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비극의 씨앗(2)
늘 그렇듯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관리들의 기강을 잡는 것이다.
게다가 윤증의 요청 사항은 명분도 충분했기에, 분위기를 휘어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소인이 당장 서찰을 보내겠습니다.”
문제 사족의 친인척들은 내 앞에서 땀을 흘리며 절절하게 말했다.
“그 정도로 되겠나? 나는 오늘따라 자네의 관복이 영 거슬리네만.”
“대, 대감. 사후 결과만 보고 결정해주십시오.”
“음.”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세상사를 매번 빡빡하게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번만은 특별하게 관대한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믿어도 되겠나?”
“그렇습니다.”
“빠르게 일을 마무리해야 할 것이네.”
“감사합니다. 대감.”
관리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환해졌다.
대충 손을 내저으니 재빨리 물러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송준길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닐세.”
“아닌 게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가 조금 더 생각해보고 말해주겠네.”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으나 아무리 나라고 할지라도 송준길의 입을 마음대로 열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려는 찰나, 허적이 사헌부로 들어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본부장. 의주에서 장계가 다시 올라왔는데, 새로운 구황작물을 확보한 것 같소.”
“새로운 구황작물이라고 하셨소? 대체 그것이 무엇이오?”
“청국에서 구한 감저라는 작물이오.”
“감저……?”
어쩐지 낯선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 허적의 손에 들린 무언가가 보였다.
“…….”
아는 작물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오.”
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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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에 대해서 길게 말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내가 왜 감자를 생각하지 못했는지 자책하는 시간이 더 필요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전하. 하늘이 조선을 버리지 않았사옵니다.”
사람이 흥분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중대본 대신들은 물론이고 이연까지 있는 자리였으나, 나의 기쁨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감저를 대량으로 확보해야 하옵니다. 그 직후 조선 전역에 재배하게 한다면 기근을 극복의 비기가 될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사옵니까. 봄 가뭄으로 농사가 어려운 군현은 감저 재배에 전력을 기울이는 게 옳사옵니다.”
“본부장이 이토록 성과를 자신하니 기대를 할 수밖에 없소. 또한, 장계의 내용을 보더라도 효과가 좋다는 건 알겠소. 그러나 아직 수확을 이룬 것도 아니외다. 그러한데, 섣불리 감저 재배를 전면적으로 보급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볼 수 있소.”
이연은 차분하게 신중론을 펼쳤다.
무슨 말인지 알겠으나 지금은 신중할 때가 아니라 공격적이어야 한다.
내가 그동안 송시열로 살았으나 지금만큼은 한국인이어야 했다.
“전하. 어차피 봄 가뭄이 닥친 군현은 구황작물을 확보하고 있사옵니다. 감저는 그 모든 구황작물보다 효과가 좋을 것이옵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본부장. 만일 감저 재배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어찌하오?”
“어인 하교이시옵니까.”
“백성은 강인하나 어리석은 존재라고 할 수 있소. 조정에서 감저에 대한 효능을 그토록 강조하여 재배를 권한다면 그들은 따를 것이오. 아니, 생존을 위하여 다른 건 제쳐두고 감저 농사에 집중할 것이외다. 만백성이 살고자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감저만 재배하는데 효과가 크지 않다면 어찌하오?”
감자는 조세를 내지 않는 작물이지만, 어차피 조세 징수 자체가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그러니 진심으로 감자 농사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나온 말이었다.
이연은 차분하게 설득력을 갖춘 말을 끌어냈다.
“아무리 가뭄이 발생했다고 할지라도 백성은 농사를 포기하지 않소. 쌀 한 톨이라도 수확하고자 백 리를 마다하지 않고 물을 길어 나르오. 그들의 노력을 모두 감저 재배로 돌리자는 본부장의 말은 경계할 수밖에 없소. 본부장. 다시 말하지만 정확한 성과가 이뤄진 게 아니오. 결과를 보고 집행해도 늦지 않소.”
“…….”
“구황작물이 알게 된 건 좋은 일이오. 그러나 구황작물이 주가 될 수는 없소. 지금으로서는 의주와 인근 군현에서 진행하는 정도가 적당하오.”
이렇게까지 완강하면 내가 더 어찌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대로 감자를 포기하는 너무나도 우매한 행동이었다.
“신이 어찌 어심을 돌릴 수 있겠사옵니까. 하오시면 중대본에서 이를 시행할 수 있게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조정에서 감저 농사를 우선 도입해보자는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이는 백성과는 무관한 일이니 어찌 탈이 생기겠습니까.”
“그 정도는 어렵지 않소.”
“또한, 관리들에게 감저 농사를 따로 시행하게 하는 건 어떻겠사옵니까.”
“본부장. 관리들이라고 하여 형편이 다 넉넉한 건 아니오. 그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부여하는 게 아닌지 우려되오.”
“신을 믿어주시옵소서. 기어이 성과를 내겠사옵니다.”
이연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 담겨 있었다.
“그간 본부장이 내게 이토록 강하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소. 그만큼 성과를 자신하기 때문이오?”
“물론이옵니다.”
“허. 근거가 너무 부실하여 도무지 이해할 수는 없소. 그러나 그간 보여준 본부장의 판단을 신뢰하기에 윤허하겠소. 감저를 최대한 확보하여 농사를 짓되 반드시 성과를 보여줘야 할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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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 안팎과 육조거리 곳곳에는 관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웅성거렸다.
미간이나 인상을 잔뜩 찌푸린 이들도 있었고, 무던하게 말을 듣기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
“구황을 파악하여 확인하고 백성에게 전하는 일도 버겁네. 한데, 이제는 아예 구황작물을 재배하라는 결정이라니.”
“내 말이 그 말일세. 아닌 말로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네.”
중대본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한 감저 재배는 관리들의 불평과 불만을 자아냈다. 특히, 여러 이유 중 한 가지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효용성을 입증할 수 없는 작물이라고 하였네. 한데, 관리는 품계에 무관하게 무조건 재배하는 결정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만일, 재배가 시원찮을 경우는 우리는 어찌 되나?”
“그러게 말일세. 중대본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나? 일이 터질 때마다 우리를 휘두르더니 이제는 작물 재배까지 강제하는 게 아닌가.”
“말이야 바른말로 대체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못한 게 많나? 기근으로 백성이 굶주리자 녹봉 삭감도 청하였고, 곳간도 열었으며, 밤낮으로 안건을 수립하고 집행하고 있네. 이런 노고는 어찌하여 언급도 하지 않고, 탓만 하고, 부당한 방침만 내려보내는 건지 모르겠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중대본 출범 이후 꾸준하게 지속한 개혁으로 관리들은 숨죽이는 시간이 참으로 많았다.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문을 표하면 개혁에 반대하는 무리로 낙인찍혔고, 민심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모욕도 여러 번 당했다.
그런데도 참으며 나랏일에 전념했다.
“아무리 관리라고 할지라도 기근이 피해 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도 먹고살아야 나랏일을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어찌 될지도 모르는 감저 재배의 강제화라니.”
“단지 강제만 하면 말도 안 하겠네. 듣자니 수량까지 정하여 하달한다고 하네. 참으로 답답한 일일세. 하늘에서 비라고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데 새로운 작물이라니. 우리는 굶어 죽어도 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네.”
“대체 우리는 이 나라에서 무엇이란 말인가.”
“됐네. 한탄은 그만하지. 어차피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니까. 말해봤자 모욕만 받을 것이네. 그냥 대충 재배하면 될 것이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긴 했다.
그동안 중대본의 개혁은 관리를 강하게 통제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든 관리가 한마음 한뜻은 아니었다.
이건 붕당으로 증명할 수 있는 조선의 역사였다.
“비가 오지 않아도 잘 자란다고 하더군.”
“쉽사리 믿을 수는 없지만, 중대본에서 괜한 말을 하지는 않겠지?”
“우리 간단하게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나? 만일, 감저 재배의 성과에 자신이 없다면 우리에게 강제화할 수 있겠는가? 결과가 형편없으면 당장 관리부터 굶게 될 것이니 말일세. 이건 누구도 원하는 결말이 아니지 않은가.”
정말 간단한 말이지만, 너무나도 설득력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확실한 일을 내세우는 건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그렇지. 되돌아보면 새로운 농법을 시행할 때는 늘 특정 지역에 먼저 도입하긴 했지.”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지금도 그렇지 않나? 그리고 우리 조선은 다 느리지만 농법의 변화는 가장 느렸네. 이를 고려할 때 이번 감저 재배는 의주 일대와 문무백관을 상대로 진행하는 것이 아닌가. 이 정도면 전과 비교해도 성과에 대해서 상당한 자신감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일세.”
“좋군. 하면, 바로 재배하는 게 좋겠군. 어디서 받을 수 있다던가?”
“조만간 중대본에서 일괄적으로 나눈다고 하더군.”
중대본의 결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관리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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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청계천 근처에서 백성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낯선 이가 지나갈 때마다 은근히 경계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만 두리번거리고 빨리 말하게. 깜짝 놀랄 소식이라는 게 뭔가?”
“내가 아는 노비 놈에게 들었는데 관리들이 감저라는 새로운 작물을 재배한다는군.”
“감저? 그게 뭔가?”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비가 안 와도 잘 자라고, 추워도 잘 자라고, 맛도 좋은 구황작물이라고 하더군.”
“뭐? 그렇게 좋은 걸 왜 관리들만 재배하나? 혹시 중간에서 가로챈 걸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네. 하지만, 잊지 말게. 그 사람들은 ‘관리’일세. 좋은 건 나누지 않을 수도 있고, 좋은 걸 가로챌 수도 있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생각해야지.”
반론을 펼치기는커녕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이었다.
그때 다른 이가 은근슬쩍 다가오면서 말했다.
“자네들은 아직 멀었네.”
“갑자기 등장해서 그게 무슨 말인가?”
“나도 아는 노비 놈이 있네. 그 댁 양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감저를 재배하라고 했다는군.”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 댁은 하기 싫어한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무조건 소문이 날 수밖에 없으니 하기 싫은 티를 내면서 원망을 안 받으려는 것일세. 양반들을 아직도 모르나? 그래서 내가 자네들보고 멀었다고 한 것일세.”
“허. 결국, 그 좋은 걸 우리는 나누지 않겠다는 것이군.”
백성들은 험악하게 인상을 쓰면서 눈까지 부라렸다.
생각할수록 너무 괘씸했다.
“아니, 모내기법도 좋은데 그건 그렇게 막으면서?”
“생각해 보게. 농사가 망하면 조세를 못 거둬가네. 그래서 막은 거지. 감저를 우리에게 전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니겠나? 우리가 이걸 재배하면 농사 안 지을까 봐 그런 걸세. 그러면 조세를 못 거두니까.”
“허. 그래서 뒷밭에서 우리 몰래 재배하는 건가?”
“무조건일세. 내가 손목 걸 수 있네.”
“하. 도저히 참을 수 없네.”
“안 참으면 어쩔 건가?”
“어쩌긴. 우리도 감저 구해서 재배해야지. 뒷밭에서 말일세.”
이미 존재가 확인된 이상 구할 방법은 너무 많았다.
밭을 성벽으로 막은 것도 아닐뿐더러, 노비들과 친분도 제법 있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