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비극의 씨앗(1)
지독해도 이보다 지독할 수 없는 날씨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파종해야 할 시기인데 하늘에서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올해 농사가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평생 농사를 지었기에 가뭄을 처음 경험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올해처럼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비가 내리지 않은 봄 가뭄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없었고, 흉년은 확정적이었다.
또한, 올해보다 덜했을 뿐 가뭄과 기근이 쉬지 않고 이어졌던 시절이었기에 따로 모아둔 식량 따위가 있을 리도 없었다.
백성들은 좌절하여 넋을 잃었다.
그들의 눈동자에 의욕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 해내야 하는 것이 농사가 유일한 이들이었기에, 유례없는 봄 가뭄은 세상이 끝났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일어나게.”
세상이 끝났는데도 움직이라는 말이 들렸다.
백성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서얼이었다.
말을 꺼낼 힘이 없었으나, 평소 저들의 선행을 잊지 않고 있었기에 힘겹게라도 대꾸했다.
“일어나면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면 빨리 배가 고픕니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 있고 싶습니다.”
“일해야지. 왜 앉아 있나?”
“……이미 농사는 망했습니다.”
“관청이 준비한 구휼미는 넉넉하니, 올해 농사가 망했다고 할지라도 굶어 죽는 일은 없네. 또한, 조세도 내지 않아도 될 것이니 더 걱정하지 말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올해 농사가 엉망이 되더라도 자네들이 굶는 일은 없다는 걸세. 그러니 움직이게. 우리와 산과 들에서 뭐라도 구해보자는 말이네. 칡을 구해도 좋고, 열매를 구해도 되는 것일세.”
백성들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휩싸였다.
서얼이 말이 대단한 기교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삶을 관통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투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진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유려한 언변으로 교화하는 게 아니라, 투박할지라도 구체적인 방책으로 삶을 책임지는 위정자의 ‘말’이 전해지며 발생한 일이었다.
“아직 우리는 죽지 않았네. 그러니 살아야지.”
백성들은 웃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그저 일어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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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년의 하루는 1년보다 길다고 느껴질 정도로 길이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전례 없는 봄 가뭄으로 백성은 고통스러웠고, 위정자는 좌절했다.
그러나 박세당의 눈동자에는 묘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참으로 괴이하군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데 시들지도 않는다니.”
청국 상인의 봇짐에서 구한 원서는 시선이 절로 갈 정도로 잘 자랐다.
“자네 말대로 참으로 희한하군. 다른 작물은 모두 말라 죽었는데 유독 원서만 잘 자라고 있으니 말일세.”
“거는 기대가 큽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소생의 말이 옳았습니다.”
“하하하. 그래. 내가 잘못했네.”
의주 목사는 박세당의 빛나는 이마를 보며 괜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원서를 재배하는 건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긴 했다. 애초 소량이었기에 그냥 시행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처음 의주 목사가 머뭇거린 이유는 박세당이 판을 크게 확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시작은 몇 알에 불과했으나 이후 오가는 청국 상인을 통하여 상당한 수량을 확보했다. 게다가 조선 상인들도 귀국할 때 소량이나마 가져왔기에 의주를 시작으로 원서 재배가 점차 남하하는 추세였다.
이는 박세당을 따르는 사족의 노력에 의주 목사의 합법적인 권한이 더해진 결과였다.
한마디로 실패하면 의주를 중심으로 한 국경 일대가 상당한 문제에 봉착할지도 몰랐다. 의주 목사로서는 큰마음 먹고 정치적 결단을 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결과가 좋으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맛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최고의 구황작물로 거듭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어차피 봄 가뭄으로 다른 농사는 어렵습니다. 백성에게 원서 재배에 전념하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있는 건 모두 재배에 사용했네. 더 구할 수 있겠나?”
“왜 또 이러십니까.”
박세당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연스레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빛나는 이마가 시선에 담기자 의주 목사는 상당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했다.
“자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참으로 사람을 궁지에 몰리게 잘하는군. 휴. 알겠네. 은자를 최대한 확보하여 청국 상인들에게 원서를 가져오게 하겠네.”
“하하하. 소생은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이를 알리겠습니다.”
“한데, 조정에서는 큰 반응이 없으니 의아하지 않나? 당장 원서를 도성으로 보내야 할 줄 알았는데 말일세.”
“음. 그건 소생도 그렇긴 합니다.”
본부장 송시열은 기근 대비 중 구휼미를 비축하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운 구황작물을 구하게 되었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주상 전하께서 윤허하시긴 했으니 탈은 없겠네만.”
“일전에는 어쩔 수 없이 가능성에 국한된 내용으로 장계를 올렸으나, 지금은 실제로 재배하고 있습니다. 인력이 크게 필요한 일도 아닙니다. 이 내용을 더 상세하게 적고 원서도 몇 알 함께 보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겠지. 맛도 좋고 잘 자라는 구황작물일세. 조선 전역에서 재배된다면 기근 극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네. 지금 당장 장계를 올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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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번에는 봄 가뭄이었다. 게다가 지금 가뭄이 발생한다는 건 단지 가뭄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역병의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았소. 이때 기근이 발생한다면 백성은 다 죽소.”
역병이 기근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근은 역병을 만들어 낸다. 조선을 집어삼키고 있는 역병은 기근과 만난 뒤 더 맹렬하게 날뛰게 될 건 불 보듯 뻔했다.
이는 막아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물론, 기근 대책은 확실하게 수립한 상태였다.
가장 기본이며, 핵심이 바로 구휼미 확보였으니 말이다.
“봄 가뭄이 극심한 군현은 농사를 포기하고 구황작물의 확보에 집중하는 게 옳소.”
“본부장의 의견이 합당하오. 대동미를 포함하여 조세를 조정으로 보내지 않았기에 구휼미가 넉넉하게 확보된 상황이오. 대규모 유민이나 기민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오.”
환곡부터 대동미까지 뜯어낼 수 있는 건 다 뜯어내면서 여기까지 왔다.
결과, 현재 우리 군현은 백성을 굶기지 않을 능력이 있었다.
“조만간 어선이 들어올 겁니다. 일전보다 수량이 많으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소금이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나와 허적의 대화가 잠시 끊긴 틈에 변승업이 보태듯 말했다.
일전에도 경험했듯 변승업의 어선에서 가져오는 어류의 수량이라는 건 정말 엄청난 수준이었다. 보고 있노라면 육지가 아니라 바다라고 느껴질 정도였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서인지 자신감도 잔뜩 담겨 있었다.
반면,
“휴. 소금이라…….”
소금은 허적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그간 호조에서 염전 사업에 역량을 기울였고 성과도 컸다. 그러나 늘 그렇듯 자원이라는 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소금은 사람의 생존과 직결하는 것이었으니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다.
더불어 이미 군현마다 소금을 소량이나마 운송하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게 했기에 조정에서 마음껏 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즉, 변승업의 어선이 가져올 막대한 수량의 어류를 감당하는 건 어려웠다. 게다가 함경도에서 잡아 올리는 어류의 수량도 보통은 넘었다. 우습게도 그토록 간절하게 바랐던 어류였는데 많으니 또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음. 본부장. 서북면과 함경도는 쌀을 비축하고 어류로 끼니를 해결하는 건 어떻겠소?”
“……설마 삼시 세끼를 어류 중심으로 하자는 말씀이오?”
“그렇소.”
“……호판. 그리하면 엄청난 저항이 있을 것이외다.”
“하지만, 조선 팔도에 어류를 보낼 수가 없소. 그렇다고 저 많은 어류를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외다. 반발은 있을 것이나 현황이 이러하니 강제하는 게 옳소.”
그래. 지금 조선의 처지를 되돌아볼 때 ‘사람이 어떻게 물고기만 먹고 살 수 있을까?’라는 고찰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해안가에서 서북면과 함경도의 내륙으로 운송하는 과정에서도 분명 소금은 사용될 것이다. 이것도 부담스러운데 어디를 함부로 보내겠는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는 게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남해와 서해를 중심으로 한 염전은 절대로 중단하지 않도록 했소. 그러자면 인부와 인근 백성들에게는 가장 먼저 구휼미를 내리는 게 옳소. 이리해야만 탈이 없소.”
국책 사업으로 진행했기에 특별하게 더 챙겨야 한다는 게 아니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사람은 소금이 없으면 절대로 기근을 버틸 수 없다.
섭취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 여차하면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니 어떠한 악조건이 있더라도 소금은 무조건 생산해야 했다.
해서, 과장을 좀 보태어 임금님 수라상 다음으로 챙겨야 하는 게 그들의 밥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건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세우며 가져가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 멋쩍게 웃으면서 말을 끌었다.
그리고 윤선거를 힐끗 바라봤는데 내 시선을 피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도 먼 산을 쳐다봤을 것이다.
“윤증이 서찰을 보내왔소.”
“……우암. 따로 이야기하지.”
“역시 미촌, 자네도 서찰을 받았군.”
내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윤선거는 진땀까지 흘리며 만류했다.
“내가 긴히 할 말이 있네.”
“왜 그러나? 내게 온 서찰에 의하면 자네가 혈연, 학연, 지연을 다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라고 했다고 적혀 있네. 혹시 윤증이 괜한 말을 하는 건가?”
“……끙. 내가 그렇게 권한 건 사실일세. 한데, 이리할 줄은 몰랐네. 발신인의 이름과 필체가 아니었다면 자네가 보낸 서찰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누가 봐도 윤증이 보낸 내용이었어. 아. 모두 내용이 궁금할 것이니…….”
나는 계속 미소를 유지하며 윤증이 보낸 서찰의 내용을 언급했다.
중대본의 대신들은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유형원도 웃음을 떨쳐내지 않았으나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사가의 문을 열지 않는 사족과 관계있는 이들을 모조리 벌하라니. 정말 윤증이 보낸 게 맞습니까?”
“애석하게도 사실일세.”
“근묵자흑이라더니.”
“자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하하하. 아닙니다. 한데, 이 일은 이미 어명이 내려진 사안입니다. 사족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명시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명이라는 건 늘 그렇듯 광범위하게 유권해석을 할 수 있었다.
특히나, 민심을 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을 때는 유권해석의 범위는 무한대로 수렴했다.
하지만 어명의 권위가 이렇게 사적인 영역까지 침투하여 옹졸하게 행동하는 건 어려웠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내가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적어 보냈습니다. 사헌부에서 전수조사하여 친인척의 명단을 확보해주시면 내가 직접 그들을 만나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