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위정자라는 석 자의 무게(3)
중대본의 누구도 개입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을 이끄는 대신으로서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 톨의 쌀이 아쉬운 시국에 쌀을 사재기하고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관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조금만 더 늦게 적발했다면 도성의 쌀값은 천정부지로 올랐을 것이오.”
“본부장의 말이 옳소. 결국 우리 중대본은 구휼미를 꺼냈을 것이지만, 이 또한 순식간에 누군가의 곳간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참담한 일이오.”
만일 객관적으로 쌀이 부족했다면, 곡물값이 폭등하는 것만이 아니라 누구도 쌀을 구할 수 없다. 아무리 귀한 금은보화를 내놓더라도 쌀을 구할 수 없는 세상이 개막되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기에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쌀이 부족해서 발생한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쌀을 사재기하여 발생한 현상이었다. 아직은 쌀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으니, 비싼 값을 부르면 무조건 구할 수 있다. 이 경우 조정에서 시장에 쌀을 공급할지라도 값을 조정하는 건 어렵다. 그 ‘누군가’는 끝없이 사들여 곡물의 값을 미친 듯이 폭등시켰을 것이다.
만일 조기에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도성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직면했을 것이다.
“위정자라는 무리가 참으로 한심하오. 아니, 경멸스럽소.”
모두 특별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불쾌하고 참담한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한숨이 아니라 노여움이 잔뜩 흘러나왔다.
“발본색원하여 뿌리부터 모조리 뽑아야 하오. 이 일은…….”
“내가 맡겠네.”
송준길이었다.
그의 표정은 참으로 어두웠다.
며칠 전 내게 진심으로 관리를 대변했는데 매점매석(買占賣惜)이 발생했다. 묻고 듣거나 보지 않아도 속이 엉망진창이라는 건 뻔한 일이었다.
송준길의 눈동자에서 번뇌가 느껴졌다.
섣불리 대답하기가 머뭇거려졌다.
이를 느꼈을까?
“한 치의 의혹도 남기지 않을 것이네. 복잡한 원칙도 따지지 않을 것일세. 작은 움직임도 책임을 물어 엄히 벌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
“또한, 이 일은 원래 사헌부의 일일세. 미리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여 사헌부의 역할이 사라지는 건 아닐세. 그러니 내 말대로 하게.”
“그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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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안이 어디까지 번질지는 가늠할 수 없으나, 이런 일을 보고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입궐하여 걸어갈 때였다.
“몇 번을 말하느냐!”
화가 잔뜩 난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열 살이나 되었을 어린아이가 내관과 궁녀들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짜증을 퍼붓고 있었다.
바로 이연의 외아들, 역사에서는 숙종으로 유명한 이순이었다.
무려 세자가 화를 내니 모두 어찌할 바를 몰라서 진땀만 흘리고 있었다.
또, 이순은 부왕인 이연과는 달리 성질머리가 아주 더러웠다. 진짜 한 번 잘못 걸리면 미친개처럼 물어뜯고 성질을 내니, 제대로 버텨내는 사람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린애 노는 데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지라 대충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건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이리 와서 내 말을 좀 들어주겠습니까?”
이순이 그새 나를 보고 불렀다.
아무리 나라고 할지라도 세자의 말을 대놓고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하.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대충 다니고 싶은데 계속 의관으로 입을 대니 참으로 답답하지 뭡니까?”
“저하께서는 응당…….”
“똑같은 소리는 지겹습니다. 내관과 궁녀들을 물려주세요.”
“저하. 내관의 말은 지겨운 게 아니라 옳은 것입니다. 들으셔야지요.”
“내가 그런 말이나 들으려고 불렀겠습니까?”
“…….”
송시열이 된 이후 나를 이렇게 몰아치는 상대는 또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원 역사에서 송시열은 숙종 이순에게 죽었다.
그러니까 나와 상성이 아주 별로라는 뜻이다.
됐다. 내가 지금 어린애와 이런 실랑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세자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 너무 바쁘다.
“하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허. 내가 아직 말하고 있는데 어디를 간다는 겁니까.”
“…….”
무시하고 가려는데
“감히.”
이순이 두 음절을 내뱉었다.
그래도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
“여기 계셨소?”
언제 다가왔는지 뒤에서 이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예를 취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데 조금 전만 해도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던 이순은 순식간에 열 살의 아이가 되어 있었다.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참으로 영악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연은 나와 눈인사를 한 뒤 이순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세자.”
“예. 아바마마.”
“새겨듣거라.”
“예. 아바마마.”
이연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대신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면 너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목소리는 싸늘했고, 내용은 살벌했다.
당황한 이순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조금 전의 내 말을 금과옥조로 여겨야 할 것이다.”
“아, 아바마마…….”
“누가 너에게 나를 불러도 좋다고 허락하였느냐? 나는 너에게 새겨들으라고 일렀을 뿐이다. 네가 감히 군왕의 어명을 어기는 것이냐?”
“아, 아니옵니다.”
이순이 아무리 성질이 개차반이라고 할지라도 부왕인 이연의 말에 토를 달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었다. 이건 처세나 영악함이 아니라 그냥 본능의 구현이다. 이순의 나이와 무관한 현상이라고 봐야 했다.
“조선의 대신은 네가 살아온 짧은 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세월, 이 땅의 백성을 지키고자 수명을 단축하며 버티고 있다. 한데, 감히 네가 세자라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세 치 혀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소, 소자가……?”
“소자?”
“……신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나 역시 대신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늘 묻고 새기거늘 네가 감히…….”
이러다가 애 한 명 잡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질게 혼쭐냈다.
그런데 굳이 나서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훗날 네가 보위에 오르게 되더라도 오늘 내 말을 심장에 새겨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그리하겠사옵니다.”
“그 말이 끝이더냐?”
이순은 참으로 총명한 아이다.
그래서
“본부장 대감께 사죄드립니다.”
이연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나는 가볍게 묵념하듯 고개를 숙이며 화답할 뿐이었다.
구태여 여러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본부장.”
“예. 전하.”
“경이 세자를 직접 가르칠 시간은 없으나 사부가 되어 눈에 보이면 늘 꾸지람을 내려주시오.”
“전하. 신은 그럴 여력이 없사옵니다. 한마디 하는 시간도 아껴야 하옵니다. 그러니 거두어주시옵소서.”
“하면, 그냥 사부라고 생각만 하고 계시오. 기록에만 남기리다.”
“그리하시옵소서. 하옵고 전하.”
“대강의 사정은 들었소.”
이연은 쓰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경의 뜻이 곧 나의 뜻이오. 그리고 나의 뜻도 경의 뜻과 같길 바라오.”
“…….”
뜻 모를 소리였다.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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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의 감찰은 빠르게 진행됐다.
법도가 굳건하기에 하나를 진행할 때도 절차가 많은 조선이었으나 송준길이 이를 다 무시하고 정황만으로 사실상 압수수색에 가까운 방법을 동원한 결과였다.
단 며칠 만에 십수 명의 관리가 사재기의 범인으로 잡혀 왔다.
주변은 이미 인산인해였다.
이번 일을 확실하게 알리고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
당혹감을 느낄 정도로 뻔뻔했다.
그런데 송준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에 내가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 쌀값을 폭등시켰다. 한데도, 참으로 당당하도다.”
“쌀값을 폭등시킨 게 아니라 쌀을 구했을 뿐입니다. 대체 왜 죄가 되는 겁니까.”
“너희가 쌀을 대량으로 구하여 쌀값이 폭등한 것이다. 이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이냐?”
“하면, 이대로 굶어 죽어야 합니까?”
“뭐라?”
“관리라고 하여, 사대부라고 하여 굶어야 하는 것입니까?”
관리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가득 차오른 상태였다.
“곳간이 비었습니다. 녹봉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패물 따위를 팔아 쌀을 구했습니다. 소직만 이러한지 아십니까? 많은 관리의 처지가 비슷합니다. 한데, 이것이 죄가 됩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이들의 말도 쏟아졌다.
“대체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관리는 처자식이 없고 부모가 없습니까?”
“내어줄 수 있는 건 모두 내어주었습니다.”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모르기에 미리 쌀을 구한 게 전부입니다.”
항의는 아니었다.
하소연이었다.
“본가의 곳간도 이미 바닥을 보였다고 합니다.”
“백성을 구휼하느라 다 사용한 결과이지요.”
“대감. 묻고 싶습니다. 대체 관리는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겁니까?”
“백성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건 알겠습니다. 한데, 어디까지 양보해야 하는 겁니까.”
“진정 우리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까?”
물기가 묻은 절규였다.
이연의 뜻 모를 말이 떠올랐다.
-경의 뜻이 곧 나의 뜻이오. 그리고 나의 뜻도 경의 뜻과 같길 바라오.
그는 이를 내다본 것이었다.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나 역시 알고 있다.
이들 역시 기근에 허덕이는 이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짐이 아니겠는가.
백성과 같은 위치에 선다면 우리는 위정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무겁나?”
“그렇습니다.”
“위정자로서의 무게가 무겁나?”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려놓도록 하라.”
“예……?”
진심이었다.
평시와 난세의 위정자가 어깨에 올린 무게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 위정자가 감당해야 할 무게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감당할 수 있겠으나, 누군가는 숨이 막힐 정도로 버거울 수도 있다.
힘겹다고 외치는데 어찌 책망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관리들을 바라봤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었다. 무려 200년의 세월을 양반이 잘 지탱했다. 부족한 점도 있었으나 이만하면 훌륭하게 이끌었다. 나는 진실로 이렇게 생각한다.”
“…….”
“감당하지 못하는 무게를 솔직하게 말하는 너희를 어찌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되돌아본다. 조선이 시작될 때 이 땅의 난세를 치웠던 선대의 열의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고민이었다. 어쩌면 너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위정자의 특권을 스스로 내린 것이니 말이다. 이 결정은 기어이 선대만큼 위대할 것이다.”
나는 오늘 양반에게 백기를 권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잘했다고 말하며.
이 또한 진심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언제 위정자를 논할 때 이렇게 눈시울이 붉어졌는지 모르겠다.
“내려놓거라.”
“…….”
“탓하는 게 아니다.”
“…….”
“작금의 난세는 양반‘만’이 감당할 수 없으니 내려놓거라.”
나는 다시 자발적인 위정자 교체를 권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양반을 대표할 자격이 있기에 권하였다.
“이는 가장 아름다운 낙화(落花)일 것이니라.”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윤휴가 관리들이 앞에 섰다.
그의 표정은 비장하였고, 경건했다.
“대감의 말씀처럼 아름다운 낙화라면 참으로 좋겠지요.”
“…….”
“그러나 우리는 떨어지지 않고자 마지막까지 추하게 버티겠습니다.”
“백호.”
“이 또한 위정자의 책무가 아니겠습니까.”
“…….”
“아집이 아닙니다. 힘에 부친다고 하여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들의 생존을 탓하지 마십시오. 이들은 최선을 다하여 중대본을 지탱하였습니다.”
비가 내렸다.
오늘의 대화는 하늘이 멈추게 했다.
비가 온다는 건 우리가 지금 달려야 한다는 걸 의미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말했다.
“다시 일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