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진짜 황은(1)
10만 석이라고 했다.
이건 강희제가 우리를 시험대에 올린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어찌하는가에 따라서 10만 석으로 끝날 수도 있고, 50만 석이 될 수도 있으며, 100만 석까지 치고 올라갈 수도 있다.
한마디로 역량을 집중해야 할 비상사태라는 것이다.
송시열이 된 이후 지금처럼 긴장한 적이 없었다.
내가 이상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연출을 어찌하느냐에 따라서 수십만 석의 쌀을 ‘그냥’ 확보할 수 있으니, 바짝 긴장한 나의 심리 상태는 지극히 정상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나만 이런 게 아니었다.
중대본도 크게 술렁인 건 당연했고, 무엇보다.
-총력을 기울여 의주를 정비해야 할 것이외다.
무려 조선의 군왕께서 전격적인 어명을 내렸다.
내가 정말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어명을 내릴 때 이연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보다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번 연출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크고 대단한지 알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우리로서는 더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언제까지 목울대로 마른침을 넘기고, 심장만 벌렁거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앞뒤 다 잘라 먹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선 어떤 방법으로 의주를 청 태조의 ‘사당’으로 조형(造形)할 건지 정리해야 하오.”
건물에 누르하치의 위패 한 개 올려놓던 시절은 지났다. 더욱이 이 판은 엄청난 목돈이 걸려 있었기에 우리도 화끈하게 준비하는 게 옳았다. 그러니 의주 전체를 누르하치의 성지처럼 만들어 내는 게 옳았다.
“반발은 내가 알아서 정리할 것이오. 그러니 기탄없이 의견을 내주시오. 당연하겠으나 복잡한 논의나 의례는 뒤로 미루고 가장 크고 눈에 띄는 방법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외다.”
“본부장의 말이 참으로 지당하오.”
기탄없는 윤선도답게 역시 화끈했다.
“좋은 의견이 있다면 어서 말씀하시오.”
“우선 의주의 관청과 서원 그리고 향교까지, 조정과 밀접한 공간부터 청 태조의 것으로 뒤덮어야 하오.”
“좋소.”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파발을 준비하는 관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쳐다만 보고 있길래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뭐 하나? 일단 한 명 달려가게! 참으로 태평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군. 답답하도다.”
“본부장. 저 날렵한 이들을 불러야 하는 게 아니오?”
“안 그래도 후회하고 있소.”
논의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번에 전달하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전시에는 정해지는 것부터 바로바로 사람을 보내서 조금이라도 빨리 전달하는 게 옳다. 이토록 엄중한 시기에 인력을 아끼는 건 너무나도 우매한 짓이니 말이다.
“본부장.”
“오. 호판. 자네들은 뭐 하나? 당장 한 명 나와서 달려갈 준비를 하게!”
“모처럼 옳은 말을 했소. 어쨌든 일전에 청사 뇌호를 ‘희롱’할 때 평양부의 점포마다 위패를 두었다고 들었소. 하면, 의주에서도 이리해야 하는 게 아니겠소? 기본은 갖추는 게 원칙이니 말이외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시오! 허. 자네들 진정 이리할 건가? 당장 달려가게!”
“하나 더 있소.”
“갈 사람 가고, 다음 사람 앞으로 나오게!”
“만에 하나 청국 관리가 의주 이남으로 내려올 수도 있소. 세상일은 늘 변수가 발생하는 것이니 말이외다. 그러니 지척에 있는 군현에서는 철저하게 준비하는 게 좋을 듯하오.”
“참으로 좋은 의견이오! 자네들은 대체 뭐 하나! 이제 알아서 달려가게!”
“그리고…….”
“달려가게!”
어차피 우리의 목표는 오직 하나, 청국 관리의 눈에서 눈물을 빼는 것이었다. 이때 방법이라는 건 최대한 일을 키우는 것이었으니 거를 의견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냥 다 받아서 파발을 보내면 될 일이었다.
달려가는 이들도 고생이겠지만, 쉬지 않고 엄청난 의견을 대량으로 쏟아 낸 우리도 기진맥진이었다.
논의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옳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기에 남은 건 현장에서 얼마나 역동적으로 일을 도모하는가였다.
부디 승전고가 울리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문뜩 떠오른 놀라운 생각이 하나 있었다.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혹시…….”
나를 쳐다보던 대신들은 그대로 굳었다.
웃지도 않았고, 화도 내지 않았다.
그냥 무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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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썩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중화 질서에서 조선의 비중이 크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제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들의 진심과는 별개로 현실에서는 머리를 숙이고 있다. 감히 들지 못할 정도로 납작 엎드려서 말이다.
한데, 최근 너무나도 많은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어업 협정도 그러했고 10만 석의 구휼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늘과도 같은 황제의 황명을 감히 항거할 수 없기에 꾹 참고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시종일관 오만한 태도로 조선 의주 목사에게 10만 석의 구휼미를 인계하려던 청나라 관리의 눈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애써 참고는 있었으나 누가 가볍게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바로 눈물을 쏟아질 정도의 상황이었다.
천하제일의 대국, 대청의 관리로서 평생 살았으나 이토록 감격스러운 순간은 없었다.
심지어 심장을 뜨겁게 하는 이 광경을 대청의 강역이 아닌 제후국, 심지어 말만 공손하고 눈빛은 불순했던 이들의 나라, 조선에서 보고 있다.
“대인. 어떠십니까.”
“허…….”
“의주는 대국과 국경을 마주하는 곳입니다. 하여, 우리 전하께서는 친히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부디 대국에서 흡족하길 바랄 뿐입니다.”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감동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으면 나오려는 건 말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그러나 대국의 사신으로서 어찌 함부로 눈물을 보일 수가 있겠는가.
온 힘으로 꾹 참은 뒤 말을 꺼냈다.
“모든 점포에 우리 태조 폐하의 위패가 있는 것이오?”
“송구합니다. 작고 허름한 곳에서는 모실 수가 없게 했습니다. 우리 백성들은 격하게 항의하며 기어이 모시겠다고 했으나, 관리로서 어찌 함부로 행할 수 있겠습니까. 철저한 조사와 검토를 거친 뒤 자격이 되는 점포에만 모실 수 있게 했습니다.”
“허.”
그러니까 지금 청국 관리는 과거 뇌호가 평양부에서 본 장면을 의주에서 만나고 있었다.
의주 목사는 눈치껏 약간의 시간을 준 뒤 자연스레 이동을 권유했다.
“대인께서 보시고 혹시라도 부족한 점이 있다면 일러주십시오.”
“아니외다. 어찌 부족한 점이 있겠소이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대국의 사신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패악질을 보인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과장 좀 보태서 숨만 쉬어도 왜 살아 있냐고 시비를 거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런 지적도 없었고, 말도 없었다.
홀로 정신없이 감격에 빠져 있었다.
의주 목사는 속으로 비웃으며 청국 관리를 안내했다.
“의주에 있는 서원에 황상 폐하를 모셨습니다.”
“허. 서원이라고 하면 성현을 모시는 곳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상 전하께서 어명을 내리시어 관철했습니다.”
“허. 한데, 서원은 사족들의 소유라고 들었소.”
“대인. 백성도 저렇게 열성인데 어찌 사족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애초 일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사족의 노력도 있습니다. 아. 물론 대국의 위엄에 우리 백성이 크게 감격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게 가장 큰 사유이지요.”
“허…….”
“그런데 또 하나의 이유도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하하하. 직접 가서 확인하시지요.”
그렇게 제법 걸으니 서원이 보였는데
“…….”
미리 나와서 기다리던 이를 본 청국 관리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정말로 아무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고 감격스러워서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다가오더니
“오셨습니까. 오래 기다렸습니다.”
말을 건 사람이 변발이었다.
그는 방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소인은 조선에서 청 태조 폐하를 섬기는 이들의 수장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송구합니다. 조정에서 청 태조 폐하의 위패를 모시는 건 공무의 일입니다. 하지만 소인은 자발적으로 흠모하였기에 민간에서 따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감히 사사롭게 모셨기에 대국의 황상 폐하께서 노여워하신다면 달게 벌을 받겠으나, 그전까지는 최선을 다하여 신실하게 모실 겁니다.”
“이럴 수가…….”
“소인이 미흡하여 아직 조선 전역에 알리지 못했으나, 조정에서도 거들고 있으니 머지않아 크게 확장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대국의 동의를 얻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 대인을 뵙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언짢으신 건 아니시지요?”
“내가 어찌 그런 생각을 품겠소? 우리 태조 폐하를 이토록 진심으로 모시는데 내가 어찌 감히…….”
결국, 청국 관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지켜보던 의주 목사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서 먼 산을 쳐다봤다.
최선을 다하여 솟구치는 웃음을 잠재우고는 있으나, 혹시라도 실수하면 사달이 날 것이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반면, 변발인은 의연하게 대처하며 청국 관리의 손을 꽉 잡았다.
“대인께서 부족한 부분을 일러주십시오.”
청국 관리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물기를 아직 밀어내지 못한 탓이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래도 살펴봐 주십시오. 미리 기별하셨다면 더 잘 준비할 수 있었을 건데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도 큽니다. 급히 자리를 마련하여 초라할까 두렵습니다.”
“아니외다. 나는 오늘 조선에서…….”
애써 말하던 청국 관리는 다시 말을 멈췄다.
제대로 울컥한 듯싶었다.
“대인.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너무나도 괜찮소. 나는 오늘 조선에서 또 다른 천하를 보고 말았소.”
“대인…….”
“가슴이 벅차올라 도무지 참을 수가 없소.”
“대인…….”
“나는 오늘 너무나도 기쁘오.”
“대인께서 기뻐하시니 소인도 기쁩니다. 황상 폐하께서도 기쁘시겠지요?”
“당연하오. 이를 알게 되시면 기쁨을 감추지 않으실 것이외다.”
여전히 먼 산을 보며 귀로 대화를 듣던 의주 목사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본부장 송시열의 서찰은 미치지 않게 해 주었다.
-작은 실수라도 있으면 삼대가 출사하지 못할 것이네.
조선의 사대부로서 이보다 두려운 말은 없다.
그래서 계속 먼 산만 쳐다봤다.
절대 함께 떠들 자신은 없었으니 말이다.
“되돌아보면 대청은 우리 조선을 새로운 길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렇소?”
“진정 그러합니다. 200년간 우리는 명국으로부터 멸시당했으나 힘이 부족하여 감히 나서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대국이 우리 조선을 구제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재조지은이 아니면 무엇이 재조지은이겠습니까.”
“허.”
“소인, 아니, 우리 조선은 대청의 재조지은을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하여, 태조 폐하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소인이 조정에 청하여 크게 확장할 것입니다. 꼭 그리할 겁니다.”
“참으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오.”
청국 관리는 여전히 감격에 파묻혀 있었다.
“이런. 내가 아직 공이 누군지도 묻지 않았소.”
“송구합니다. 소인이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변발인은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박세당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