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부디 조선을 버리지 마소서(2)
한심했다.
너무 한심했다.
역사를 알고 있으면서 대체 뭐 하나 제대로 방비하는 게 없지 않은가.
왜 우역을 뒤늦게 떠올렸단 말인가.
그래서 결국 한발 늦어버렸다.
아니다.
이건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슨 수로 수천 마리의 소가 죽어 나가는 대규모 우역을 막아낼 것인가.
그래. 애초 작금의 난세는 개인의 역량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국의 역량과 관련이…… 됐다.
이런 번잡한 생각으로 자책이나 할 때는 아니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끔찍한 성적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으니 말이다.
“우역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소. 며칠 새 황해도에서 1천 마리가 더 죽었소.”
우역은 정말 기하급수적으로 번져나갔다.
황해도와 비교할 수는 없으나 경기도의 우역도 심상치 않았다.
어차피 우역으로 죽을 소라면 잡아먹는 게 나으니 도살 명령을 내린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규모라는 건 심각한 문제, 아니, 조선 사회의 본질을 짓누르는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조선의 농업이 무너질지도 모르오.”
허적이 괜한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소 한 마리는 장정 아홉 명의 몫을 한다.
그런 소가 수천 마리, 수만 마리 죽어 나간다는 건 농촌 사회의 지각 변동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몇 년 후가 아니라 당장 올해, 내년 농사부터가 문제였다. 엄청난 차질이 발생할 건 불 보듯 뻔하다.
모두 무거운 한숨을 쉴 때였다.
“소인이 상단에 일러 청국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쌀을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변승업의 담담한 목소리가 중대본을 울렸다.
“상인들도 상황은 파악하고 있기에 다른 물품은 제쳐두고 쌀을 구하는 일에 전폭적으로 협조하고 있습니다.”
“…….”
“만석이 아니라 십만 석, 십만 석이 아니라 백만석을 구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
다소 원론적인 말일지도 모른다.
상인들의 노력에 대해서 전하고자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우리, 아니, 양반들이 우역의 확산을 보며 실질적인 대책이 아니라 한숨만 쉴 때 변승업이 질타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늘 우리가 말했듯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질책이었다.
이게 맞다.
어차피 우리가 하늘이 난리 치는 것 자체를 막아낼 수는 없다.
지금 이뤄지고 있는 모든 비극은 결국 기근으로 연결되는 것이니, 우리는 기근 대비 즉 구휼미 확보에 전념하는 게 옳았다.
폭우가 올지라도, 폭설이 올지라도, 무엇이 올지라도 기근 대비가 핵심이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순간 아니, 부족한 순간이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변승업에게 말했다.
“자네가 제일 낫군.”
진심이었다.
모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변승업이 다소 당황했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듯 가볍게 헛기침한 뒤 말했다.
“군현마다 죽은 소는 최대한 빨리 매장하도록 하겠소.”
“옳습니다. 바로 매장해야만 우역이 번지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계. 말하게.”
“지금처럼 광범위한 우역에는 큰 효과가 없겠지만,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을 최대한 빨리 보급하는 것도 방법이긴 합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바대로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재 우역이 모두 같은 것인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우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해보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필사해서라도 군현에 보내야겠지. 가능하겠나?”
“해내야지요. 그리고 염병은 군현에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아직 사망자가 없으니, 위생국 의원들이 당도하면 조기에 제압할 수 있을 듯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래. 이렇게 하나씩 극복하면 언젠가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무거운 마음을 다시 밀어냈다.
오늘은 머리가 너무 뜨거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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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과 역병 그리고 가뭄과 홍수.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소가 모두 죽었다.
하늘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해버린 것이다.
구휼미를 바랄 수도 없었다.
관청의 곳간이 모두 침수되어 쌀이나 콩 따위가 모두 휩쓸려갔기 때문이었다.
수십 명이 사는 작은 고을이었으나 쌀 한 톨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모두 굶주렸다. 관청에서는 어떻게든 수를 쓰고 있었으나 뾰족한 수가 있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사족의 곳간도 재해로 상하여 무언가를 바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면 서슬 퍼런 역병이 다가오는 것만 같은 세월이었다.
모두 삶의 의지를 잃었으나 지독한 굶주림은 생존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람을 절박함의 벼랑으로 밀어내는 위력을 낼 때가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랬다.
“어, 어서 파야 해.”
“빠, 빨리…….”
달빛도 제대로 비추지 않는 밤에 여섯 명의 장정이 땅을 파고 있었다. 혹시 누가 보거나 다가올까 두려운지, 수시로 주변을 살피며 쉬지 않고 손발을 움직였다.
땀 범벅이 된 그들이 한참이나 땅을 파자 묵직한 무언가가 모습을 보였다.
“어, 어서 꺼내.”
“끄, 끌어올려. 어서.”
장정 6명이 악을 쓰며 땅에서 끌어 올린 건 바로 우역으로 죽은 소였다.
그러니까 이들은 매장된 소를 다시 파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먹을 건가?”
우역에 걸려 죽은 소를 먹을 생각이었다.
“그래야지. 소를 어떻게 옮기나.”
“괜한 짓 하다가 누가 보면 골치 아파져.”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의 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직 허기를 해결하기 위한 본능으로 손과 발이 움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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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전례 없는 가뭄이었으나 생존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텼다. 하늘은 무심하기만 하지 않았기에 비를 내렸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짧았다. 비는 내리는 게 아니라 하늘이 퍼붓는 수준이었고,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나 이어졌다. 전답 중 침수하지 않은 곳이 없었기에 기근은 확정적이었다.
그랬다.
그랬는데
“…….”
“…….”
“…….”
저 멀리 먹구름이 보였다.
아니, 먹구름이 보이는 게 아니라 무언가 다가왔다.
그것은
-파와와아아아아악!
-파와와아아아아악!
-파와와아아아아악!
거대한 파도였다.
지켜보던 백성들은 불안함 아니, 공포를 느꼈다.
엄청난 강풍에 몸을 가누기도 어려워졌다.
굳은 다리를 힘겹게 움직여 뒷걸음을 쳤으나 바람을 감당하지 못하여 쓰러지는 이가 허다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경고하듯 하늘은 엄청난 굉음을 동반한 천둥 번개를 내렸다.
그 순간 백성들은 미친 듯이 해안가를 벗어나기 위해서 달렸다.
미친 듯 온 힘을 다하여 달렸다.
오직 생존을 위하여.
아니, 본능이 시키는 대로 달렸다.
그러나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파도는 달려가던 백성을 순식간에 삼켰다.
아니, 해안가 전역을 삼켰다.
이 순간, 육지가 사라졌다.
동시에 남아 있는 육지를 향하여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강풍과 폭우가 쏟아졌다.
두 발 혹은 네 발의 모든 움직임은 생명을 박탈당했고, 땅에 뿌리 깊게 박혔던 나무는 모조리 부러지고 뽑혔다.
누각은 뽑혔고, 민가도 침수됐다.
강풍이 돌진하면 뒤를 이어 폭우와 파도가 모든 걸 집어삼키고 없앴다.
또한, 하늘에는 태양이 있었으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분명 백주였거늘 밤과 같이 어두웠다.
지금껏 이 섬의 기록에 존재하지 않은 위력의 태풍이 강림했다.
그리고 제주의 초목은 모조리 소금에 절여져 생기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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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압도적인 무언가가 거대한 위용을 과시하며 다가왔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피해야 했다.
움직여야 했다.
달려야 했다.
머리로는 백 가지 외침이 있었다.
그러나
“…….”
“…….”
“…….”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 재해로 삶의 의지가 상실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움직일 힘도 없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다가오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몸이 굳은 걸까?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직 바다의 움직임만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육지를 집어삼켰다.
해일(海溢)이었다.
백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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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가 떨렸다.
정말로 치가 떨렸다.
어찌 이토록 지독할 수가 있을까.
“태풍으로 인해서 제주도의 산과 들은 바닷물이 뒤덮었소. 초목은 소금에 절었으며, 서리나 눈에도 죽지 않는 소나무, 대나무 등도 모두 말라서 죽었소.”
“…….”
“하아……. 직접 보시오.”
허적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지 장계를 내밀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받아서 내용을 확인했다.
“…….”
초목은 모두 생기를 잃었고, 먹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제주의 백성이 4만여 명인데, 모두 굶주린 상태요. 남은 곡식은 8천여 석에 불과하니 제주 백성의 운명이 풍전등화라오.”
제주 목사가 적은 글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만고에 없던 참혹한 재변이니…….”
눈을 질끈 감았다.
이보다 적합한 말이 어디에 있을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당장 구휼미를 보내야 하오.”
“먼 곳이니 조정만이 아니라 남해안에서도 운송해야 하오.”
“하면, 호판의 의견은 어떠하오?”
“조정에서 1만 석, 남해안에서 5천 석을 꾸려 보낸다면 당장 위기는 극복할 것이외다.”
비축한 구휼미의 수량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주도까지 운송하는 일 자체가 고난도였다.
그러니 무턱대고 무조건 많이 보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차분해야 한다.
침착해야 한다.
“다른 지역의 피해는 어떻소?”
“경상도의 낙동강은 침수됐소. 그리고 수백 채의 집이 침수되어 무너졌고, 빠져 죽은 백성은 셀 수가 없소.”
“전라도는 어떻소?”
“농지는 자갈과 모래로 엉망이라는 장계만 올라오고 있소. 여기에 서리까지 내리고 있으니 농사에 희망을 보이는 백성은 없을 것이외다. 그리고…….”
허적이 다른 장계를 내밀었다.
“철산, 평양부, 해주, 안악, 연악, 재령, 장연, 배천, 봉산, 창원, 웅천, 홍산, 김제, 강진에서 지진이 발생했소.”
“…….”
“또한, 정주, 가산, 선천, 삼화, 용천, 박천, 용강, 숙천, 곽산에서 해일이 발생하였소.”
하늘은 내릴 수 있는 모든 재앙을 퍼붓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비극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우역이 말은 물론이고 돼지와 닭에게도 번지고 있소.”
우역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병충해를 제압하던 닭의 절반이 죽었소.”
힘겹게 한 걸음을 걸으면 절망이 더 거대하게 우리를 밀어냈다.
열 걸음이나.
오늘은 천국이고, 내일이 지옥이구나.
그리고 내일도 천국이고, 모레가 지옥일 것이다.
그런데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하게 문이 열렸다.
사색이 된 관리는 나를 너무 힘겹게 만들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불안함이 엄습했다.
또 무언가가 더 있다는 불안함이 나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굶주린 백성이 매장한 소를 먹고 죽었습니다.”
“뭐……?”
“그 수가 100여 명을 넘었습니다.”
“…….”
“대감. 하늘이 조선을 버렸습니다.”
관리는 그대로 주저앉아 통곡했다.
너무나도 서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