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내일의 학파
백광현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앉았다.
하고 싶은 말이 참으로 많았을 건데, 만나자마자 내가 위계로 찍어 눌렀으니 표정은 참으로 어두웠다.
“자네의 활약은 이미 전해 들었네.”
“부끄럽습니다. 다만, 시일이 늦은 건 오는 길에 보이는 병자를 고쳐주느라 그리된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의원이 병자를 보느라 며칠 늦은 게 무슨 죄가 되겠는가. 자네, 나를 너무 빡빡한 사람으로 여기는 거 아닌가?”
“아,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리하겠습니다. 그저 작은 오해가 생길까 두려워 말씀드린 겁니다. 한데, 대감. 어찌하여 소인을 도성으로 부르셨습니까.”
백광현의 목소리에는 묘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중대본을 통하여 부르셨습니다. 혹시 소인이 다시 위생국으로 복귀하는 것입니까?”
“아닐세.”
“그렇습니까…….”
위생국은 현재 조선 의술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해부학을 집대성한 백광현은 다시 소속되어 활약하고 싶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무 자르듯 잘라버리니, 희망으로 밝아지던 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자네는 당분간 병자를 살필 필요가 없네.”
“대, 대감. 무슨 말씀입니까. 소인은 의원입니다. 어찌 병자를 멀리하라고 하십니까. 기회를 주십시오. 소인은 더 많은 병자를 살필 수 있습니다. 혹시 조금 전 소인의 행동이 무례하여 언짢으셨다면 다시 사죄드리겠습니다.”
“제자를 받게.”
“예……?”
제자를 키워내라는 말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해부학을 익힐 때 어떠한 경우라도 후대로 지식을 전할 수 없다며 경고했던 걸 잊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고, 생각도 달리하게 되었다.
의술로 살릴 수 있는 사람에 역량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백광현의 해부학을 익힌 의원‘들’의 등장은 천군만마다 다름이 없다. 해부학‘만’ 철저하게 숨긴다면 시도해볼 만한 일이었다.
또한, 이미 해부학은 집대성되었다.
더는 사람의 배를 가르지 않아도 될 것이니, 해부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리도 없다. 설령 누군가가 무언가를 눈치채더라도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다. 애초 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누가 우기겠는가. 내가 미친 듯 고함 지르며 우길 건데 말이다.
“자네가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라고 할지라도 혼자서 백 명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네. 그러니 제자를 받아서 최대한 많은 의원을 키워내게.”
“저, 정말입니까?”
“내가 자네와 농을 왜 하겠는가. 이 난세에 최대한 많은 의원을 육성할 길을 열어주는 것도 위정자의 책임일세. 나는 이를 행할 뿐이니, 더는 복잡한 생각을 하지는 말게.”
백광현은 정말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최고의 의술을 가지게 되었으나 후대로 전할 수 없다는 나의 경고가 참으로 큰 괴로움이었던 것 같다.
됐다. 이런 상념에 빠질 때가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최선의 판단을 할 뿐이다.
“승려 처능을 찾아가면 자네의 의술을 훈민정음으로 옮겨줄 것이네. 이를 잘 활용하여 가르치게. 지금부터 자네가 할 일은 바로 이것일세.”
“의, 의서까지 만들 수 있습니까? 진정 소인의 의술을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물론, 대놓고 해부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무, 물론입니다. 소인을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명심해야 할 것이 있네.”
“대감은 전혀 모르시는 일입니다. 모두 소인이 혼자 한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닐세. 됐네. 그냥 듣게. 당장 명의가 필요한 게 아닐세. 기본을 할 수 있는 의원 다수가 필요하다는 말이네.”
지금 필요한 건 기초 의료를 수행할 수 있는 의원이었다.
백 가지 병을 고치는 명의 한 명보다 평범한 의원 백 명이 더 절실했다.
특히, 지금 서원에서 진행하는 의술 교육은 그냥 백성이 대상이었다. 그들을 단기간에 명의로 만들어 낼 방법은 없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물론입니다. 이런 난세에는 한 명보다는 백 명이 더 중요하니 말입니다.”
“하면,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떠나게.”
“예. 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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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해가 떠올랐다.
오늘도 어김없이 우리 관리들과의 진한 면담이 잡혀 있었다.
우선 중대본에서 따뜻한 물을 한 잔 먹으며 하루를 준비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셨습니까.”
이른 시간이었으나 유형원은 중대본에 등청한 상태였다. 피곤한 안색과 검토하는 여러 문서의 양을 보니 본격적으로 변승업과 도시 개발을 논의할 시기가 된 것 같았다.
“좀 어떤가.”
“음. 막대한 재원이 투입될 건데, 이를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정리하는 게 어렵습니다.”
“자네라면 잘할 수 있을 것이네.”
“이런. 전혀 손을 대지 않겠다는 의지를 이렇게 표현하시는군요.”
“애초 내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데 어찌 함부로 나설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자네 제자인 담계 말일세.”
“소생의 제자는 왜 찾으십니까?”
유형원의 목소리에는 묘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납치라도 하는 줄 알겠다.
“출사하기보다는 산학을 더 익히는 건 어떻겠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대부에게 과거를 치르지 말라니요?”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이 난세가 끝나면 조선은 큰 변화를 맞이할 것이네. 그 변화의 공간에서 산학은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야. 이를 지금부터 준비하는 게 옳을 듯하여 권하는 것일세.”
지금은 모든 역량을 기근 극복에 투입하고 있다.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아예 쥐어짜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원래 가야 할 길이 있어도 중대본이 강력한 억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신 대기근이 끝나고 중대본의 억제력이 사라질 때, 억지로 눌러놓은 변화의 단초들은 맹렬하게 날뛰기 시작할 것이다.
이때 산학 아니 수학이라는 학문은 단지 조선의 변화가 아니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김서경의 능력이 지금도 일정 부분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쌀 한 톨이라도 더 구하는 게 지상 과제인 상황에서 큰 빛을 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아예 수학자로 양성하는 게 옳다는 결론이었다.
“이건 또 의외군요. 당연히 산학의 성장을 억제하실 줄 알았습니다. 산학의 발전은 성리학을 반드시 위협할 것이니 말입니다.”
수학의 중요성이라는 건 하나씩 열거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다. 조선의 발전 아니 진보가 이뤄지려면 고도로 발전한 수학은 무조건 필요했다.
양반 중심의 조선을 논외로 할지라도 말이다.
다만, 나와는 달리 분명한 조선 사람인 유형원이 산학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또 보아하니 처음 경계한 이유도 내가 김서경의 산학을 억제할까 봐 우려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 사람을 어찌 보고 이러는 걸까? 피식 웃으면서 한마디를 던져줬다.
“그건 자네가 옹졸해서 사람을 늘 꼬아 보기에 그런 것일세. 당장 산학의 지위가 낮더라도 언젠가는 크게 쓰일 것이네. 나는 이를 대비하고자 하는 걸세. 내 큰 뜻을 알았다면 그냥 고개나 끄덕이게.”
“…….”
“침묵은 긍정이라고 하였으니 동의했다고 생각하겠네. 담계는 자네 제자이니 알아서 잘 설득하게나. 하면, 나는 이만 가보겠네.”
“담계는 이번에 진행할 하삼도의 복구에 손을 보탤 겁니다.”
“응? 그건 무슨 말인가?”
“앉아서 계산만 하고자 산학이 필요한 게 아니지요.”
“좋은 생각일세.”
“이유를 묻지 않는군요.”
“알고 있는데 왜 묻나?”
유형원의 표정은 오묘해졌다.
“그렇습니까? 가끔 이럴 때 참으로 묘합니다. 누구보다도 성리학을 우선하는 대감께서 다른 학문의 성장에 이토록 열의가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과하게 머리를 들면 짓누르지 않습니까.”
“오해하지 말게. 지금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대책을 논의해야 하기에 모든 걸 강제할 뿐일세. 괜한 말이 길어졌군. 반계. 가장 중요한 건 산학의 응용이 아니라 산학 자체를 고도로 성장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절대 간과하지 말게. 산학이 성리학만큼 집대성되어 논의된다면 세상은 바뀔 것이니 말일세.”
“대감. 소생이 왜 담계에게 나랏일과 관련하여 여러 일을 제시하는 줄 아십니까.”
“묻지 말고 말하게.”
“재야에 은둔하여 순수하게 학문을 익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주 간단합니다. 재력이 없으면 낙향해서 서책에 파묻혀 산다는 게 불가능합니다. 이리할 수 있는 사대부라면 산학 따위에 시간을 사용하지도 않겠지요. 해서, 소생은 담계에게 산학으로 할 수 있는 여러 일을 제시하는 겁니다. 선택의 담계의 몫이지만, 최소한 생계의 어려움으로 포기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지요.”
하긴.
맞는 말이긴 하다.
돈이 없는데 어찌 수학 연구만 할 수 있겠는가.
김서경은 아직 재야에서 학문만 익힐 연배도 아니고 돈도 없다.
그런데 이게 또 어려운 일은 아니다.
“김서경 한 명을 먹여 살리지 못하겠나?”
“참으로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쉽긴 하지. 그러니 자네가 나서서 산학을 재주가 있는 사람을 몇 명 더 꾸리게. 담계까지 10명 정도면 적합하겠군. 그들의 생계를 보장해주고 학문을 익히라고 한다면 성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네. 아. 이참에 산학과 관련한 학파도 세우면 되겠군.”
“허……. 대감. 열 명이 열 명만 먹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식솔도 있으니 말입니다.”
“관리에게 내리는 녹봉을 추산하여서 내리면 될 것이네. 그래. 이렇게 하지. 괜한 곳에서 고생하게 하지 말고 산학 학파 하나 세우게.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네만.”
“좋습니다. 대신 그들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말을 꼭 지키셔야 할 겁니다.”
“물론일세.”
수학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행동 따위는 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조선에 필요한 건 만백성이 구구단을 익히는 세상이 아니라 소수가 인수분해를 능숙하게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호판 대감은 이를 아십니까.”
“모르지.”
“……하면, 어찌 될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괜히 사람을 모았다가 탈이 날까 우려되는군요.”
“내가 사재를 털어서 진행하는데 호판에게 왜 동의를 구하나?”
“예……?”
“이건 중대본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일세. 그러니 그냥 진행하게.”
유형원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의 말을 기다릴 때 외부에서 다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파발이군.”
“파발이군요.”
이제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파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또, 주로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할 때가 많아서 긴장하며 문을 쳐다봤다.
그리고
“대감!”
문이 열렸다.
“청국에서 사람을 보내왔는데, 구휼미가 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몇 석이나 된다고 하던가?!”
“무려 10만 석이라고 했습니다.”
“응?”
10만 석?
황제가 너무 쩨쩨하다.
순식간에 불타올랐는데 차게 식었다.
하지만
“대감. ‘1차’로 보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뒤에 더 있다고 한다.
아직은 알 수 없다.
나는 당장 말했다.
“의주 전역을 재조지은으로 가득 메워야겠네.”
청국 관리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