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한 수를 먼저 두다
간절하게 기다렸던 비가 내렸다.
한 방울, 두 방울이 아니라 장대비가 쉬지 않고 내렸다.
몇 달간 이어진 봄 가뭄이 만든 지옥을 단번에 끝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백성들은 너도나도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너무 기뻤다.
숨을 쉬며 살아간다는 건 이토록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비가 온다고!”
“그래! 하하하! 비가 오고 있어!”
“암! 드디어 비가 와!”
“내가 이 맛에 농사를 짓는다고!”
“암! 이래서 농사를 지을 만한 게 아니겠는가?!”
모든 백성이 거리로 뛰어나와 비를 다 맞았지만 불편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들 모두 비에 맞았을 때의 축축함을 느끼고 싶었다.
이 축축함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하하하! 이 사람들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파종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늘 곁을 지키던 승려들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다가왔다.
백성들의 눈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대사! 지금은 그냥 비를 맞으며 춤추고 싶습니다!”
“이런! 내가 괜한 말을 해서 흥을 망쳤나 보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 그러지 마시고 대사께서도 이리 오시지요!”
백성들은 기다리지 않고 앞다퉈 승려들에게 달려갔다.
얼떨결에 백성의 손에 이끌려 함께 비를 맞게 된 승려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토록 즐겁고 반가움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오늘처럼 너무나도 좋은 날은 함께 만끽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백성들의 손길은
“영감께서는 어찌 지켜만 보십니까!”
“예! 어서 오십시오!”
목민관을 향해서도 뻗어졌다.
평소 늘 어려워하던 백성들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현령은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거침없이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백성들의 다가옴을 싫어할 위정자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다.
현령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 가야지! 오늘은 공무를 잠시 잊고 자네들과 함께 어울려야지! 자네들은 뭐하나? 함께 즐기게!”
향리들도 못이기는 척 백성들의 손에 이끌려 비를 함께 맞았다.
참으로 기쁜 날이었다.
오늘은 비가 내렸으니 말이다.
“하하하! 늘 오늘만 같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늘 오늘만 같기를 바라였다.
진심으로.
그리고 늘 오늘과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며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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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바랐다.
하늘이 비를 한 방울이라도 내려주기만을 말이다.
제발 가뭄을 극복하게 해달라고 바라였다.
하늘은 무심하기만 한 게 아니었기에 늦게나마 기꺼이 비를 내렸다.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평생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
승려와 서얼, 사족과 관리 그리고 향리와 백성은 모든 걸 잊고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며 환호성을 질렀다.
신분과 계층을 떠나서 모두 함께 어깨를 붙잡고 뛰며 즐거워한 순간은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모두 눈물을 흘리며 손을 부여잡으며 얼싸안았다.
그랬던 시간은
“…….”
“…….”
“…….”
오래가지 않았다.
첫날, 종일 내렸던 비는 축복이었다.
둘째 날, 종일 내렸던 비는 환희였다.
셋째 날, 종일 내렸던 비도 축복과 환희였다.
여기서 그쳤어야 했다.
그러나 비는 멈추지 않았다.
넷째 날도, 다섯째 날도 그리고 열흘째에도 비가 쉬지 않고 쏟아졌다.
심지어 오늘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환희와 축복은 절망과 좌절로 바뀌고 있었다.
아니, 이미 재앙으로 바뀐 상태였다.
누구도 웃지 않았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모두 함께 기뻐했던 시간은 정말 의미조차 없었다.
세상은 다시 지옥이 되었다.
“너무 즐거워했어…….”
“우리가 너무 좋아해서 하늘도 기뻤던 걸까?”
“우리 탓이야…….”
“흑…….”
끝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분명 더 흘릴 눈물이 없었는데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이는 봄 가뭄을 끝낼 비가 내렸을 때 백성의 마음에 다시 희망이라는 몹쓸 감정이 피어올랐기에 발생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짧은 며칠이 백성에게 다시 눈물이라는 불필요하고 고통스러운 존재를 품게 한 것이다.
이는 참으로 비극이었다.
눈물이 절반은 삼킨 백성의 눈동자에는 폭우가 만든 ‘바다’가 보였다.
아직도 맹렬하게 하늘이 쏟아내는 폭우는 세상을 제 마음껏 ‘바다’로 만들었다.
강이 범람하여 사람의 발이 닿을 수 있는 곳은 자갈과 모래로 뒤덮인 상태였다.
밭은 물에 잠기었고, 논은 강이 되었으며, 강은 바다였다.
이곳은 분명 내륙이었으나 이제는 바다였다.
평생 두 발로 걸으며 살아온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곳이었다.
“내가 너무 신나서 그래…….”
“우리가 너무 웃고 떠들어서 하늘이 노하신 거야…….”
백성은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하늘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원망할 뿐이었다.
그저 즐거워했던 단 며칠의 시간을 죽도록 반성하며 후회했다.
더는 이곳에 슬픔은 없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회한만 존재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모습이었으나 현실이었다.
“영감.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유생의 물음에 윤증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의 비극을 바라보고 있으면 흥겹게 춤을 추던 며칠이 도저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수백 년 전의 일을 기록한 사서를 본 것만 같았다.
“멀쩡한 곳이 없네. 백성을 대피시킬 곳이라고는 없다는 말일세.”
윤증의 말처럼 이미 고을의 민가 중 멀쩡한 곳은 없었다.
비에 잠겼으며, 고을 근처의 산이 만들어낸 엄청난 흙더미와 돌 따위의 산사태에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익사하거나 산사태로 죽은 백성의 수가 수십 명입니다. 장례도 제대로 치를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
“조금 전에 알아봤는데 구휼미도 모두 침수되었다고 합니다.”
“…….”
“사족의 곳간도 사정이 어렵다고 합니다.”
“…….”
“선생.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상황입니다.”
더는 생존을 도모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성현의 학문을 아무리 익히면 무엇 하는가. 막상 백성의 어려움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무기력함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꼈다.
과거 대청 외교를 주도하고, 성현의 위패를 불태우며 실학을 주창했던 건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말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길을 다시 걷기로 했다.
“유생을 다 집결시키게.”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네. 사대부의 사가를 점거하게. 알아서 협조하면 좋겠으나, 세상이 더 혼탁해졌으니 반발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네. 강제로 치워버리게.”
“서, 선생. 반발이 클 겁니다. 역병이 창궐했을 때보다 상황이 더 안 좋습니다.”
역병이 창궐했을 때 사족은 병자의 수용을 격렬하게 반대했다가 윤증의 압박에 결국 물러섰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전면적인 협조는 아니었고, 외곽에 존재하는 사족의 거처 따위의 병자를 격리하는 수준이었다. 당장 급한 상황이었기에 타협점을 찾으며 서로 양보했다.
도성에서 어떤 답변이 왔다면 또 모를까, 역병과 폭우가 조선을 집어삼키는데 서찰이 빠른 속도로 오고 갈 수는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현재 상황은 전과 비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장 사대부끼리도 손을 보태야 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러니까 사대부도 내일을 장담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보게. 내가 어제 그리고 오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는가?”
“…….”
“어쩌면 잘되었다는 생각이었네.”
“예……?”
“병자가 모두 죽어서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었네.”
“선생…….”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은 윤증이었기에 눈물이 흐르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목소리에 구슬픔은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다.
“하아. 어차피 감당할 수 없는 병자였네. 격리하는 게 전부였고, 점차 늘어나는 병자의 수는 너무나도 큰 부담이었지 않은가. 그래서 내심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네. 어떤가? 민본을 부르짖던 사대부의 속내치고는 참으로 가증스럽지 않은가?”
“…….”
“그래서 하는 말일세. 내가 하늘의 횡포에 무릎을 꿇어 현실과 타협하여 사대부로서의 본분을 버리기 전에 나를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일세.”
윤증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각오와 결심이 가득했다.
“위정자가 지독한 현실에 무릎을 꿇어 백성을 괴롭히고 탓하며 포기하면 위정자의 자격은 상실하는 것일세. 그러나 백성을 구하고자 다른 위정자를 억압하는 건 가능한 일일세. 나는 더는 괴물의 생각을 가질 수가 없기에 사족을 탄압하고자 하네.”
“알겠습니다. 선생. 소생들이 나서겠습니다.”
“서두르게 빗줄기가 더 굵어지고 있네. 최소한 백성이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있어야지. 생존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법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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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쉬지 않고 쏟아졌다.
특정 지역이 아니라 조선을 아예 집어삼킨 수준이었다.
조선의 영토가 바라보는 하늘은 모두 먹구름을 동반하며 미친 듯이 횡포를 부렸다.
기록적인 폭우에 도성에서도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경복궁의 담벼락이 무너졌고 백성이 흙더미에 깔려 죽었다.
또한,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청계천은 끝내 범람하고 말았다.
“기장, 목화, 생마 그리고 모……. 모두 썩었소.”
“공문서가 소실되는 건 필연적이오.”
그리고
“대감. 어선의 3할이 전복되었습니다.”
변승업의 어선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숨을 내쉬며 유형원을 바라봤다.
“위생국은 운영은 어떠한가.”
“스승님이 떠나기 전 이르셨던 방침에 따라서, 역병의 창궐에 대비하는 위생과 역병 외의 병마와 싸우는 백성을 살필 의원으로 나눠서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탈은 없는가?”
“판단이 적절했습니다. 폭우가 시작되자 여러 병마가 번졌습니다. 역병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방치했다면 상당수의 백성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건데 조기에 살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생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도성에서 가장 위생이 잘 이루어진 곳은 누가 뭐라고 해도 동부지역이었다. 이 시절 다른 지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청결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장 큰 비결은 역시 인분을 외부로 방출하기 때문이었다.
유형원은 그동안 꾸준히 도성은 다른 부에도 인분을 외부로 방출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자 노력했고, 위생국의 위생 인력까지 힘을 보태자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는 그칠 것이오.”
비가 내리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리는 비를 우리가 무슨 수로 막겠는가.
우리는 비가 그친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아직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나 상당히 많은 군현이 이번 폭우로 구휼미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외다.”
“그렇겠지요. 유례없는 규모이니 피해가 상당할 것이오.”
허적이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가 그치는 즉시 각도마다 구휼미 20만 석을 운송하겠소. 그리하여 구휼미의 부족으로 유민과 기민이 발생하는 건 최대한 막아야 할 것이오.”
그리고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예상되는 문제가 또 뭐가 있을까.
장마가 내렸으니 또 무엇이 발생할 것인가.
역시 역병이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른다.
그냥 스친 생각이 있었다.
“반계. 우역을 대비할 수 있나?”
“어렵습니다.”
“하면, 모조리 도살하게. 그래서 백성에게 나누시게.”
“예?”
“물론, 민가의 소를 도살할 수는 없을 것이네. 그러나…….”
나는 어렵사리 변승업의 눈을 쳐다봤다.
“조정의 소는 도살하게. 난리가 끝나고 우경이 완벽하게 몰락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이를 집행하게. 우역에 걸려서 죽느니 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게 백 배는 나으니까.”
이번에는 무조건 한 수를 먼저 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