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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67화 (267/298)

267화 우리는 절대 만만하지 않다

지난날, 하늘이 쏟아낸 폭우는 인간이 만든 모든 걸 비웃으며 삼켰다.

거대한 절망이 이 땅을 지배했다.

그러나 인간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삶의 터전을 꾸렸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터전이었다.

관청이 지도했고, 승려가 거들었으며, 사족도 보탰다.

백성들은 폭우의 끔찍함을 잊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바라보며 내일을 기약했다.

풍요로움을 꿈꾸었고, 평온한 하루를 기대했다.

아니, 평범하기만을 간절하게 바라였다.

그러나

“…….”

“…….”

“…….”

“…….”

기어이 오늘이 된 내일은 참혹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하늘이 만든 재앙의 상처를 막 씻어 내려가려고 할 때 땅이 노하였다.

경험하지 못한 지진은 총력을 기울여 재건한 터전을 모조리 무너뜨렸다.

바라만 봐도 흥겹게 노래하며, 입가에 미소를 감돌게 했던 고을의 풍경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조리 흙이 되어 두 발로 선 모든 이를 비웃었고, 한 명도 예외 없이 주저앉게 했다.

순식간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며,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입증했다.

너무나도 손쉽게.

백성들은 아연실색하여 다시 무너진 삶의 터전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사지를 움직일 수는 있었으나 이미 의지를 상실했기에 주저앉아 있기만 했다.

울었으나 눈물은 없었고, 소리를 질렀으나 조용했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으나 멀쩡하게 움직였다.

“내가…….”

쇠를 긁는 듯한 누군가의 말이었다.

“가장 괴로운 건 아직도 숨은 쉬고 있다는 사실일세.”

“…….”

“차라리 죽었으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게 아닌가.”

“…….”

“그런데 내가 내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어서 살아 있는 걸세. 이게 너무 괴로워. 너무 지옥 같아.”

나지막했으나 거대한 울렁임을 동반했다.

“살아남아버렸어.”

“또 살아야 하나……?”

“큭. 또, 살아남았으니까.”

“왜 하필 내가 살아남은 걸까?”

“선비들이 늘 그러지 않던가. 평소 덕을 쌓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큭……. 덕을 쌓을 시간이 없었지. 그래서 벌을 받았나 보군.”

“그래. 그래서 우리가 살아버린 걸세.”

백성들의 대화는 생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건조했다.

윤증은 이를 지켜만 보았다.

백성들의 대화를 끊지 않았고, 막지 않았으며, 들을 뿐이었다.

“선생.”

성균관 유생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백성을 다독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대로 두면 좌절만 할 뿐입니다. 일으켜서 다시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합니다.”

“아닐세.”

“선생…….”

“하늘과 땅이 힘을 보태어 백성을 이토록 괴롭히고 있네. 누구도 막지 못한 재앙일세. 백성에게도 우리에게도 선택권은 없지 않았나? 이러한데, 백성이 좌절에 빠져 슬퍼할 정도의 권한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

“그러니 그냥 두게.”

윤증은 붉어진 눈동자를 애써 숨기고자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물기마저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선생. 그러면 해괴제는 어찌 준비하실 겁니까.”

“작금의 난세는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닐세. 물론,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서 해괴제를 지내는 건 법도이지만, 다시 지진이 발생한다면 민심의 동요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부터 재건은 우리가 먼저 시작하지. 때가 되면 다시 내일을 그린 백성들이 나설 것이네. 삶이란 이러한 것이니 말일세.”

“그리하겠습니다.”

윤증이 걸었고, 성균관의 유생들이 뒤를 따랐다.

백성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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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뿌연 잿가루로 가득했다.

태양의 강렬한 빛도 잿가루를 뚫지 못하여 천지가 어두웠다.

중화에서 하늘이 사라진 것이다.

원래도 추운 계절에 햇빛까지 접근하지 못했으니 극심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평안도 중화는 더웠다.

아니, 뜨거웠다.

실제로 뜨거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백성들은 세상이 너무 뜨거웠다.

추위를 감당하지 못한 백성들이 무질서하게 불을 피워 거센 화마가 자라난 탓이었다. 난리 통에 관리까지 대부분 죽은 현재로서는 이를 제압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 화마의 기세를 고려할 때 어디까지 번질지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불을 피하여 화를 면하긴 했으나 절망적인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아니, 바뀌고 있었다.

그저 더 절망적으로 바뀌고 있을 뿐이었다.

“흐…….”

“흐흐…….”

하늘도 보이지 않고, 오직 화마만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눈으로 절망이 지배하는 현실을 바라보던 백성들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저 실성해버린 수십 명의 백성 중 누군가가 운을 던졌다.

그 내용은

“살아버렸네.”

자책과 회한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네만 그런 줄 아나? 나도 살아버렸어.”

“흑……. 이럴 줄 알았으면 땔감을 받으러 갈 때 내가 갔어야 했어. 아들놈 보냈는데…….”

“……나도 숨을 쉬는 매 순간 그 생각만 하고 있네. 처자식이 다 죽었네. 하늘이 노해서. 내가 살아버렸네.”

하늘이 죽였다.

그러나 선택이 존재했던 죽음이었다.

[내가 갔다면]

이 말은 식솔을 먼저 보내고 살아남은 모든 이의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산자로서의 용기는 너무나도 버거운 것이었다.

“죽을까?……?”

“이제라도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불에 타서 죽으면 많이 아프겠지?”

“숨 쉬는 게 더 아플 것이네.”

억지로 살아 보려던 이들을 압박하는 거대한 화마는 생존의 의지를 완전히 박탈했다.

그래서 용기가 생겼다.

죽겠다는 용기가 아니었다.

그저 이제는 살지 않을 용기였다.

그래서 화마로 몸을 던지지는 않았으나, 다가오는 화마를 피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곳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내고자 할 뿐이었다.

산다는 것은 이들에게 더 이상 빛이 아니었으며, 내일이 다가온다는 건 희망의 증표가 아니었기에 그러했다.

점차 화마가 다가왔다.

삶의 마지막, 아니, 죽음의 시작이 다가왔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그때였다.

“지금 뭐 하는 것인가!”

화마를 밀어내는 호통이 들렸다.

백성들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수백 명의 병졸을 대동한 훈련대장 이완이었다.

그는 매섭게 백성들에게 일갈했다.

“죽을 각오가 있다면 살아야 할 것이다.”

“죽을 각오가 있는 게 아니라, 살 각오가 없는 겁니다.”

“그래도 살게.”

“평생 시키는 것만 했습니다. 이것만이라도 소인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불가.”

이완은 여전히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누구 마음대로 목숨을 선택하는가? 너희에게 그럴 권한은 없네.”

“어째서 그렇습니까. 이제 죽음과 만나고 싶습니다.”

“어명일세.”

“…….”

“전하께서 살라고 하셨으니 살아야 할 것이네.”

“…….”

“전하께서 성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죽게.”

작금의 군왕을 누가 성군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백성들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화마로부터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완은 좌우를 돌아보며 외쳤다.

“자네들은 무엇 하는가! 서둘러 백성을 대피시키게!”

그리고 다시 외쳤다.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화마를 제압하라! 그리하여 백성에게 숨을 쉴 수 있게 하라!”

이 또한

“이 또한 어명이니라!”

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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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중화를 맹렬하게 타격한 운석은 평양, 용강, 삼화, 함종, 강도 등 인근 지역에서도 목격됐다. 그러니까 평안도 전체가 술렁였다.

적극적인 대처라는 건 존재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고, 땅이 갈라지는 지진을 적극적으로 막을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평양부와 훈련도감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서 중화의 혼란을 최대한 빠르게 수습했다는 것이었다. 전처럼 조정에 보고하고 결과를 기다렸던 경직된 시스템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충격이 쉽사리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중대본의 여러 인사도 무슨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왜?

한 가지의 가정이 우리를 너무나도 두렵게 했기 때문이었다.

“본부장.”

허적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의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렸다.

심리적 동요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었다.

“만일, 화괴가 도성에 내렸다면 어찌 되었을 것 같소……?”

“…….”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조선은 역사를 마감할 것이다.

민심도 걷잡을 수 없을 수준으로 동요했을 것이다.

왜?

왕과 사대부들이 하늘의 심판을 받고 한순간에 죽은 것이었으니까.

이러니…… 아니, 됐다.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나의 등장으로 아무리 역사가 바뀌었다고 할지라도,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현상까지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호판. 진정하시오.”

“…….”

“아니, 모두 진정하시오.”

“…….”

애써 다독였으나 동요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이를 지켜보니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중대본을 이끄는 인사들조차 이 정도인데 민심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러니 이들을 탓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들 역시 이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에 불과하다. 나는 도성에 운석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애써 태연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백성의 동요를 막아야 하오.”

“일국의 대신인 나조차도 이렇게 두렵소. 한데, 백성은 어떻겠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효과가 없더라도, 무당의 굿이 무의미하더라도 민심을 진정시킬 수 있다면 뭐라도 해야 하오.”

이들은 나의 섣부르고 설익은 생각과는 다른 ‘거인’이었다.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도성은…….”

“대감!”

문이 털컥 열렸다.

불안함에 고개를 돌렸는데 파발이 아니었다.

중대본에서 실무를 보는 관리였다.

그러니까 도성에 소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관복에……

“도, 도성에 팥만 한 우박이 내리고 있습니다.”

재앙이 묻어 있었다.

도성에도 드디어 재해가 시작됐다.

그리고 또 다른 관리가 들어왔다.

“대, 대감. 조금 전부터 눈과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 시절 날씨가 이렇다는 건 1년 농사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우박 그리고 눈은 냉해로 직결되는 것이니까.

입술을 잘게 깨물며 허적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은 곧장 나가서 도성 안팎의 모든 관리를 동원하게. 품계에 무관하게 문무백관을 모조리 불러 모아내야 할 것이네. 또한, 서얼, 승려 그리고 향리까지 총동원하여 민심을 다독이게. 만약 응하지 않으면 바로 하옥시키게.”

운석과 지진은 우리가 도무지 무언가를 할 방법이 없었다.

인간이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자연의 횡포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냉해는 아니었다.

냉해를 막을 수는 없지만, 냉해로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건 막을 수 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말을 이었다.

“백성에게 이르게. 농사가 망해도 좌절하지 말라고. 조정에서 무조건 구휼미를 내릴 것이네. 그러니 절대로 울부짖지 말라고 전하게.”

내가 시작이었다.

“손발이 가려우면 즉시 위생국을 찾으라고 하게.”

“절대 추위에 노출되지 않아야 할 것이네.”

“날씨가 추우면 관아를 찾아 땔감을 받아 가라고 하게.”

……

“더 버티기 힘들면 사대부가의 문을 두드리라고 하게.”

“괜히 논밭으로 달려가서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전해야 할 것이네.”

돌아가면서 일제히 방침을 하달했다.

그리고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내가 사재라도 털겠다고 전해주시오.”

변승업이 쐐기를 박았다.

모두 피식 웃었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유형원을 바라봤다.

“반계. 되겠는가.”

“쉽지는 않지만, 현재 무역 수준이라면 어렵지만 해볼 만합니다. 단, 재해가 이 정도 수준이라는 전제하에서입니다.”

변승업을 쳐다봤다.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했다.

“조선팔도의 모든 군현에 사람을 보내게.”

지금부터 조선은

“조정으로 한 톨의 조세도 올리지 않아도 될 것이네.”

총력전에 돌입한다.

도성은 도성이 자력으로 생존할 것이다.

그러니 군현에서는 모든 수익을 구휼에 동원하면 될 일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재해를 대비할 것이며, 한 톨도 아끼지 말고 백성을 구제하라고 하게.”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절대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아니, 조선이 절대 만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걸.

아니……. 우리의 시간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줄 것이다.

역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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