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아침을 기다리며(1)
대오를 다시 정비했다. 아니, 정비되었다.
문무백관의 결심은 더 흔들리지 않았다.
누구도 볼멘소리를 꺼내지 않았다. 또한, 하늘에 대고 빌지 않았다.
오직 우리의 힘으로 나아가고자 할 뿐이었다.
이를 악물고 현실과 싸우고자 하였다.
처참한 현실이었기에 웃음이 존재하지는 않았으나, 주눅 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우리 중대본 역시 전과는 다른 길을 가기로 했다.
더는 복잡한 공식이나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고민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새로이 각오를 다진 우리 중대본이 해결해야 하는 건 바로 우역이었다.
우역이 ‘종’을 넘어서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이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일국을 통치하는 위정자를 고통스럽고 괴롭게 만든 건, 굶주린 백성이 우역에 걸린 소를 먹고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이 사실이 너무나도 한탄스러웠다.
“대감. 발 빠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지금 우역의 확산 경로를 고려할 때 머지않아 경상도와 전라도로 번질 가능성이 큽니다.”
“본부장. 반계의 말이 옳소. 우역이 남하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더 많은 소를 도살해야 하오.”
“그렇습니다. 호판 대감의 말씀대로 있는 소는 다 도살해야 합니다. 어차피 우역에 번지면 다 죽습니다. 그러니 도살하여 바로 먹든, 저장을 하든 수를 써야 합니다.”
“그렇소. 죽은 소를 먹어 백성이 죽는 처참한 일은 더 발생하면 곤란하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두 사람은 강경하게 소의 도살을 주장했다.
특히 유형원의 수위는 강렬한 수준이었다.
“우선 경기도와 황해도를 제외한 도에서 4만 마리를 도살하여 백성의 굶주림을 막아야 합니다. 당장 굶지 않는 곳이라고 할지라도 소를 도살하여 먼저 먹게 하면 됩니다. 기근이 가장 두려운 것이니, 무엇이라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면 좋은 겁니다.”
이 시절 소 한 마리의 값이 큰 것이 동전 50~60냥, 작은 소는 30~40냥이었다. 그렇다면 4만 마리라는 건 120만 냥~240만 냥이었다. 이는 조선 전역의 1년 벼농사 수익과 버금가는 액수이며 호조의 2년 수입에 육박했다. 그러니까 지금 유형원은 이 엄청난 재산의 ‘포기’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백성이 언제든 자의로 도살하거나 팔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언제든 기근은 다가올 것인데 소여물을 챙기며 버티는 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합니다. 판단의 권한을 내려야 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4만 마리라면 전체 농가의 4%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여기에 더 자율적으로 행할 수 있게 하자는 건 경신 대기근 이후 조선의 농업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걸 각오한 행위였다.
그러나 이런 고민을 길게 할 필요는 없다.
소가 아무리 중요하고, 조선의 농업이 어찌 될지라도 가장 중요한 건 일단 백성이 버텨야 하는 것이다.
“반계의 의견에 이의가 있소?”
“없소. 하루라도 빨리 시행해야 하오. 미적거리다가 우역이 번지게 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소.”
허적의 말대로 도살은 우역의 청정구역에서만 진행해야 한다. 황해도나 경기도에서 집행했다가는 우역에 걸린 소를 사람이 먹을 수도 있다. 이건 엄히 금지해야 한다.
다른 이들도 모두 동의했다.
지금 우리는 불필요한 논쟁이나 회의가 아니라 과감한 집행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하면, 되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좌우를 돌아봤다.
알고 있는 미약한 역사적 사실 중 한 가지를 말해야 할 게 있었다.
“우역은 사람을 해할 수 없소.”
“…….”
“백성을 교화, 아니, 강제하더라도 무의미한 혼란은 무조건 막아야 하오.”
“본부장의 결정을 따르겠소. 아니, 믿소. 그리고 우리의 사대부도 이를 알 것이오.”
“나 또한 그리 여기고 있소.”
나는 엷게 미소를 지으며 송준길과 윤휴를 바라봤다.
두 사람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아직 우리의 관리는 위정자로서 자격이 충분했다.
하여, 낙화는 시기상조였다.
그래서
“내가 틀렸습니다.”
이 말은 해야 했다.
송준길과 윤휴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잔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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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농사만 지어온 농민에게 소가 죽는다는 건 팔다리가 잘리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었다. 소를 잃은 농민들은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서럽게 울었다.
하지만, 지독한 난세는 그저 슬퍼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 시절 백성에게 눈물도 사치였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닭이 왜 이래!”
언제부터였을까?
우역은 개와 닭의 목숨마저 앗아갔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우, 우역은 소만 걸리는 거 아니었어?”
“왜 닭과 개도 걸린 거야?”
이건 실로 엄청난 공포였으며 두려움이었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소’만 걸리는 역병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기에
“그, 그러면 말이나 돼지도?”
세상에 존재하는 가축이 모두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번졌다.
그리고 미증유의 공포는 따로 있었다.
바로
“사람도……?”
“…….”
“…….”
“…….”
사람이었다.
우역이 앗아가는 목숨이 동물‘만’이 아니라 사람도 포함할 수도 있다.
누구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오리무중의 상황이 만들어낸 공포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소의 죽음으로 슬퍼한다는 건 사치였다.
지독하게 얽힌 일련의 사태들은 그나마 이 난세를 버틸 수 있게 한 ‘옆’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자네, 죽은 소를 며칠째 부여잡고 울지 않았나?”
“내, 내가 언제 그랬나?”
“허. 대놓고 거짓말을 하나? 됐네. 저리 가게. 어서!”
“이, 이보게. 왜 이러나?”
죽은 소와 접촉했던 백성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관청에 알리는 게 옳지 않겠나?”
“그래야지. 모두 격리해야 해.”
“암. 안 그러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
끈끈하던 유대 관계는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보이지 않고, 불확실한 위험은 그 어떤 역병보다 매섭고 야멸차게 백성의 심리를 무너뜨렸다.
그때
“우역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새 다가온 허목이 차분하게 타이르듯 말했다.
“우역이 닭과 개를 해쳤기에 너희가 불안함을 느끼는 걸 어찌 모르겠느냐. 하지만, 내 말을 믿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역병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걸 너희도 알 것이다. 한데, 우역이 사람을 해칠 수 있다면 어찌 방치하겠느냐? 내 말이 틀렸느냐?”
“…….”
밤낮을 지새우며 역병과 싸우는 허목의 살신성인을 모르는 백성은 없다. 또한, 단호함도 익히 알려진 그대로였다.
“그러니 다툼을 멈춰야 할 것이다.”
“…….”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지러우니 다 불안하여 그렇습니다.”
“불안해할 건 없을 것이다.”
얼굴과 목소리에 고단함이 잔뜩 담겨 있으나 미소를 잃지 않는 허목의 태도는 굳건한 신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참담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너희를 포기하지 않는데 무엇이 걱정이더냐.”
“…….”
“그러니 생존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다. 우리 또한 너희를 살리고자 모든 것을 다하고 있으니 말이다.”
“…….”
물론, 말을 꺼내는 허목의 마음은 절대 편하지 않았다. 여전히 역병의 원인은 오리무중이었고, 병자의 수는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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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아니 조선의 서원 중 가장 권위가 있는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도산 서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산 서원의 한마디가 곧 영남 사대부의 의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불어 도산 서원 역시 작금의 재해에 대해서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지독한 난세로다.”
“그렇습니다. 일찍이 이런 난세는 없었을 겁니다.”
십수 명의 사대부들은 깊은 한숨을 쉬며 한탄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그저 탁상공론이나 하고자 모인 것은 아니었다.
“민심은 어떠하던가.”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물론, 심각한 민심 이반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렇겠지. 10년간 그토록 강도 높은 개혁을 했으니 이렇게 결과가 나와야겠지.”
되돌아보면 중대본의 개혁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곳이 바로 도산 서원이었다. 종래 조선의 가치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고자 칼을 휘둘렀던 중대본이었으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 작금의 난세를 바라보는 시야를 일치시키는 건 참으로 졸렬한 것이었다.
“선생. 우리도 우리만의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이렇게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일세.”
“마땅히 떠오르는 방책이라도 있으십니까.”
“난세일세. 특별한 방책이 있을 수가 있는가. 원칙적으로 접근하는 게 옳겠지.”
“원칙이라고 하시면…….”
“백성을 구제하는 일일세. 결국, 아사를 막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겠나?”
“구휼미를 이르십니까?”
“하하하…….”
노학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단지 구휼미를 내세우는 걸로 어찌 난세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쌀은 언제나 부족할 것인데 말일세.”
“소생들은 선생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감히 5현을 내린 중대본일세.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네.”
“…….”
“그러나 작금의 난세를 맞이했는데 조선의 사대부로서 어찌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우고, 학맥의 이기를 내세우겠는가.”
도산 서원이 사수하고자 한 가치를 사사로운 이기라고 표현하자 약간의 웅성거림이 찾아왔다. 그런데도 노학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중대본의 결정을 따라볼까 하네.”
“그 말씀은…….”
“중대본에서 화폐를 보급한다고 들었네.”
“선생.”
“그 또한 난세 극복의 개혁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하여, 우리 도산 서원이 앞서 볼까 하네. 서원의 쌀을 화폐와 교환하게.”
“서, 선생. 그건…….”
노학자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웅성거림을 차단했다.
그는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퇴로도 없고, 생로도 없는 지독한 시절일세. 사대부라고 하여 특별한 게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 역시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니 말이네. 하지만, 위정자로서 해야 할 일은 있는 법일세. 더 많은 번뇌를 가져야 하며, 고민을 품어야 하는 것이네.”
“…….”
“먹을 수 있는 쌀을 백성이 구할 수 있게 하며, 화폐를 유통하여 중대본의 개혁에 일조하는 것. 이것이 작금의 난세에 우리 도산 서원이 선택해야 할 길일세.”
“…….”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러나 노학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화폐의 보급이 서원의 해체로 이어진다는 걸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일단 나라는 건사하고, 백성은 살리고 봐야지. 그 뒤에 다시 싸우더라도 이리하는 게 옳아.”
그의 말은 울림이 있었다.
“서원이 서원이며 성리학자가 성리학자이며 우리가 우리인 이유는 올곧은 선택을 해왔으며, 하고 있으며, 할 것이기에 그러한 것이네.”
“……그리하겠습니다.”
“서두르게. 백성이 지치기 전에 나서야지. 또한, 우리의 결정을 모든 서원에 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