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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62화 (262/298)

262화 진짜 황은(2)

청국 관리는 마냥 허술하지 않았다.

감격은 감격이고 일은 일이었기에 박세당이 어떤 인물인지 세밀하게 조사했다.

무려 청 태조를 섬기겠다고 나선 인물인데 신원이 불분명하거나 미천한 신분이면 오히려 탈이 나기 때문이었다.

“대인. 조선에서 유명한 성리학자입니다.”

“심지어 중대본의 일원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의 분파가 여러 개인데 이 중 한 곳의 수장이라고 합니다.”

“사족에게 지대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신원이 너무 확실한 사람이었다.

아니, 생각하지도 못한 엄청난 거물이었다.

지금의 나이를 고려할 때 장차 조선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거물로 성장할 수도 있었다.

이보다 좋은 일은 없다.

황제가 박세당의 일을 전해 들으면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관운이 트여도 제대로 트인 게 분명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박세당과 같은 보물을 발견했다.

쭉쭉 뻗어 나갈 인생을 생각하니 청국 관리의 입은 꼬리가 귀에 걸릴 듯 찢어졌다.

그리고.

“대인.”

구휼미를 인계하는 곳까지 박세당이 찾아온 것이 아닌가.

안 그래도 떠나기 전 진득하게 대화를 또 나누고 싶었던 찰나였다.

언제봐도 박세당의 변발은 참으로 정겨웠다.

청국 관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격하게 반겼다.

“어서 오시오!”

“이리 반겨 주시니 소인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우리가 국적이 다를 뿐 마음은 늘 같은 곳에 있는데 어찌 반기지 않겠소이까.”

“소인, 오늘 또 크게 감격하여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하하하! 그렇소?”

청국 관리의 환대에 박세당의 미소는 진해져만 갔다.

송시열이 호언장담하긴 했으나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다.

당혹스러운 수준이 아니라 웃음을 참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실은 전날도 의주 목사가 시선을 돌리며 애써 웃음을 참는 게 너무 부러웠다.

하지만 맡은 역할이 막중하니, 어찌 부러워만 할 수 있겠는가.

“대인. 소인이 최근에 들은 정보가 있습니다.”

“정보라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중대본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대인께서 아시면 상당히 흥미로울 듯합니다.”

이미 박세당이 중대본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청국 관리의 내심 크게 기대하며 집중했다.

“무엇이오? 듣고 싶소.”

“황상 폐하께서 하해와 같은 황은으로 구휼미를 내리셨습니다.”

“그렇소. 이번에도 내가 10만 석을 가져왔소.”

“소인은 너무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대본의 대처가 상당히 놀랍습니다. 구휼미의 수량을 추산하여 의주에 큰 비석을 세울 듯합니다.”

“비석이라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황상 폐하께서 100만 석의 구휼미를 내린다는 소식이 굉장히 무서운 속도로 번졌기에 백성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이러한데 중대본에서 어찌 지켜만 보겠습니까. 또한, 우리 전하께서도 이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소인이 볼 때 능히 가능성이 있는 일입니다.”

“잠시, 잠시만 기다려보시오. 100만 석이라니? 내가 운송한 구휼미는 10만 석이외다. 물론 추가로 더 내리시긴 하겠지만…….”

“백성들이 100만 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100만이나 10만이나 엄청난 수량이니 말이 이렇게 번졌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인. 이미 번진 일입니다. 이를 정정한다면 민심은 크게 당황할 겁니다. 그리고 냉정하게 따져 볼 때 10만 석보다 100만 석이 더 많은 것이니, 우리 백성이 재조지은의 위력을 피부로 체감하기에는 더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도 깔끔하며,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청국 관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는 고개를 뒤늦게 느꼈다. 그러나 의문은 늘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한데, 조선 조정에서는 어찌하여 100만 석이라고 규정하여 비석을 세운다고 한 것이오?”

“100만 석이라는 여론이 번지니 조정에서 일단 대처한 게 아니겠습니까. 민심이 요구하니 말입니다. 물론, 처음 단서를 달았던 것처럼 어찌 될지는 소인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소……?”

“이런. 소인이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전하여 대인의 심기를 상하게 한 듯합니다. 송구합니다.”

“아. 아니외다.”

청국 관리의 표정이 제법 복잡했다.

그러나 박세당은 여기서 말을 더 보태지는 않았다.

추가적인 구휼미의 수량은 어차피 청국 황제의 영역이었다.

조선은 최대한 ‘성의’ 표시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청국 관리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길을 떠났다.

“고생하셨네.”

슬며시 다가온 의주 목사가 말을 걸었다.

박세당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참으로 즐거워 보이셨습니다.”

“험험. 의도한 게 아니었네. 하지만, 너무 웃기지 않은가.”

“소생이 웃기셨습니까. 아니면, 청사가 웃기셨던 겁니까.”

“미안하네. 실은 둘 다 웃겼네.”

“허.”

박세당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내 한숨을 쉬면서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은 어찌하여 난세를 열어 내게 변발까지 하게 하는 것인지…….”

“그래도 본부장 대감께서 자네를 딱 지목하셨네. 그만큼 자네를 크게 보시는 게 아니겠는가? 이는 곧 앞날이 보장된 것일세. 참으로 부러워.”

“……그렇게 생각하시면 직접 하셨어도 좋았을 겁니다만.”

“솔직히 자네가 아니면 누가 변발을 결의하겠나? 그리고 나는 의주 목사로 만족하네.”

“…….”

의주 목사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외쳤다.

“청국의 상인도 오가는 곳이다. 모두 긴장을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물론입니다.”

“수시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청국 상인들은 보고 들은 걸 모조리 보고할 것이다.

그들의 눈과 귀도 확실하게 속여야 한다.

어쩌면 그래서 박세당이 조선 최고의 중책을 맡은 걸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건 10만 석의 구휼미를 도성으로 운송하는 일이었다.

물론, 걱정하지는 않았다.

조선에는 운송에 가장 최적화된 집단이 있었다.

바로 훈련도감 말이다.

“아. 영감. 이를 또 잊었습니다.”

관리 한 명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봇짐 따위가 있었다.

일전에 구금되었던 청국 상인들의 것이었다.

당시 정세가 워낙 급했기에 상호 간에 제대로 챙기지는 못했다.

중요한 물품은 없는 듯했으나 죄인으로 압송된 이들의 물품이었기에 잘 보관했다가 넘겨줄 생각이었는데, 이번에도 예사롭지 않은 정국이었기에 미처 챙기지 못했다.

의주 목사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특별한 물품이 있었다고 했나?”

“은화나 몇 가지 문서 그리고 채소 같은 게 조금 있었습니다.”

“채소면 채소지, 채소 같은 건 또 뭔가.”

“상단주의 하인들이 들고 다니던 봇짐에 주로 있던 겁니다.”

관리가 봇짐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내밀었다.

의주 목사는 빤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동글동글한 게 풀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채소는 또 아닌 거 같았다.

그러니까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보게. 이게 뭔지 아나?”

근처 있던 박세당도 슬며시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소생도 처음 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대화를 계속해야겠나?”

“그건 아니지요.”

의주 목사가 들고 있던 걸 내밀며 말했다.

“물품은 따로 보관하고, 불필요한 건 모두 버리게.”

“예.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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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 관리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고 말았다.

군사 작전에 버금가는 우리의 노력은 절대 헛되지 않은 것이었다.

강희제가 추가로 90만 석으로 보낼지, 9만 석을 보낼지는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정말 형편없이 행동하면 우리도 하던 거 다 철회하면 된다.

사당은 무슨 얼어 죽을 사당이란 말인가.

위패도 다 불태워 버릴 것이다. 날씨도 추워지니 방한용으로 사용하면 딱 좋다.

하지만 세상 이치라는 건 원래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강희제처럼 총명한 사람이 이 간단한 세상의 원칙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열과 성을 다하여 구휼미를 달라고 요청한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구휼미가 올 때까지 현상 유지를 해야 했다.

우리는 쌀을 받을 동안 의주를 누르하치의 성지로 만들어야 할 역사적 의무가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박세당이 이토록 쉽게 결심할 줄은 몰랐소.”

헤어스타일의 자유가 없는 이 시절 사대부에게 변발하라는 건 엄청난 치욕이었다. 그러나 박세당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변발을 강행했다. 찬사를 받을 만한 실로 엄청난 결의라고 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오? 반발도 없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외다.”

“그만큼 난세의 극복에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아니겠소?”

우리는 변발령으로 분노한 사대부가 청사 뇌호를 죽일 기세로 압박했던 과거를 잊지 않고 있었다. 물론 치밀한 정략으로 진행된 사안이었으나, 기저(基底)에 깔린 건 명백하게 변발령에 대한 분노였다.

이번 사안이 아무리 사기를 치는 것이며 박세당만 변발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 시절 조선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상황을 고려하면 파급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북 지역 사족은 특별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만일 이들이 반발했다면 일은 상당히 복잡해졌을지도 몰랐다. 우리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박세당의 변발이 곧 구휼미라는 공식이 대입되었기에 무탈하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컸다.

이는 곧 지독한 난세를 겪으면서 그들의 인식이 유연해졌고,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또한, 그간 서북 지역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박세당의 노력에 대한 결실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일단 10만 석을 적립했다.

다들 엷은 미소를 지으면 의주의 일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본부장. 장계가 올라왔는데 동해안의 어류를 서북 지역으로 운송 완료하였다고 하오.”

소금에 절인 생선이 드디어 임자를 찾아갔다고 한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정말 큰일이었다.

1. 남해에 있는 소금을 동해로 보낸다.

2. 동해에서 포획한 엄청난 수량의 어류를 소금에 절인다.

3. 도성에서 출발한 수레 부대가 소금에 절인 어류를 서북면으로 운송한다.

사실상 조선 전역을 오갈 수 있는 기근 대비 인프라를 구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정말과 절망만 가득하던 세상에 작은 빛이 하나씩 퍼즐 맞춰지듯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세상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소생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영감. 안 그렇소?”

유형원이 운을 던지자, 변승업이 죽는 표정을 했다.

안 들어도 사정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선 최고의 거부를 등에 업은 유형원이 평생의 한을 풀듯 엄청난 토목 공사를 입안했을 것이다.

“끙. 대감들께서 좀 만류해 주십시오. 이대로라면 소인은 폭삭 망할 것 같습니다.”

“허. 영감께서요? 엄살이 심하시오.”

“선생…….”

다들 그냥 웃었다.

“아니, 정말 하늘에서 돈이 떨어져야 가능할 것인데…….”

“하하하. 이 사람아. 하늘에서 쌀이 떨어져야지.”

“하하하!”

“하하하!”

모두 크게 웃었다.

그나저나 쌀이 아니라도 좋으니 정말 하늘에서 식량이라도 떨어지면 좋겠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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