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폭풍전야(3)
박세당은 최근 심사가 심각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이 모든 불편한 감정을 감당하는 의주 목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영감. 기어이 이러실 겁니까.”
“아니…….”
“참으로 너무하시는군요. 됐습니다. 소생은 가겠습니다.”
“허. 이보게. 내 말을 좀 들어보게.”
의주 목사는 당황하며 박세당을 붙잡았다.
이마를 차지한 진땀을 닦으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검증할 수 없는 작물일세. 중대본에 전하여 재배를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네.”
“검증은 청국의 상인들이 했습니다. 청나라에서는 재배해서 잘 먹고 있다는데, 우리는 왜 안 합니까?”
“나도 알지만…….”
“물론, 목민관으로서 역할이 뚜렷하게 규정되어 있으니 고민하시는 건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난세에 구황작물로 성장할 수 있는 ‘원서’를 방치하는 건 그야말로 직무 유기입니다.”
청국 죄인들의 봇짐에서 발견되었던 건 원서라는 작물이었다.
오가는 청국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쉽게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라고 했다. 박세당은 듣자마자 하루라도 빨리 재배에 나서자고 했으나 의주 목사가 절차를 내세우니 답답했다.
“아니, 소생이 알아보니 원서는 그냥 심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걸 왜 안 합니까. 게다가 이미 조정에서도 목민관의 판단을 가장 우선한다고 했습니다. 한데, 어찌 이러십니까.”
“나도 사정이라는 게 있지 않겠나.”
“소생의 머리카락은 사정이 없었습니까?”
“끙…….”
그랬다.
의주 목사가 박세당의 말에 반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건, 바로 압도적인 ‘변발’의 위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로서 변발하는 건 죽기보다 싫은 것이며, 역사에 남은 치욕일지도 모른다. 죽음으로서 종묘와 사직을 사수하는 것보다 더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토록 엄청난 결의를 한 박세당이었기에 한마디 말은 천금이었고, 위상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었다.
이러하니 의주 목사라고 할지라도 박세당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재배하고 장계도 올리면 됩니다. 장계를 올리실 때 소생의 이름 석 자를 꼭 적으십시오.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
“만일 반대하면 소생에게 꼭 알려주십시오. 도성으로 달려가서 강력하게 항의할 겁니다.”
“끙.”
“영감. 고작 작물에 불과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휴. 알겠네. 자네 말대로 하겠네. 자네 말대로 고작 작물 하나일 뿐인데 탈이 있겠는가?”
“하하하.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답하시니 소생은 한시름 놓았습니다.”
박세당은 환하게 웃었다.
유독 이마가 빛났다.
의주 목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조선에서 자네의 말을 거절하거나 반대 의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네. 내가 장담하는데, 주상전하라고 할지라도 동의하실 것이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영감께서도 함께하시지요.”
“나는 가늘고 길게 가겠네.”
“아쉽군요. 그러나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라도 말씀하십시오.”
“하하하. 그냥 죽겠네. 그나저나 청국 황제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박세당의 이마 주름은 강렬하게 일그러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소생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10만 석이라니요.”
“그래도 자네가 계속 고생하게. 저번에 온 사람이 또 온다고 하니까.”
“그 사람은 정말…….”
박세당은 한숨만 쉴 뿐이었다.
조만간 다시 청 태조의 신도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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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의 헌신적인 변발이 만든 영향일까?
압록강을 넘는 조선 상인들의 표정에는 전처럼 긴장감이 감돌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함마저 느껴졌다.
반면, 의주로 들어서는 청국 상인들은 무언가 불안한지 연신 눈치를 살폈다.
함께 국경을 넘은 사람에게 속닥거리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뭘 하면 안 된다고 했나?”
“위패를 모신 점포가 있을 것이네. 보이면 눈을 피하고 고개를 숙여야 해.”
“끙. 그걸 어찌 다 확인하나?”
“그러면 그냥 계속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지.”
“미치겠군. 조선에 우리 거점을 만들려고 했는데 눈치나 살피는 꼴이라니.”
“별수 없네. 저번에 위패를 함부로 대한 상인들의 목이 날아갔다지 않나. 조선에서는 수틀리면 잡아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으니 우리가 알아서 조심해야지.”
병력까지 동원했던 조선의 강경책을 모르는 청국 상인은 없었다.
더욱이 청국 태조의 위패를 명분으로 앞세웠기에 항변할 수도 없었다.
“휴. 이렇게 몸 사려야 하면 차라리 장사를 접는 게 낫지 않나?”
“자네는 그냥 말을 하지 말게.”
“또 왜 그러나?”
“빡빡하긴 하지만 기반만 잘 닦으면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는 게 조선의 사정일세. 게다가 패악질만 안 하면 탈이 없는데, 몸을 사릴 게 뭐가 있나? 자네는 돌아가게. 나는 죽어도 조선 땅에서 죽을 것이네.”
누군가의 말처럼 조선은 정착만 할 수 있다면 엄청난 부를 확보할 수 있는 나라였다. 청국 상인들이 볼 때 조선의 상권은 거의 무주공산이었다. 잘만 침투한다면 일국 혹은 한 지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단으로 거듭날 수가 있다. 이리되면 조선의 물산을 직접 구하여 본토인 청국에 넘길 수 있으니 막대한 부를 가질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규제라는 것도 상업 행위를 막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패악질’을 못하게 하는 수준이었으니 심각하게 불편한 건 아니었다.
“알겠네. 알겠어. 내가 실언했네. 조선 땅에서는 자네 뒤만 따라다닐 것이니 잘 좀 가르쳐주게.”
“하면, 잘 듣게. 조선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있네. 우리 관리도 그에게는 말을 못하니까.”
“조심까지 해야 하나? 아. 실언했네. 그래. 그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조선에는 태조 폐하를 섬기는 집단이 있네. 바로 그곳의 수장일세.”
“허.”
“우리 관리들도 그의 눈치를 살핀다고 하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
“소문에 의하면 황상 폐하와 서찰도 주고받는 사이라고 하네.”
“이런. 정말 조심해야겠군. 한데, 생김새나 이런 걸 아는 게 있나?”
“물론일세. 그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에 확 띄는 조선인이 나타났다.
청국 상인들의 시선이 한 번에 이동했다.
“변발이군.”
“변발일세.”
당연하겠으나 박세당이었다.
어느새 청국 상인들도 조심해야 할 위치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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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편히 거닐었다.
옆에서 함께 걷는 사람이 조선의 왕이었으나 편했다.
아니, 이연과 함께 걸어서 편안한지도 모르겠다.
“본부장. 박세당이 장계를 올렸다고 하오.”
“전하. 다른 사람도 아닌 박세당이옵니다. 어찌 청을 거절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런. 내용을 듣지도 않는 것이오?”
“신은 늘 그의 변발을 떠올릴 뿐이옵니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의 말이라면 다 들어줘야지요.”
“하하하. 그러하옵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이연이라고 할지라도 변발을 감행한 박세당을 감히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조선에서 두 발로 살아가는 이들 중 누구도 할 수 없는 최고의 결의를 보인 사대부가 아니었던가. 응당 왕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나는 짓궂게 웃으면서 말했다.
“듣자니 아주 잘 어울린다고 하옵니다.”
“큭. 그건 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이참에 박세당을 차기 예조판서로 내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옵니다.”
“하하하! 묘안이오. 그야말로 묘안이오.”
주거니 받거니 박세당을 이야기하며 떠들었다.
참으로 마음이 포근하고 좋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이연도 마음이 가벼운 듯 보였다.
차가운 겨울바람도 우리 주변을 감싼 훈풍을 어찌하지는 못하였다.
“몇 개 상단이 조를 나눠 두만강을 넘었사옵니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소?”
“감히 예단할 수는 없사오나 탈은 없을 것 같사옵니다.”
“그 말은 결국 초피를 잘 구해올 수 있다는 말이구려. 거는 기대가 무척이나 크오.”
“하온데, 전하. 실은 인삼을 구하러 넘어간 백성도 있사옵니다.”
“하하하. 우리 백성들이 참으로 훌륭하오.”
자고로 기회가 왔으면 최선을 다하는 게 세상의 법도인 법이다.
넘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가져올 수 있는 건 다 가져오는 게 맞다.
대가는 안 내면 좋은 것이며, 보이는 게 있으면 무조건 챙겨와야 한다.
우리는 절박하니까.
“방한 대책은 좀 어떻소?”
“도성은 땔감과 석탄을 넉넉하게 비축했사옵니다. 군현마다 최대한 확보하라고 여러 차례 연락을 취했고, 장계에 의하면 잘 수행되고 있사옵니다.”
“음. 그게 다요?”
“복구해야 할 민가는 모두 온돌을 설치했사옵니다. 또한, 관청에서도 온돌방을 마련하였사옵니다. 하옵고, 양잠업을 크게 일으켰으니 큰 도움이 될 듯하옵니다.”
“추위로 죽는 백성은 없어야 할 것이외다.”
“신들이 죽을 각오로 방한 대책을 수립하고 집행하고 있사옵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가뭄, 홍수, 역병, 병충해 등등 종류도 다양하고 위력도 엄청난 재앙 중에서 지금 우리가 손에 잡히는 수준으로 방비할 수 있는 건 역시 추위였다.
실제로 효과가 얼마나 있는지를 떠나서 대책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었다.
“위생도 크게 보급되었다고 들었소.”
“하하하. 무당들이 참으로 노력했사옵니다.”
“늘 배척하던 무리였는데 이렇게 공을 세우다니 놀랍소.”
“난세를 평정하신 뒤 그들을 크게 치하하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물론이외다. 내가 그들을 궐로 다 불러서 직접 치하할 것이오.”
양반의 백 마디보다 무당의 한마디가 더 강력했다.
그래서 영험한 무당이 있는 고을은 위생이 굉장한 속도로 자리 잡았다.
참으로 바람직하였다.
“역시 구휼미가 가장 어렵구려.”
과거 태종 시절 전국의 비축곡이 400만 석이었다.
작금의 조선은 이 시절과 비교하고 있었으니, 중대본 수립 전후를 떠올리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었다.
“하하하. 내가 욕심이 과하긴 하오. 그래도 무역이 시작되면서 관세로 참으로 많은 쌀을 확보하고 있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 기어이 천만 석의 비축곡을 가질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소이까.”
1년 그리고 2년이라.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밤하늘이었는데도 참으로 맑았다,
어두웠으나 참으로 맑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맑았다.
너무나도.
“전하.”
나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여전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부장. 왜 그러시오?”
내 태도에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을까?
이연의 목소리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신은 오늘의 하늘을 잊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본부장……?”
“오늘이 기유년(1669년)의 마지막 날이옵니다.”
“…….”
이 평화, 이 고요함.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하여,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잊지 않을 것이다.
이 끝에 과연 우리는 아니, 나는 조선을 노래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기에 오늘의 밤하늘을 눈동자에 다시 담았다.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하하하. 나 역시 잊지 않을 것이외다.”
이연의 호탕한 웃음도 다시 들을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으니 말이다.
이 나라, 조선을 노래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