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부디 조선을 버리지 마소서(1)
백성들은 눈을 껌뻑였다.
쉬지 않고 계속 껌뻑였다.
“아니…….”
나오는 말이 별로 없었다.
너무 놀라서 그랬다.
“그러니까 지금, 소를 잡아서 먹으라는 겁니까? 아니, 우리 소는 그냥 둬도 되고, 목장의 소를 도살하라는 겁니까?”
“몇 번을 말하나? 다 잡아먹게.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
어제보다 오늘이 힘들고, 오늘보다 내일이 힘든 세상이었다.
숨을 쉬는 것도 버거운 난세였다.
그래서인지 관청에서 알뜰히 챙기느라 이것저것 챙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목장의 소를 도살해서 먹어도 된다는 말은 너무 뜻밖이었다.
소가 얼마나 귀한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고, 이유가 너무 궁금했다.
듣도 보도 못한 재해가 발생하긴 했으나 아직 굶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소를 잡으라고 하니 정말로 이유가 궁금했다.
“이유라니? 조정에서 백성들에게 고기나 먹이라고 하셔서 그렇다네. 어차피 굶었을 때 먹으면 탈이 나는 게 고기가 아닌가. 그러니 쌀이 있을 때 고기반찬 먹이라고 하셨네.”
“…….”
“응? 왜 그러나? 먹기 싫으면 관두게. 내가 다 먹겠네.”
“아, 아닙니다.”
“아니, 영 내키지 않는 거 같아서 말일세.”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너무 좋아서 그럽니다. 너무 좋아서.”
백성들은 말을 더듬었으나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구경도 하기 힘든 쇠고기를 이 어려운 시절이 나눈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안 잡아먹고 그냥 주면 안 됩니까?”
“하하하. 왜? 경작할 때 쓰려고?”
“평생 꿈이 소 한 마리 가져보는 거였습니다.”
“이 사람아. 어림도 없네. 그랬다가는 너도나도 한 마리씩 달라고 할 건데 어디 감당이나 되겠는가?”
“그래도 아까워서…….”
“다 자네들 배로 들어갈 건데 뭐가 아깝다는 건가?”
“하하하. 하긴. 그렇지요.”
백성들은 못내 아쉬워했으나 이내 웃었다.
관리도 엷게 웃으면서 손을 훠이 훠이 저었다.
“내일부터 시작할 것이니 준비하시게.”
웃음을 찾기 어려운 시절, 그나마 웃을 일이 생겼다.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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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을 거둬들이고 씨앗을 뿌리는 절기에도 쏟아진 폭우였다.
벼는 여물지 않았고, 논밭은 침수됐거나 자갈과 모래만 가득했다.
봄 가뭄과 폭우가 연이어 발생한 이상 올해 농사를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불필요한 기대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백성이나 목민관은 한 톨의 쌀이라도 구하고자 눈물을 닦으며 일하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현장의 일이다. 중대본은 최악의 최악을 고려하며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바로 그래서 비가 멈추자마자 대대적으로 운송을 시작했다.
모두 배불리 먹일 정도로 넉넉한 건 아니지만, 아끼며 잘 배급하면 대규모 유민이 발생하는 건 막을 수 있으리라 판단되었다.
지금 생각하는 건데, 일찍이 수레를 제작해두지 않았다면 조선 8도에 동시다발적으로 운송하는 건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폭우로 장계의 글자가 모두 젖었으나 내용을 숙지할 수 있는 서얼이 최대한 결합하여 파발의 역할을 맡았기에, 전처럼 중앙과 지방이 단절되는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
분명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긴 했으나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은 분명하게 성과가 나오고 있었다.
끝없는 비극이 연이어 발생하는 난세에 이는 작은 희망으로 와닿는 것이었다.
다만, 우리를 가장 가슴 저리게 하는 일은 개혁이 만든 참사였다.
“산사태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소. 현재 산사태의 사상자가 수백 명에 이르고 있소.”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개혁이 아니었다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던 산사태가 곳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는 허적의 말대로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산사태가 발생했다.
이건 중대본 수립 이후 10여 년간 꾸준하기 추진한 벌목의 자율화가 만든 참사였다. 물론, 현대 장비를 동원하지 않는 이 시절의 벌목 수준으로 10년간 민둥산을 대량으로 만들어 낸 건 아니지만,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다른 이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함경도에서 장계가 올라왔소. 우박이 내렸소.”
“…….”
“황해도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이외에도 셀 수 없었다.
-평안도 우박
-경상도, 전라도 가뭄
-강원도, 황해도 우박
……
급기야 벼락에 맞은 사람도 많았다.
크고 작은 재해가 조선 전역을 뒤덮었다.
작다고 한들 상대적이었기에 그리 여겨질 뿐 모든 게 끔찍했다.
그러나 허적이 내용을 전달하는 데 그칠 뿐, 우리는 답변하지 않았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현재 중대본으로 보고되는 재해는 결국 기근으로 귀결되었다.
어찌 들릴지 모르지만, 구휼미를 내려보내는 수준으로 최악은 차단했다. 그 외로 발생하는 문제는 군현에서 관리, 사족, 승려 등이 일치단결하여 극복해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속이 새카맣게 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수시로 접하더라도 관성에 젖을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경기도에서 우박이 내리고 황충이 발생했소. 이건 해결해야지요.”
“당장 훈련도감에 일러 닭과 오리를 운송하라고 전하리다.”
“이미 사람을 보냈소.”
“참으로 기민한 대처였소.”
“과찬이오. 병충해의 피해가 없을 수는 없겠으나, 조기에 대처하였으니 그나마 덜할 것이오.”
할 수 있는 건 빠르게 대처해야 했다.
듣던 유형원이 말을 꺼냈다.
“구휼미를 더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정은 자네가 잘 알 것이네. 한데 그 말을 한 이유는, 무역의 성과가 있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소생이 오늘 변 영감과 파악했는데, 도마다 5만 석은 더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군. 여력이 된다면 구휼미를 아낄 필요는 없지.”
“하면,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리하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언제 다시 추위가 기승을 부릴지 모르오. 이 또한 잘 챙겨야 할 것이외다.”
할 수 있는 건 선제적으로 방어하는 게 우리의 몫이었다.
아직 이 정도는 해볼 만했다.
그리고 허적이 나를 힐끗 보며 피식 웃었다.
그 미소를 본 나도 피식 웃었다.
그러자 유형원도 웃었고, 윤휴도 웃었다.
윤선거, 윤선도 그리고 송준길과 변승업도 웃었다.
모두 피식 웃었다.
가벼운 미소조차 쉽사리 담을 수 없는 세상이었기에 그냥 엷게 웃었더니 이유도 없이 전염되듯 번진 것이었다.
분위기는 정말 오랜만에 따뜻했다.
험난한 세월이었으나 이 정도의 짧은 웃음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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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앉은 농민들은 대성통곡했다.
손이 망가질 만큼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소가 왜 죽어. 소를 왜 죽여!”
“내 소…….”
“삼시 세끼를 굶어도 소여물은 챙겼는데…….”
우역이 크게 번져 고을의 소가 모두 죽어버렸다.
그들이 손을 떨며 바라보는 곳에는 십수 마리의 소가 죽어 있었다.
평생 소 한 마리로 농사를 일군 농민들은 세상이 무너진 듯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었다.
“내가 소를 구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
“네가 왜 죽어…….”
“못 묻어. 그냥 이렇게 둘 거야.”
눈물이 마를 새가 없는 세월이었으나 비만 내리면 혹은 비가 조금만 적게 내리면 다시 소를 끌고 경작할 수 있다. 그날만 기다리며 굶어도 소여물은 챙겼고, 아파도 소를 걱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었다.
올해 제대로 경작도 하지 못하고 그냥 죽어버렸다.
지켜보던 현령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향리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모두 잘 매장하게. 죽은 소를 그냥 둘 수는 없으니.”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쉽게 물러나겠습니까.”
“어찌하겠는가. 잘 다독여야지.”
백성들이 소를 얼마나 아꼈는지 모를 수가 없기에 현령이나 향리나 모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듣자니 인근 고을의 소도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 황해도에서만 수백 마리가 우역으로 죽은 것 같습니다.”
“……하늘은 어찌 이렇게 끔찍하게 우리를 괴롭히는가.”
현령은 한탄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그런데
“…….”
“…….”
얼굴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현령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서리가 내립니다.”
가뭄과 폭우에 이어 우역으로 민심이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 서리까지 내린다.
현령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백성을 모두 해산시키게. 아니, 혹시 모르니 온돌을 설치한 시설로 이동하게 하는 게 좋겠네. 그곳에는 승려들이 있으니 알아서 백성들을 잘 위무할 것일세.”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으으으…….”
“허으윽…….”
“커흐윽…….”
울부짖던 백성 몇 명이 갑작스레 고통을 호소했다.
모두 당황하였을 때 죽은 소를 살피던 승려 한 명이 차분하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이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현령을 쳐다봤다.
“염병(染病)입니다.”
“뭐……?”
역병까지 창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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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허적은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도 화답하듯 웃었다.
“목장의 소를 나누니 백성들이 태평가를 불렀다고 하오. 귀한 짐승이지만 이 어려운 세월 그렇게라도 백성들의 기쁨을 볼 수 있으니 참으로 즐겁소.”
모처럼 웃었다.
재해를 극복했다는 내용은 아니지만, 소를 도살하여 잠시라도 백성들이 시름에서 벗어났다고 하니 우리도 그저 웃음이 나왔다.
더 방긋 웃으며 말하려고 할 때였다.
우리가 웃는 게 보기 싫었던 것일까?
사색이 된 관리가 장계를 올렸다.
“경기도에서 우역이 발생하여 100여 마리의 소가 죽었습니다.”
역시 우역이 발생했다.
이 시절 백성에게 소는 최대 재산이었다.
고을마다 대성통곡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규모가 크지 않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지금부터라도……
“황해도에서 우역이 발생하여 죽은 수가 무려 8천 마리에 이릅니다.”
애석하게도 지금부터라는 건 없었다.
이미 광범위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또한, 서리와 바람에 나무가 부러졌으며…….”
웃음이나 미소 따위는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황해도에서 염병이 발생했습니다.”
“뭐라……?”
“현재 파악된 병자만 500여 명입니다.”
“자, 잠시.”
나는 혼란스러워서 말을 더듬었다.
“종래 정체를 알 수 없는 역병이 번지고 있다. 이것과는 달리 염병이 확실한가?”
“고을의 승려들과 의원들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역병이 아니라 염병이라고 했습니다.”
“…….”
말 같지도 않게 두 가지 역병이 동시에 번지고 있었다.
정말 최악이었다.
이를 악물며 유형원을 바라봤다.
“반계. 염병일세.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니, 해야 하네. 무조건.”
만일 이를 차단하지 못하면 조선은 역병 왕국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입니다.”
유형원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염병은 조선이 오랫동안 겪었던 역병입니다. 위생국에서는 처방과 약재가 가득합니다.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좋아. 당장 위생국의 의원을 보내게. 약재를 모두 사용해도 좋으니 무조건 역병을 잠재워야 할 것일세.”
“응당 그리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어이 해내야 했다.
이게 우리의 존재 이유였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