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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59화 (259/298)

259화 초심

각본, 연출, 배우 등 모든 조건이 완벽했으나 상대는 천년에 한 번 나오는 황제라고 불리는 강희제다. 우리의 기획과 열연이 사기로만 마무리될 수도 있다.

하지만,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누르하치의 위패를 보고 간 뇌호의 보고를 듣는다면 강희제도 조선의 ‘성의’는 기억할 것이다.

힘의 논리가 만든 형식상 위계였고, 제후였던 조선이 열과 성을 다하여 섬긴다는 건 강희제로서도 매력적인 상황이었으니 일을 크게 만들지 않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한마디로 지금 샴페인을 터트려도 탈이 날 일은 없다.

더욱이 완벽한 승리라고 불러도 전혀 문제가 없는 성과까지 도출했기에 중대본은 모처럼 훈풍이 돌았다. 그래서 나도 부채질을 해줬다.

“넘어갈 사람은 다 넘어가라고 하면 되오.”

“응당 그래야겠지요. 한데, 본부장. 내가 노파심에 묻는 것이오만, 다 넘어가자는 말이 원하는 상단을 다 넘어가게 하자는 말이 맞소?”

“허. 호판. 어찌 이렇게 손이 작소?”

“손이 작다니요? 무슨 말이오?”

“우리는 관민이 하나가 되어 압도적 승리를 일궈냈소. 그러한데 고작 상인만 넘어간다는 건 승리를 축소하는 것이니, 어찌 손이 작다고 하지 않을 수 있소이까.”

“…….”

“상인만이 아니라 원하는 이는 누구라도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이오. 아니, 생각해보시오. 두만강 이북에서 구할 물품이 어디 초피밖에 없소? 짐승을 사냥하러 포수(砲手)가 갈 수도 있고, 벌목하러 백성이 넘어갈 수도 있고, 인삼을 구하러 갈 수도 있다는 말이오. 아. 두만강 이북에 서원을 짓고 싶은 사대부가 있다면 양손을 들고 환영도 할 것이오. 의지만 있으면 누군들 갈 수 없겠소이까.”

“…….”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넘어가면 고을을 하나 꾸려도 될 것이외다. 혹시 청국에서 시비를 걸 수도 있으니 청 태조의 위패도 곳곳에 두면 될 것이오. 봉토 지역을 호령했던 영웅을 그리는 이들의 고을이라고 하면 어찌 탈이 생기겠소?”

훗날 청에서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할 때 물러서면 그만이다. 처음부터 영토 확장의 의지가 아니라, 그냥 경신 대기근을 대비할 동안 뭐라도 가져오는 게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다들 말이 없다.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왜 그러오?”

“내가 호판에게 묻고 싶은 말이외다. 왜 그러냐니요? 아니, 일전에 훈련도감도 보낼 수 있다고 하셨소. 그러한데 왜 사냥하는 사람이나 벌목하는 이들은 넘어갈 수 없소? 이는 국지전까지 감행하자고 부르짖었던 당시보다는 백 배는 더 온건하다고 생각하오만.”

“…….”

“아니, 왜 그렇게 쳐다보시오?”

막상 말하고 보니까 다들 날 정말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도 괴이한 것이 꼭 귀신을 본 사람들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느낌, 절대 낯설지 않았다. 아니, 오랜만이라고 해야 할까? 알 수 없는 만족감에 홀로 고개를 끄덕일 때, 긴장감이 잔뜩 담긴 윤선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암. 자네 혹시 요즘 보약 한 첩 달여 먹었나?”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지. 먹던 보약을 안 챙겨 드셨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게 자네와 나의 관계를 고려할 때 좋을 것 같네만.”

“……아니, 최근 자네가 다시 졸렬해졌기에 하는 말일세. 나는 진심으로 자네가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라고 있네.”

“음.”

“아니, 보게나. 정책을 새로 수립하여 제안할 수는 있네. 한데 조금 전에 자네의 언행은 누가 봐도 새로운 제안이 아니라, 일전의 일을 속에 담아뒀다가 꺼내는 모양새였네. 무려 국사를 말일세. 이는 분명 송시열이긴 한데, 내가 너무 당혹스러우니 아니라고 말해주겠나?”

“자네가 이상하군.”

“참으로 다행이군. 내가 이상하다고 하니.”

“아니, 나는 원래 졸렬하다네. 그런데 왜 졸렬하냐고 물으면 내가 뭐라고 하나? 이건 이러한데, 자네 끝나고 내게 시간을 좀 내주겠나? 아니, 내주게.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말일세.”

“…….”

윤선거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불안함이 내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동시에 잔잔한 파장이 중대본을 매섭게 후려치고 있었다. 이 혼란에서 흔들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나, 송시열이 유일했다.

그렇다면 응당 사람들을 진정시켜야 한다. 이것은 중대본의 본부장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내가 이번에 청국과 협상하면 크게 깨달은 게 있었소.”

“그게 무엇이오?”

“하면 되더라는 것이외다. 보시오. 이번에 우리는 얼마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소? 훈련도감과 사족이 대동단결하니 평양부 전체에 청 태조의 위패를 설치할 수 있었소. 백성들의 아주 훌륭하게 협조하였소. 준비 과정은 그야말로 찰나였소. 바로 이것이었소. 모두가 합심하니 청국을 상대로 협잡이 가능하더란 말이외다. 하면 된다는 중요한 교훈이 이보다 크게 와닿은 적이 없소.”

“……지금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허. 호판. 오늘따라 왜 이리 답답하시오? 만일, 조정의 관리였다면 이 일을 추진할 때 어찌 되었을 것 같소? 청 태조의 위패로 속이는 일에 열렬하게 동참했을 것 같소? 아니지요. 불평과 불만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터져 나왔을 것이외다. 나는 그들을 설득해야 할 것이며, 시간은 무한하게 허비되었을 것이며, 의주에서는 의주 목사가 무릎을 꿇어가며 뇌호의 발목을 잡으며 시간을 끌어야 했을 것이오. 준비가 끝날 때까지 말이외다. 아니,어쩌면 일이 중간에 아예 틀어졌을지도 모르오. 정예군인 훈련도감과 박세당이 꾸준하게 만나온 서북 지역의 사족이었기에 작금의 성과가 가능했다는 것이오.”

절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번 일은 합의를 거치는 과정이 생략되고 집행과 집행으로만 이뤄졌다. 그래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뇌호를 기가 막히게 속여 먹을 수 있었다.

“어디 이번의 일만 그러하겠소? 우리 관리들은 너무 나태하오. 아니, 그냥 다 문제요. 일전에 역병이 창궐하였을 때 제 안위를 위하여 파발을 수행하지 않겠다던 관리를 떠돌려 보시오. 또한, 사직을 운운하며 이 난세에 조정을 압박했던 이들도 있었소. 셀 수도 없는 참담한 일들이 우리 중대본의 발목을 잡았소. 내가 이번에 되돌아보며 확실하게 뉘우쳤소. 나는 대체 왜 그렇게 관리들의 편의를 봐줬는지 모르겠더라 이 말이오.”

“…….”

“해서, 나는 오늘부터 우리 관리들의 기강을 확실히 잡겠소. 그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씩 곱씹으면서 말이외다. 또한…….”

내 말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다시 돌아왔구나. 송시열.’ 이런 문장이 나타나는 것 같았다.

특히 변승업은 눈만 계속 껌뻑이며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졸렬한 송시열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했다.

물론, 지금 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진심을 가득 담고 있으니 말이다.

“다들 내 말을 이해해주시리 믿소.”

“……뜻대로 하시오.”

“물론이외다. 하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아. 미촌, 자네는 나 좀 보지.”

“우, 우암.”

“왜 부르나? 그냥 따라오게.”

윤선거는 오랜만에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이는 이대로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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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고 어지러운 세상이었기에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냥 일전에 나를 찾아와 단체로 항의했던 관리를 싹 다 불러 모았을 뿐이다.

아니구나. 정확하게는 사안별로 분류해서 불렀다. 송시열이라는 사람의 뇌는 당대 최고의 학자답게 용량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에 세밀하게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아나?”

“대감.”

“자네들 일전에 파발의 일을 수행하기 싫다고 사직을 운운했던 걸로 기억하네. 내 말이 맞나?”

“대감. 그 일은 이미 끝난 게 아니었습니까?”

“물론 끝난 일일세. 그런데 내가 요즘 계속 생각이 나는 걸 어찌하나? 자려고 누우면 바로 전날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라서 잠이 안 와.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

“……소인이 어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원인을 제공했는데 결과를 책임지지 않는 건 너무 무책임한 일이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내가 모든 걸 바로 잡을 생각이니 말일세.”

대화가 여기까지 이어지자 관리들의 얼굴이 아주 흐려졌다. 이들 역시 과거의 어느 날엔가 경험했던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혹시 소인이 어떤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인가? 벌을 왜 받나?”

“하면, 어찌 소인들을 부르셨는지요.”

“자네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눈을 부라리며 내게 항의했던 일을 잊지 않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네.”

“…….”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계속 생각이 나는지라 어쩔 수가 없다네. 머릿속에서 일부러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혼자 생각하자니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생각날 때마다 원인 제공자를 불러서 입에 담을 생각일세.”

정말로 나는 아무런 불이익도 주지 않았다. 전처럼 이름이나 학맥, 가문을 묻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너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내 말을 들은 이들의 얼굴이 울상이 된 건 전혀 알 바가 아니다.

“왜? 혹시 문제가 있나?”

“……대감. 그냥 벌을 받겠습니다.”

“허. 이 나라 조선이 언제 품계가 높다고 하여 임의로 처벌할 수 있었단 말인가. 자네가 지금 내게 법도를 어기라고 말하는 것인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꼴 보기 싫으니 썩 물러나게!”

“대, 대감.”

“어허!”

눈을 부라리며 일갈하자 사색이 된 관리들은 귀신을 본 것처럼 도망쳤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다음!”

오늘 나는 만나야 할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이미 겁을 쥐어 먹은 또 다른 무리가 들었다.

“고개 숙이지 말게. 나는 자네들의 얼굴을 봐야 하니까.”

“…….”

이번에도 특별한 일을 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냥 기억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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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까지 관리들과 정겨운 시간을 보냈으나 만나지 못한 이들이 아직도 많았다.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퇴청하는 길에, 익숙한 이가 몰래 나를 찾아왔다.

“대감.”

일전에 도성으로 소환한 백광현이었다.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죄지은 거 있나? 중대본에서 정식으로 소환했는데 왜 숨어다니나?”

“송구합니다. 우선 대감께 먼저 인사드리고 상황을 살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또, 고생을 했을 것이었으니 얼굴은 많이 상했는데 역시 눈빛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아니, 세상은 이런 걸 자신감이라고 불렀다.

신분의 위계를 가볍게 여길 정도의 압도적 자신감이었다. 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거목이란 바로 이와 같을 것이다.

즉, 해부학을 통하여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의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자네 태도가 불순하군.”

그냥 넘어갈 이유는 없다.

“예……?”

“성취를 이루었다고 하여 위계가 바뀌는 건 아니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송구합니다.”

“내 사가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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