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바람 한 점 없어도(2)
윤증은 이를 악물었다.
하늘이 이보다 무심할 수는 없다.
세상이 이렇게 처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들까지 이럴 수는 없었다.
윤증의 눈동자에는 살기까지 감돌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사가를 개방할 수 없소.”
“…….”
“유사시에 사가를 개방하는 건 알고 있지만 병자들에게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외다. 심지어 역병에 걸린 이들이오.”
“말.”
윤증은 사족들을 벌레 보듯 노려봤다.
“함부로 하지 마시오.”
“뭐요……?”
“병자가 아니라 병자의 식솔들이오. 지진으로 거처가 무너져 거리에 내앉은 백성들이외다.”
“역병이 옮겨지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하오?”
“하……. 말이 안 통하는 인사들이로다.”
“이보시오!”
양측의 갈등이 격해지자 현령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진땀을 흘리며 중재하려고 했으나 윤증에게 밀려 나서지 못했다.
“하. 사대부라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 책임감이 없소?”
“사사로운 사가의 일이오. 책임감이 언급될 일이 아니외다. 또한, 선생께서 무슨 자격으로 왈가불가하시오? 과한 간섭이오.”
“하면, 간섭하리다. 분명하게 말하겠소. 개방해야 할 것이외다. 이는 마지막 경고요.”
“허. 지금껏 보인 행동도 과하게 무례하셨소, 더는 참기 어렵소.”
사족들이 발끈했다.
그러나 윤증은 이죽거리며 노려보다가 곁을 지키던 유생에게 말했다.
“이보게.”
“예. 선생.”
“지금 당장 도성에 서찰을 보내게.”
“어떤 분께 보내면 되겠습니까.”
“한 통은 내 아버님, 그리고 한 통은 스승님께 보내면 될 것이네.”
분위기가 묘해졌다.
윤증이 사족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저들의 이름을 한 명도 빠지지 말고 적게. 내가 이 자리에서 다짐하지. 기어이 저들의 친인척은 물론이거니와 사돈의 팔촌까지 삭탈관직할 것이며, 영원히 도성에서 비웃음을 받게 할 것이네.”
조선의 사대부가 사대부에게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겁박이었다.
혈연으로 연결된 모든 이의 관직 생활을 끊어버리겠다는 서슬 퍼런 말에 사족은 크게 동요했다. 그러나 윤증은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늘 나는 분명한 선례를 남길 것일세. 나 윤증은 충분히 그리할 수 있는 혈연과 학연 그리고 지연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리면서 말일세.”
“서, 선생.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이, 일단 진정하시오.”
“우리와 다시 대화해보는 건 어떻겠소?”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사족들은 황급히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노여움이 하늘까지 치솟은 윤증은 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또한, 인근의 모든 군현의 실태를 파악하게. 만일 사가를 개방하지 않는 사족이 있다면 모든 명단을 내게 가져오게. 내 죽을 때까지 그들의 친인척을 탄핵할 것이며 기어이 관복을 벗길 것이네. 그들의 후손이 과거를 응시하면 평생 조롱할 것이며 역사에 기록을 남길 것일세.”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비웃음을 살 내용이었다.
그러나 윤증은 아니었다.
그는 윤선거의 아들이자 송시열의 제자이며 이연의 신뢰를 받는 실학파의 수장이었다.
가히 조선의 모든 학연, 지연, 혈연이 결합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바로 윤증이었다. 조선에서 그의 말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이연과 중대본의 대신들 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 있는 사족들은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은 현실에서 와닿는 강렬한 힘이었으니까.
사족들은 뒤늦게 상황 파악을 끝내고 황급히 나섰다.
그러나 윤증은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등을 돌렸다.
“현령께서는 즉시 백성을 구제할 방편을 마련하세요. 분명히 명심하세요. 단 한 명의 백성도 군현을 나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 군현의 일은 기어이 소화해내야 합니다. 내 말 알겠습니까.”
“물론이오. 그리할 것이외다.”
현령 역시 윤증의 경고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기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등을 돌렸을 때 두려움에 떠는 건 사족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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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을 깨물었다.
역병은 가히 조선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였다.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리는 것만 같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허목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재 파악한 바에 의하면 격리된 병자의 수가 이미 수천에 육박했소.”
“허 국장. 괜찮으니 정확하게 말해주시오.”
“9천이 넘었소.”
“…….”
바꿔 말해서 조만간 9천 명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병자가 더 추가되는 건 이미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역병이 얼마나 더 많은 백성을 집어삼킬지 가늠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사실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반석 위에 올렸다고 판단한 위생조차도 아무런 효력을 내지 못하는 전대미문의 역병은 공포 그 자체였다.
“역병의 처방은 아직 요원하오……?”
“그렇소. 그런데 본부장. 내 판단을 말해도 되오?”
“무엇이오?”
“아무리 봐도 이번 역병은 청국에서 번진 게 확실하오.”
“충청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소. 무역이 원인이라고 보는 건 어렵지 않소?”
“무역과 상업 확대로 국경을 오가는 상인도 얼마든지 충청도로 갈 수 있소. 또한, 서북 지역은 도성과 지척이며 박세당의 원리주의가 꾸준하게 활동하였소. 해서, 충청도보다 상황이 좋을 수밖에 없소. 그러니 시작‘만’ 충청도였을 뿐이라고 생각하오.”
서북 지역은 잠복 기간이 길었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추론이 합리적이었다.
“무역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역병의 원인으로 파악되오. 가능성이 크오. 본부장. 중단해야 하오.”
“스승님. 더 고려해봐야 합니다.”
스승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유형원의 목소리는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맡은 역할이 분명하기에 나서지 않을 수도 없었다.
“반계. 하면, 이대로 역병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걸 방관하자는 건가? 역병이 창궐한 지 고작 한 달 만에 병자가 9천 명일세. 이 또한 최소한으로 파악한 것이네.”
“스승님. 송구하지만 확실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 설령 정말 무역으로 창궐한 역병이라고 할지라도 섣불리 결정할 수 없습니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대체 무슨 판단을 해야 한다는 건가?”
“지금 우리 조선은 청국과 무역이 단절되면 국고가 고갈됩니다. 하면, 조정은 구휼미를 내릴 수 없습니다. 아니, 구휼미가 아니라 도성과 인근의 백성 수십만 명이 위험해집니다. 그렇다고 하여 군현에서 다시 조세를 징수한다면 그곳의 백성이 굶어 죽을지도 모릅니다. 스승님. 송구하지만, 이 판단을 중대본은 해야 합니다.”
“하면, 백성을 역병에 무방비로 노출하자는 것인가? 당장 발생할지도 모르는 기근을 대비하고자, 지금 광범위하게 번지는 역병의 원인을 방치하자는 것인가?”
“스승님. 감히 내일을 예단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기근은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미 냉해가 발생하였습니다. 심지어 올해가 시작된 이후 비가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파종해야 할 봄에 가뭄이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만약 가뭄이 시작된다면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의 기민과 유민이 발생할 겁니다. 중대본은 이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청국과의 무역은 유지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첨예하게 대립했다.
문제는 두 사람의 의견이 모두 옳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한 명이 양보하면 해결되는 아름다운 상황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의견이 이미 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근거였기 때문이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는 버려야 한다는 잔인한 현실이었다.
지금은 두 가지를 동시에 가져갈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철통처럼 단결했던 중대본은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다.
“모두 참으로 답답하오. 지금 병자를 격리한 시설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인원을 추가로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비축된 약재는 어떻다고 생각하오? 아니, 이대로 가다가 도성에서 역병이 창궐하면 모두 어찌할 생각이오? 감당이나 하실 수 있소?”
역병이 도성에서 창궐한다는 건 본질적인 위기감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파악한 역병의 전염 속도를 고려할 때 도성에 창궐하면 모든 걸 마비시킬 수도 있었다. 이건 생각하기도 싫은 경우의 수였다.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대안이 없다면 무역부터 중단하는 게 옳소. 청국에서도 이를 문제로 삼지는 않을 것이오. 무역은 역병을 잠재운 다음에 시도해도 된다고 생각하오.”
도성의 역병 창궐 가능성을 경고한 허목의 말에 유형원은 더 나설 수가 없었다. 현실적으로 당장 급한 건 높은 확률로 발생할 수도 있는 기근이 아니라 조선을 뒤흔들고 있는 역병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사정이 달랐다.
“그럴 수는 없소.”
“본부장.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시설이 부족하면 산성으로 보내고, 약재가 부족하면 지급하지 않으면 되오.”
“본부장!”
“대체 조선이 언제부터 역병에 걸린 병자를 따뜻한 온돌방에 재우고, 삼시 세끼를 다 먹였으며, 약탕을 먹였소?”
“뭐, 뭐요……?”
“또한, 허 국장이 정확하게 지적하셨소. 도성에 역병이 창궐할 수도 있소. 위생국은 이를 방비해주시오.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오.”
허목은 멍하게 나를 쳐다만 봤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무역을 중단시키는 건 자멸로 가는 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원 역사의 조선이 지금과는 달리 전면 무역을 하지 않고 ‘생존’했다는 건 알고 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우리도 그리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이건 단순 비교에 불과했다.
이미 ‘우리’ 조선은 무역하지 않으면 원 역사의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했다. 사실상 지방의 재정 자립화를 시행하면서 국고의 취약성을 들고 달려온 것이니 말이다. 이러한데 국고의 버팀목이 되는 무역을 중단했다가는 원 역사보다 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다.
“우리는 역병‘만’ 막는 게 역할이 아니오. 역병도 막고, 냉해도 해결해야 하며, 가뭄도 방비하고, 홍수도 막아야 하오.”
“…….”
“역병을 제압하고자 참으로 많은 역량을 투입했소. 그러면 거기까지에 불과하오. 다른 재해를 방비해야 할 역량을 모조리 역병 방비에 사용할 수는 없소. 그리하는 순간 모든 균형이 무너지게 될 것이오.”
우리는 질병 대책본부가 아니라 중앙 재해대책본부였다.
역병만 발생하는 비상사태라면 허목의 말이 옳지만, 자연에 꺼낼 수 있는 모든 재앙이 총망라되는 상황이었으니 역량을 분배하는 게 옳았다.
“이 문제는 더 논의하지 않았으면 하오.”
“대감!”
아무런 질서도 없이 관리가 중대본의 문을 열었다.
“파발을 수행하던 관리 중에 8명이 역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관리들이 결의했고, 전처럼 서얼이 결합했으나 파발은 원활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 도성에 역병이 창궐했습니다.”
재앙에도 질서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