍼링 중인 것 같았다.
그러다가 눈을 크게 떴는데 마치 ‘두만강을 너희가 왜 넘어가?’라고 묻는 것 같았다.
“조선 상단이 왜 두만강을 넘소?”
“상단이 왜 넘어가다니요? 당연히 장사하러 가지요?”
“요동은 이쪽인데 왜 반대로 가시오?”
“초피를 구하려면 두만강을 넘어야지요.”
“본부장. 그게 무슨…….”
“그나저나 소인과 함께 가실 곳이 있습니다.”
“아니…….”
뇌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에는 ‘그러니까 왜 너희가 두만강을 넘어?’라는 글자가 계속 담겨 있었으나, 나는 이 판의 대미를 장식해야 할 역사적 의무가 있었다.
“황상 폐하께 꼭 전해주셔야 할 게 있어서 그럽니다. 그러니 소인에게 시간을 내어주시지요.”
“……그리하겠소.”
여전히 그의 눈동자에는 물음표가 가득했으나 조만간 느낌표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 판을 준비하는 데 제법 공을 들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조금 멀리 가셔야 합니다.”
“어디길래 그러오?”
“평양부입니다.”
“뭐요……?”
이제 청국을 홀릴 마지막 장면을 연출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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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호의 눈동자는 격렬하게 흔들렸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느낌표가 생성되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막상 눈으로 보게 되니 너무나도 뿌듯했다.
나는 이 판을 준비하느라 고생한 박세당과 사족들을 칭찬이라도 해주려고 슬쩍 쳐다봤다.
그들의 입가에 썩은 미소가 걸려 있길래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순간 느낌표와 동고동락하던 뇌호의 고개가 움직이기에 우리는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보십시오. 대인.”
“아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대인께서 보신 그대로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곳 평양부는 도성 다음으로 번영을 이룬 곳입니다. 바로 이 평양부에서 우리는 태조 폐하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사당은 당연하며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위패가 있습니다. 어디에는 있는 겁니다.”
내 말대로 거리의 점포 내부마다 누르하치의 위패를 세팅했다.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외부가 아니라 조용하게 깔끔하며 정갈한 공간이었다.
누가 봐도 입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사당 분위기가 나게 했다.
제사라는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우리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준비한 결과였다.
말문이 막힌 뇌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니, 우리 태조 폐하를 이렇게까지…….’라는 감격에 찬 기분 좋은 비명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니 내가 너무 뿌듯했다.
하지만 나는 송시열이기에 다시 졸렬해질 시간이 다가오고 말았다.
“모두 철거할 계획입니다.”
“뭐, 뭐요?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이미 의주에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위패를 모시다가 암살의 위험에 노출될 것인데 어찌 함부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소인도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보, 본부장. 아무리 그대로 전면 철거라니요? 과하오. 우리 조금 더 상의하여 더 합당한 방도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런 건 없습니다. 이미 소인이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합당함을 전해드렸으나 다 무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습니다. 소인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버렸다 이겁니다.”
“진정하시오. 나는 처음부터 다시 논의할 수 있소.”
“허. 대인. 생각이라는 걸 해보십시오. 버젓이 위패가 있는데도 청국 상인들이 다니면서 물건을 집어 던지고 패악질을 부렸습니다. 암살의 위험에 노출되더라 이겁니다. 한데, 우리가 위패를 모실 기운이 나겠습니까?”
“내가 이 일은 황상께 고하여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소. 그러니 흥분을 가라앉히시오.”
“말씀드렸지만 이미 소인은 마음이 크게 상해버렸습니다.”
“허. 본부장. 일단 진정하시오. 나와 차분하게 다시 대화해봅시다.”
뇌호가 무능력해서 이렇게 착착 감기고 말리는 게 아니었다.
사실 이 문제는 역지사지라는 걸 해볼 필요가 있다.
만에 하나 북경의 거리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위패를 극진히 모시고 있다면 우리 사신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감격의 물결에 휘말려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도 남을 일이다.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상황에 취하게 될 것이다.
이건 역량과는 무관한 감성의 영역이니 말이다.
더욱이 이런 일이 본인의 외교적 업적으로 비롯한 것이라면 어떨까?
아주 좋아서 미치고 환장할 가능성이 100%다.
그런데 이걸 치우겠다고 하니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다.
물론, 내가 굳이 이 장면을 보여준 이유 정도는 알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너희는 뭔데?’라는 메시지라는 걸 눈치챌 수 없다면 조선 전담 외교관이 될 수도 없다.
아무리 감정에 복받치더라도 기본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되돌아보면 황상 폐하께서 크나큰 황은을 내리셨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오. 내가 본부장과 하나씩 다 상의하며, 문구 하나씩 정리하여 문서로 완성하지 않았소이까. 나는 우리의 열의를 잊을 수 없소.”
“예. 그렇습니다. 우리 조선은 군자의 나라로서 황상께서 내리신 ‘재조지은’을 잊지 않고자 이토록 열과 성을 당하여 충심을 보였습니다. 한데, 대국에서는 이를 짓밟았으니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건…….”
“과거 명나라 만력제는 우리 조선에 50만 석의 구휼미를 내밀었기에 재조지은을 얻었습니다. 황상 폐하께서도 약조하셨기에 우리는 쌀이 눈앞에 없더라도 먼저 재조지은을 부르짖고 있으니 어찌 충심이 아니겠습니까.”
“명에서 50만 석이나 지원했소……?”
아니, 그때 명나라는 암군의 치세에 허덕이며 망해갈 때였고, 너희는 천고일제라고 불리는 황제가 선정을 펼쳐서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잖아.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그나저나 이런 반응을 보니 대충 10만 석이나 주고 생색내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이건 정말 곤란한 일이다. 고작 10만 석이나 받고자 우리가 이 고생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
“되었습니다. 다 철거할 겁니다.”
“아.”
“예.”
“그, 내가 황도로 돌아가면 오늘 본 것을 상세하게 전할 것이외다.”
“…….”
“우리 대청이 어찌 명나라 만력제보다 못하겠소! 심지어 조선이 이렇게나 충심을 보이는데 말이오.”
이미 눈이 돌아간 뇌호는 마구마구 공약을 던졌다.
하지만 난 졸렬하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와야 오는 것이지요. 소인이 암살까지 당할 뻔했는데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는 대인을 어찌 믿겠습니까.”
“황상 폐하께 이 모든 걸 전할 것이오.”
“모든 게 어디부터 어디까지입니까.”
“양국의 우호를 해치는 불순한 무리를 일망타진할 것이외다.”
“드디어 대인께서 소인의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하하하! 내가 아니면 누가 본부장의 깊은 뜻을 알겠소이까.”
“하하하!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두만강으로 진출한 우리 상인에게도 이를 잘 전달하겠습니다.”
“본부장. 두만강 이북은 사정이 조금 다르오. 진정하시오.”
“허. 이건 또 무슨 말입니까.”
“내가 황상께 고하여 방편을 마련해볼 수 있소.”
두만강 이북은 전면 무역이 아니라 전처럼 제한된 무역으로 하자는 말이었다. 원래 시작은 다 이렇게 하는 것이었기에 나도 어물쩍 알아듣지 못한 시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만강 일대에 태조 폐하의 사당을 중심으로 한 성스러운 공간을 마련하며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조선의 충심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오.”
끝.
감독 이완, 주연 송시열, 조연 박세당.
장소 협찬 평양부 상인들.
모두 감사할 따름이다.
아. 뇌호도 주연이구나. 촬영 잘해놓고 서운하게 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