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위정자라는 석 자의 무게(1)
가만히 있어도 살이 떨리는 지독한 폭거였다.
어찌하여 하늘은 이토록 모질 수가 있는가.
백광현은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결국, 한 명도 살리지 못했다.
그동안 한 것이라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약탕을 제조한 것에 불과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처방을 알아내겠다는 집념이 무서울 정도로 치솟았다.
결심을 굳힌 백광현은 고개를 돌려 하늘만 바라보는 처능에게 말했다.
“대사. 이대로는 곤란합니다.”
“자네의 말이 참으로 옳아. 이대로는 곤란하지.”
“서, 선생께서 어찌 오셨습니까.”
도성에 있어야 할 허목의 등장에 백광현과 처능 모두 깜짝 놀랐다.
허목은 쓰게 웃으며 대충 손을 내저었다.
“호들갑 떨 필요는 없네. 나 역시 의원이니 병자를 찾아온 게 당연하지 않겠나? 그리고 역병의 처방을 알아내려니 도성만큼 역량이 집중된 곳을 찾게 되었네. 그러니 자연스레 두 사람이 있는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세.”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으나 허목과 중대본이 얼마나 큰 결심을 했고, 이번 역병을 얼마나 엄중히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데, 선생. 생각해둔 방편이 있으십니까? 분명 이대로는 곤란하다고 하셨습니다.”
“방편을 찾고자 온 것일세. 자네는 승려를 이끌고 분리와 격리에 모든 역량을 기울이게. 약재가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니 처방을 구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말게. 또한, 위생을 집행하는 일에서는 승려들을 배치하지는 말게.”
“대신할 사람들이 있습니까?”
“무당과 사족에게 모든 걸 맡길 것이네. 특히, 사족이 이런 난세에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아니겠나?”
사족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손이 발이 되도록 뛰어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허목은 이를 가능하게 할 위치였기에 처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 의원. 자네는 역병의 처방을 구하는 일에서 손을 떼게.”
“서, 선생.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역병은 나와 승려들이 알아서 할 것이네. 자네는 다른 일을 하게.”
“선생. 소인도 함께하게 해주십시오.”
백광현이 다급하게 말했으나 허목은 냉정했다.
“백성을 괴롭히는 병마가 어디 역병밖에 없다던가? 그러니 자네는 팔다리가 아프고 다른 병마와 싸우는 백성을 다스리게. 이게 옳아.”
“선생. 소인은 누구보다도 역병의 처방을 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역병은 처방을 찾지 못하면 모두 죽네. 그러나 처방이 있는 다른 병마와 싸우는 병자는 어찌할 건가? 실력 있는 모든 의원이 역병의 처방에만 집중하면 또 다른 죽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네. 나는 이를 우려하는 걸세.”
해결할 수만 있다면 역병을 우선하는 게 옳다.
그러나 해결은커녕 진정시킬 기미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모든 의원이 역병만 바라보고 있다면, 기껏 여기까지 구축한 의술 역량이 의미가 없어진다.
“하지만 소인이 아니라도 그 일을 할 의원은 많습니다.”
“사사로운 욕심을 앞세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군.”
“선생. 소인은…….”
“전쟁에서 선봉에 선 장수만 승리에 이바지하던가? 아니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있으며, 뒤에서 보급하는 재상들이 있네. 지금 자네는 오직 적과 싸우는 선봉만을 탐하고 있네. 이것이 공명심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
“의원은 역병만 고치는 게 아니라 백성을 고치는 일을 하는 사람일세. 자네의 언행을 되돌아보게. 과연 의원으로서 떳떳한지 말일세.”
“…….”
“한데, 선생.”
다소 경직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처능이 슬며시 말을 꺼냈다.
“소승이 듣기로는 인근 군현에서 병자를 분리하기 어려운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여력이 없어서 시설을 세우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서원과 향교, 관청 그리고 사대부의 사가가 있네. 이는 중대본의 방침인데 탈이 생긴단 말인가?”
“소승이 승려들에게 들어보니 사족의 저항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역병이 창궐했으니 몸을 사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강행하라고 하게. 그런데도 만일 불응하면 그들의 이름을 가져오게. 친인척을 모조리 탄핵해버릴 것이야.”
“…….”
“공간도 내어놓지 못하는 사족은 절대 이 시국에 백성들 앞에서 위생을 교화하지 않을 것이네. 확실하게 해야 하는 법일세. 그러니 명단을 확실하게 중대본으로 보내라고 전하게. 내가 직접 시킨 일이니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네. 또한, 사족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게.”
처능은 피식 웃었다.
너무나도 듬직했고,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만, 백광현은 아직도 얼굴에 그늘이 진 상태였다.
처능은 애써 보지 못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허목의 방침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지금 조선의 의술은 철저한 집중과 분산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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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상당히 많은 관리가 내 시선을 피했다.
저들에게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찼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파발을 간 관리가 역병에 걸리고, 감자 파동을 거치면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하.
대체 이런 과정을 몇 번이나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염증이 났다.
그냥 무시했으나 결국, 관리들이 먼저 떼로 몰려왔다.
“자네들은 참으로 불평과 불만이 멈추지 않는군. 군말 없이 관리로서 책무를 다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가?”
“단지 죽음을 쉽사리 결심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를 어찌 탓할 수 있습니까.”
이들은 착각을 제대로 하고 있다.
내게 말을 던진 관리를 쳐다봤다.
한참이나 바라보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색함이 커져 모두 내 시선을 피할 때 말을 꺼냈다.
“그래. 죽음의 길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네. 한데, 누가 등을 떠밀었나?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
“선택이라고 하셨으나 어찌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군. 그래. 파발을 수행하던 관리 4명이 역병으로 사망했지. 그런데도 조정은 파발을 수행할 관리를 찾아야 한다. 가지 않으면 조선은 마비될 것이니까. 한데, 다시 말해야 하나? 강제하지 않는다.”
“대감께서는 관리의 목숨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까.”
“하면, 사족의 길을 걸어가게. 그리한다면 목숨을 담보로 책무에 임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거칠게 손을 내저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나서지 않고, 거부해도 탓하지 않을 것이네. 파직을 운운하지도 않을 것이야. 조정은 해야 할 일이기에 사람을 찾을 뿐이니까. 한데, 이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불평불만을 쏟아낼 것이라면 그냥 관복을 벗게.”
“…….”
“나는 자네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니 이 대화는 이제 그만하고 싶군.”
진심이었다.
이런 실랑이는 정말 그만하고 싶었다.
임무를 거절한다고 하여 탓하지 않겠다는 건 나로서는 최대한 할 수 있는 배려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나를 찾아와서 다시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결의를 밝혔던 모습이 겹치면서, 참으로 지독할 정도로 이 상황에 염증이 났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대안은 기층에서 싹을 피우고 있으니 말이다.
싸늘하게 노려보며 등을 돌렸다.
잠시라도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요즘 홀로 쉬었던 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중대본에 들어서자마자 송준길이 따라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우암. 과하네.”
나를 책망했다.
“매번 관리를 너무 몰아세우는 게 아닌가 싶네. 오늘 감저 농사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만일 실패하면 관리들의 생계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네.”
“음. 비단 이번 사안으로 소제를 찾으신 건 아니겠지요. 평소 관리의 처우에 생각이 있으셨던 겁니까.”
“말 그대로일세.”
잠시 말을 멈췄던 송준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무겁고 깊었다.
“파발을 수행하던 관리가 죽은 일로 그들의 동요가 크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네.”
“…….”
“지나치게 그들을 몰아세우고 있다는 생각을 잠재울 수가 없네. 사족의 일로 연좌하여 그들을 탓하는 것도 마찬가지일세.”
“형님. 온정적으로 바라볼 일이 아닙니다. 또한, 기어이 왕명을 수행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배제하는 게 맞습니다. 민심을 다독이는 것도 버거운데 관리까지 언제 설득하면서 갈 수 있습니까. 게다가 그들은 일전에 소제에게 목숨을 걸겠노라 다짐까지 했습니다. 한데,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웅성거리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불신을 표출했다.
이 감정의 뿌리까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허목이 목숨을 걸고 군현으로 하방한 이 와중에 몸을 사리는 관리들의 작태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암. 그들을 탓할 일이 아닐세.”
송준길의 입장은 달랐다.
평소 누구보다도 관리의 기강에 엄격했던 인물이었기에 이 반응은 다소 의외였다.
“종묘와 사직을 위하고 백성을 챙기며 선정을 베푸는 목민관이라고 하여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역할을 도맡는 이는 드물 수밖에 없네. 물론, 나는 다수의 관리가 절절하고 처절한 상황에서 기어이 목숨을 던질 것이라고 믿네. 하지만 단지 파발을 위해서 나아가기에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닐세.”
“압니다. 그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많은 관리가 사재로 백성을 구하고, 밤을 지새우며 조정을 지키는 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하지 못하겠다는 이들을 다독이면서 갈 만큼 여유롭지 않다는 겁니다.”
“틀렸네. 그들도 데리고 가야 하네.”
송준길의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당연히 관직에 있는 이들의 사기는 중요하며, 그들과 함께 가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이상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더 양보할 것도, 가져올 것도 없다.
“이 난세에 어찌 몸을 사리는 관리까지 설득할 수 있습니까. 또한, 일전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왕명이 내려지면 관복을 벗어서라도 피하려는데 무슨 수로요.”
“관리와 관리의 사이에서 도덕적 우월감으로 위계가 갈리면, 조정은 붕괴할 수밖에 없네.”
“예……?”
“나는 목숨을 아껴서 가지 못하는데 누군가는 달려가는 풍조. 장점도 있을 것이네. 그러나 이런 상황이 가속화되어 관리의 목숨이 위계가 되고, 누군가를 억누르게 된다면 사기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네. 나는 죽음에 대한 결의가 조정을 지배하며 관리를 내몰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세. 이리되면 누구라도 무력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죽음이 결의라는 가치에 매몰되는 조정은 참으로 두려울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를 어찌 해결하라는 것일까?
송준길은 이 해답을 알고 있을까?
“우암. 답답함은 알겠네. 그러나 나는 최소한 그들이 관리일 수 있는 자긍심만은 우리가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세. 이를 무너뜨리게 된다면 조정은 마비될 것이네. 잊지 말게. 중대본이 기근 대책을 진두지휘하지만, 이를 집행하는 이들은 이름 없는 그들이라는 걸 말일세.”
애석하게도 송준길은 나를 전혀 설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대적인 입장으로 접근하면 당황스러운 논지였다.
물론, 이 시절 위정자는 실체와는 무관할지라도 ‘도덕적’이고자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즉, 송준길은 이 가치를 허물어버리면 관리들이 좀비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관복을 입었다고 한들 그들은 완성된 군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게. 그들 역시 아직은 배우고 있으니까.”
지금의 관리를 단지 대한민국의 공무원과 절대로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다.
이 시절 관복을 입은 이들은 분명한 성격의 위정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보다도 높은 책임감과 도덕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송준길의 말을 동의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