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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라-283화 (283/298)

283화 아침을 기다리며(2)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원저, 아니, 감자가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런데 나를 더 즐겁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규율을 무시한 우리 관리들이 감자를 여기저기 잘 보급했기 때문이었다. 바꿔 말해서 예상보다 더 광범위한 범위에 감자가 퍼졌다는 것이다.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나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기세등등하게 큰소리를 쳤다.

“거. 내가 뭐라고 했소이까. 원저는 기근을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알겠소. 본부장의 말이 다 옳았소. 그러니 그만 좀 하시오.”

허적이 손사래까지 치며 말했으나 나는 그럴 생각이 아예 없었다.

“허. 호판. 그만하라고 하셨소? 어림도 없소.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입에 달고 다닐 것이외다. 절대로 멈출 수 없소.”

“허.”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홀로 달려가는 선구자의 외로움을 호판이 알기나 하시오?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외다.”

“이런.”

겸손이 미덕인 조선이었으나 나는 졸렬한 사람인지라 얼마든지 자랑하며 다닐 의사가 충분했다. 그리고 평소라면 무슨 말이라도 하며 나를 탓했을 이들도 이번만큼은 웃음으로 화답하기도 했다.

기근이 지배하는 참혹한 시절에 감자라는 새로운 구황작물의 등장은 우리의 마음을 참으로 가볍게 만들어 주고 있으니 말이다.

“일단…….”

“더 많이 보급해야지요. 조선 전역에 보급해야 하오.”

“물론이오. 그건 따로 명을 내리면 되오. 그러니 진정하고 이제 논의를 시작하지요.”

“허. 호판.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지금 이보다 기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소?”

“알겠소. 알겠는데 우리의 일이 원저의 보급만 있는 건 아니지 않소이까. 그리고 원저는 전하면 되는 것이외다. 이런 간단한 일을 중대본에서 논의할 필요는 없소. 그러니 이제 진정이라는 걸 해보시오.”

정말 너무 기뻤기에 마음 같아서는 계속 감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허적의 말이 옳기도 했고, 점차 미간을 살짝 찌푸리거나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먼 산을 쳐다보는 이들의 심리가 느껴졌다. 그래서 여기서 멈추는 게 좋다는 본능의 경고는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쉽지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세를 논의할 때가 됐소.”

허적이 꺼낸 화두는 무거운 것이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모두 감자로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자세를 바로 했다.

“간단한 문제를 먼저 언급하겠소. 냉해와 가뭄 그리고 폭우와 강풍으로 목화, 삼 농사가 흉작이오.”

흉작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도 사치였다. 사실상 면포, 마포의 생산이 중단되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허적이 간단한 문제라고 말한 이유는 조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군역 개혁으로 군포를 징수하지 않으니 목화, 삼 농사의 흉작은 백성의 삶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외다.”

과거 개혁의 성과는 군포를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냈다. 결과, 목화와 삼 농사는 백성의 부가적인 수익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물론 흉년으로 백성이 더 많은 이익을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생존이 최고 화두인 시절에 다른 건 모두 사치에 불과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건 아니오. 조정에서 1년에 사용하는 포목은 7~8천 동이오. 군포의 개혁으로 이를 조정에서 따로 확보하였으나 앞으로는 요원한 일이 되었소.”

“비축분은 얼마나 되오?”

“1천 동에 불과하오.”

우리의 개혁이 생산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건 아니었다. 오직 ‘비축’으로 귀결되었기에 군포 개혁이 포목의 비축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웠다. 군포로 징수하거나 아니거나 결국, 생산되었던 포목의 총량은 변함이 없기에 그러했다.

“강화도의 비축 포목을 사용하고 사용을 최대한 줄이는 수밖에 없긴 하오.”

만일 경신 대기근이 아니었다면 개혁의 방향은 비축이 아니라 확대로 나아갔을 것이다. 다소 아쉬운 부분이지만, 또 달리 생각할 때 기근이 없었다면 군포 개혁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부분이긴 했다.

“대동미도 손을 봐야 하오.”

조선의 조세 제도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건 토지세가 아니었다. 조금 전 논의한 군포처럼 ‘사람’에게 책정하는 조세였다. 작금의 난세처럼 ‘가호’의 몰락이 수시로 발생할 수 있는 시절에는 무조건 ‘사람’을 대상으로 한 조세 제도를 손질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대동법에 근거한 대동미는 토지를 대상으로 징수하는 것이었으나, 본래 가호에 배정한 공물이 기본 골격이었기에 우선순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대동미를 군현에서 사용하게 하였으나 이미 올해 농사를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 되었소. 즉, 대동미를 어디에서 사용할지를 논의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외다.”

“호판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현재 대동미는 1결당 쌀 6두씩 봄과 가을에 징수하고 있습니다. 한데, 지금 우리 백성이 1년에 1결당 12두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윤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열기를 더하며 이어졌다.

“냉정하게 말씀드리면 어차피 내어도 구휼미로 사용될 대동미입니다. 이를 대폭 삭감하는 게 옳습니다. 1차로 삭감하고, 이조차도 부담스럽다면 징수하지 않는 방법도 고려해야 합니다.”

“백호의 말이 옳습니다. 오늘의 논의는 단지 조세의 부담을 줄이자는 개혁을 다루는 게 아닙니다. 대감. 거둔 곡식이 없는 백성에게 조세를 징수하지 않게 하는 임시 조치를 수립하는 것이니, 대폭 삭감하거나 면하는 게 옳습니다.”

윤휴의 주장에 힘을 실은 유형원의 말에는 중요한 핵심이 담겨 있었다.

만일, 조세 제도를 손보지 않았다면 관리는 이를 징수할 수밖에 없었다. 쌀 12두가 없다면 10두라도 팍팍 긁어내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도무지 백성의 곳간에는 쌀 12두가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국이었으니 이를 법도로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최소한 2두를 줄여야 합니다.”

“백호. 4두는 줄여야 효과가 있네.”

“반계. 같은 말일세. 봄, 가을에 각각 2두를 말한 걸세. 그러니 1년에 4두가 되는 것이네.”

슬쩍 허적을 쳐다봤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둘 다 틀렸네. 지금은 전액 삭감이 옳아.”

“대감.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당장 군현에 부담이 가지 않겠습니까.”

“부담? 백호. 애초 대동미를 전액 구휼에 사용하라고 하였네. 대체 무슨 부담이 가겠나.”

윤휴와 유형원이 당황할 정도로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허적은 멈추지 않았다.

“근래 징수되는 토지세 즉 전세는 10만 석의 수준이외다. 절반으로 삭감하겠소.”

“호판.”

“대감.”

여기저기서 화들짝 놀라서 허적을 만류했다.

이건 나도 당황했다. 이런 식이면 조정이 징수하는 조세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액 삭감하고 싶소만, 절반으로 한 건 훈련도감과 관리의 녹봉은 어떻게든 챙겨야 하기 때문이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어차피 징수해도 구휼미로 사용될 뿐이오. 그러니 최대한 백성이 쌀 한 톨이라도 가질 수 있게 하는 게 옳소.”

조정을 운영할 최소한의 비용만 징수만 확보하자는 주장이었다. 어차피 모두 구휼미로 사용될 것이니 백성의 심리적 부담을 모조리 없애자는 게 명분이었다.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소. 그러나 조정의 국고는 아직 버틸 수 있소. 기근이 몇 해에 걸쳐 이어질지 모르지만, 지금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겠소이까. 모두 내 뜻에 동의해주길 바라오.”

사실상 조세가 없는 나라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리하면 조정은 철저하게 무역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게 조금 우습기 때문이었다.

“호판의 말이 옳소. 어차피 구휼미로 모두 사용될 조세인데 무리하게 운송할 필요가 어디 있소? 수확하는 건 백성이 알아서 잘 관리하리라고 생각하오.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올해 농사를 되돌아보면 모두 알 것이오. 징수할 수 있는 곡식이 얼마나 되겠소?”

내 말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물론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밀고 가고자 하는 건 오직 한 가지였다.

경신 대기근은 유통기한이 명백한 재앙이라는 사실이었다.

올해 그리고 내년까지만 버티면 우리는 이기는 것이다.

“민간의 구휼미도 다르지 않소.”

더 늦기 전에 손을 댈 수 있는 부분을 다 건드리기로 했다.

“현재 많은 사족이 결합하여 곳간을 열고 있소. 그러나 기근이 가속화될수록 곳간의 문을 여는 사족은 줄어들 수밖에 없소.”

당연한 현상이었다.

아무리 위정자라고 할지라도 여유가 있을 때 곳간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기근이 길어지면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잠식되어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또한 말했다.

“딱 1년이면 되오.”

경신 대기근은 내년까지다.

이건 변수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내년에 끝나는 재앙이었다.

그러니

“1년이면 능히 해결할 수 있으니 조금 더 인내해야 하오.”

1년이면 된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금의 구휼미는 대출 형식의 사창이 아니라 아예 퍼주는 것이었다. 경신 대기근이 끝난 이후에도 그들은 되돌려 받는 게 없다. 엄청난 수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진행되고 있다.

이 길의 끝에는…… 됐다.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내년까지만 버티면 되오. 딱 1년이면 되오.”

나는 쉬지 않고 1년이라는 시간을 강조했다.

“1년이라.”

송준길이 고개를 끄덕이며 좌우를 돌아봤다.

“일단 가보지요. 중간에 이탈하는 사족이 있을 수는 있을 것이오. 그러나 갈 여력이 되는 이들은 가게 해야지요.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는 모르지만, 가보는 게 맞소.”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이 난세에 조선이 우리 양반에게 기대지 않으면 누구에게 기댈 수 있겠소이까.”

송준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리가 미친 듯 달려 들어왔다.

불안함이 엄습했는데 표정이 밝았다.

좋은 소식이었다.

그리고

“뭐……?”

그의 말에 우리 모두 눈을 껌뻑였다.

몸이 잠시 멈췄다.

그러나 이성은 빠른 속도로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도산서원에서 쌀을 저잣거리에 내고 화폐를 구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

“…….”

“…….”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하하하!”

“하하하!”

허목과 윤선도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우리는 멍하게 두 사람만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모두 환하게 웃었다.

아니, 일제히 웃었다.

하늘이 뚫릴 듯 크게 웃었다.

화폐의 보급은 서원의 해체와 직결되는 개혁안이 집행된 상태였다. 그런데 도산서원이 자발적으로 이 길에 동참한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었다.

조선의 기득권, 그 최후의 보루가 스스로 내려왔다.

그간은 그 어떤 정치적 압박에도 물러서지 않았으나 이번에 기득권을 내려놓았다.

오직 백성을 위하여.

이것이야말로 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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