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사실
애민(愛民).
조선의 위정자라면 누구나 심장에 새겨야 할 두 글자였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도 있으며, 미약한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조선의 위정자는 애민을 품고 살았다.
어쩌면 애민이라는 두 글자는 조선의 사대부가 유일한 위정자로 존재하게 한 가치일지도 몰랐다. 절망이 드리운 세상에서도 백성을 품고자 하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선 전역을 후려치는 작금의 태풍은 우리의 전의를 상실하게 했다. 또한, 태풍은 조선의 열악함을 적나라하게 꺼냈다. 아니다. 조선의 현실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지독할 정도로 아프게 깨우쳐 줬다.
어디 태풍만 그러했던가.
우역의 광범위한 확산은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을 마음껏 비웃었고, 역병은 우리의 개혁과 노력을 힘껏 조롱했다.
절망과 좌절의 시간이었고, 눈을 감고 싶은 고통이었다.
그래서 오늘 문무백관이 소집됐다.
이연의 어명으로.
멈추지 않는 걷잡을 수 없는 재해의 위력에 무너졌을까?
평소 늘 중심을 잡으며 강건함을 보이던 이연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용안은 수척했고, 눈동자는 초점조차 잃은 것만 같았다. 입술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고, 피부는 푸석했다. 만백성을 책임지는 군왕의 위엄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에 압살당하는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위정자가 모두 그랬다.
“왜구가 이 땅을 범하였을 때 우리의 선대는 말하였소. 태조 이래 최대 국난이라고.”
이연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니, 흔들리고 있었다.
“호란이 우리를 삼전도로 나아가게 할 때 모두 말하였소. 태조 이래 최대 국난이라고.”
애써 억누르고 있으나 흔들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인간의 일이었소. 해서, 싸워볼 수도 있었고, 방법을 마련할 수가 있었으며, 감당할 수 없다면 굴복할 수도 있었소. 하지만…….”
지쳤을까?
너무나도 힘겨운 것일까?
조선이라는 두 글자를 지탱하는 거인은 한참이나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사람이 아닌 그저 허공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작금의 난세는 대체 누구와 싸워야 하며, 어떤 방법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오.”
“…….”
“마련하여 싸웠으나 버겁다면 대체 누구에게 항복을 청해야 하오?”
넋이 나간 듯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는 이연의 말은 처연하게 이어졌다.
“이 난세를 끝낼 수만 있다면 삼궤구고두례를 못 하겠소? 이마가 터지고 피 칠갑이 될지라도 조아릴 것이오. 백 번이라도 그리할 것이오. 제발 조선을, 아니, 우리 백성을 살려달라고 애원할 것이오. 다리를 부여잡고 울부짖을 것이오.”
절절함을 담은 그의 말이 우리를 흔들었다.
누가 감히 이연의 감정을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가 감히 군왕의 말이 가볍다고 하겠는가.
그저
“한데…….”
현실이 너무나도 잔혹하지 않은가.
이를 감당하지 못한 거인의 목소리에는
“대체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야만 항복을 청할 수 있는 것이오…….”
결국, 물기가 담기고 말았다.
“항복을 청할 수도 없는 작금의 난세는 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누구도 답할 수 없었다.
끔찍한 현실의 무게를 마주한 건 이연만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억눌리고 젖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아니, 과인이…….”
이연이 ‘과인’이라고 했다.
이는
“과인이 죄인이오.”
작금의 난세를 제 탓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이 어찌 이연의 탓이란 말인가.
누가 감히 이연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조선의 역사기 시작된 이래 누구도 하지 못한 혁신과 개혁을 일궈낸 군왕에게, 과인과 죄인은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도 나설 수가 없었다.
우리의 군주가 죄를 청하고 있지 않은가.
그저 참담함에 흐느끼며 무릎을 꿇으며 쓰러질 뿐이었다.
고개를 숙이며 통곡할 뿐이었다.
“과인의 덕이 부족하여 발생한 일이오. 이 모든 건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덕(德)이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추상적인 가치란 말인가.
200년 조선을 견인한 덕치는 이미 우리가 역사의 무덤으로 보냈지 않은가.
10여 년, 중대본의 시간은 성리학이 세운 덕치의 역사를 완벽하게 벗어나게 했다. 모든 가치는 실효성이며, 정책은 현실의 극복이었다. 나를 수양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생존이 위태로운 난세였기에 덕치가 숨을 쉴 수 없게 했다.
우리의 시간은 분명 이러했다.
하지만 미증유의 재해는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난 인간이 찾는 건 합리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였다. 그래서 지금 이연은 ‘덕’을 언급하는 것이다.
작금의 사태가 얼마나 절망적인지 여실하게 말해주는 순간이었다.
그 한 단어는 우리의 실패와 직결하는 것이었다.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고 나서고자 할 때였다.
“전하…….”
물기가 가득한 목소리, 바로 허적이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울면서 외쳤다.
아니, 부르짖었다.
“전하께서는 자애로우신 성군이시옵니다. 신들이 아옵니다. 백성도 아옵니다. 천하가 알고 있사옵니다.”
오열하듯 말을 이었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과감한 개혁이 어찌 가능하였겠사옵니까.”
이연의 개혁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를 아득히 넘어서는 것들이었다.
누구도 하지 못한 강도였다.
“전하의 개혁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 나라 조선이 숨을 이어가고 있겠사옵니까.”
그 많은 개혁 중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조선은 숨을 헐떡였을 것이다. 처참하게 주저앉았을 것이다.
“하여, 모두가 알고 있사옵니다. 오직 하늘만 야박할 뿐이옵니다. 한데, 어찌 전하를 망국의 군왕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허적은 오열했다.
그가 이마를 땅에 박으며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신들도 볼품없으나 어찌 망국의 신하이겠사옵니까.”
그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것이다.
울며 속을 다스리고 있다.
나는
“전하.”
나는 알고 있다.
어찌하여 허적이 이토록 통곡하는지.
작금의 조선은
“200년 사직을 이어온 우리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옵니다.”
망국을 언급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최대 위기의 상황이었다.
우리는 모두 울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서러웠다.
너무나도 슬펐다.
경신 대기근은 우리의 10년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하나를 방비하는 것도 버겁고,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끔찍했다.
백성은 공포에 떨었고, 조정은 무기력했다.
조선은 두 글자만 존재할 뿐, 백성을 덮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의 시간을 살아가는 위정자는 모두 이러한 좌절에 허덕이고 있었다.
망국이라는 두 글자가 그들의 심장을 흔드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역사를 알고 있다.
조선의 종묘와 사직은 이어진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역사를 안다고 하여 오늘의 처절한 순간을 피할 수 있는가.
이 시간을 감히 함부로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역사를 안다고 말하는 오만에 불과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지금이 곧 역사가 아니던가.
우리가 숨 쉬는 이 공간이 역사가 아니던가.
그러기에 오만하게 우리는 버텨낼 수 있다고 떠들 수 없다.
조선의 멸망은 없을 것이라고 설쳐댈 수 없다.
그건 이 시절 ‘조선’이 품은 모든 가치에 대한 모독이다.
그건 이 시절 ‘조선’이 지탱하는 모든 이에 대한 반역이다.
그건 이 시절 ‘조선’을 위하는 존재에 대한 조롱이다.
누구도 감히 이 난세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나는 일국의 망국을 직접 보고 있지 않은가.
하여, 나는 말해야 했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니라 우리가 곧 역사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야 했다.
나는
“전하. 이는 전하의 탓이 아니옵니다. 또한, 신들의 탓도 아니옵니다.”
작금의 난세가 누군가의 부덕함으로 비롯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은가.
또한,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위대하였는지도 알지 않은가.
이를 말해야 한다.
“책임을 물을 필요도 없사옵니다. 항복을 이르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
“전하. 보시옵소서.”
오늘 우리는 봐야 한다.
아니, 역사는 기록해야 한다.
경신 대기근 시절 원 역사의 조선은 셀 수도 없는 관리가 사직을 청하였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도주하기 위해서.
그러나
“조정의 신료 중 공석은 없사옵니다.”
우리의 조선은 누구도 피하지 않았다.
이는 내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토록 타박했던 관리들이 모두 자리를 지켰다.
방향과 생각이 다를지라도 저들의 심장에 ‘애민’이 남아 있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중대본 10년의 세월은 이토록 값진 것이었다.
하여, 나는 계속 말해야 한다.
“어제는 실패했고, 오늘은 버겁지만, 내일은 다가오고 있사옵니다.”
“…….”
“하온데, 전하. 우리는 나아졌으며, 나아가고 있사옵니다. 실패하지 않는 길로 가고 있사옵니다. 이를 바라보셔야 하옵니다.”
나는 이제 노래해야 한다.
오늘의 시간을.
우리의 시간을.
“조선의 역사에 다시 없는 재해가 발생하였사옵니다. 하온데, 전하.”
좌절과 절망에 휩싸여 보지 못하였을 뿐, 우리는 절대 실패하지 않았다.
“올해 우리는 유민(流民)을 경험하지 않았사옵니다.”
“뭐요……?”
“감당할 수 없는 미증유의 재해가 몰아치며, 백성이 굶지만, 유민은 없사옵니다.”
중대본 초기, 작은 기근도 감당하지 못했던 조선은 수시로 유민이 발생했다. 그러나 경신 대기근이 시작된 올해 조선은 유민이 없다.
“냉해, 우박, 지진, 화괴(운석), 장마, 태풍, 역병, 우역……. 셀 수도 없는 재앙이었사옵니다.”
이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으니까.
“하늘이 미친 듯 횡포를 부리건만 이를 어찌 막겠사옵니까. 하오나 전하. 조선은 기근만은 감당해내고 있사옵니다. 이를 바라보셔야 하옵니다.”
우리는 가장 많은 백성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굶주림’을 방어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노력이 절대로 헛되지 않았다는 역사가 기록하는 증거다.
“전하. 부디 어심을 굳건히 하소서.”
나는 용안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무너져가던 이연의 눈동자에 열의가 담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막아내지 못한 게 아니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으며, 정치가 막아낼 수 있는 모든 걸 방비하고 있사옵니다. 이는 곧, 내일의 비극은 조선이 감당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옵니다.”
“본부장.”
“전하. 그저 희망이 아니옵니다. 사실이옵니다.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사옵니다. 승리하고 있사옵니다. 하여, 항복은 필요하지 않사옵니다. 그러니 부디 만백성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나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역사를 믿으시옵소서.”
사실을.
그리고
“믿으시옵소서! 전하!”
“믿으시옵소서! 전하!”
“믿으시옵소서! 전하!”
일제히 외쳤다.
아니, 오열하며 부르짖었다.
그리고
“믿겠소.”
이연이 다시 조선의 군왕으로서 말했다.
“조선을.”
바로
“우리의 시간을.”
사실을.
나도 화답했다.
“만백성이 조선을 노래할 날은 기어이 올 것이옵니다.”
사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