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Pest(1)
평소 그토록 원망한 하늘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절을 하고 싶었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영감! 풍년입니다!”
박세당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기쁨을 참지 못한 의주 목사도 덩달아 고함을 질렀다.
“암! 내가 보고 있네! 내 눈으로 보고 있어. 풍년일세!”
엄혹한 시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두 글자였다. 그러나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풍년이었다.
그러니까
“원저가 세상을 뒤덮고 있네! 내가 보고 있단 말일세.”
참혹함만 가득하던 시간은 말 그대로 과거가 되었다.
청 상인의 봇짐에서 시작한 원저가 의주의 산천을 뒤덮고 있었다.
모든 농사가 엉망이었는데 오직 원저만 대풍이었다.
두 사람만 환호성을 지르는 게 아니었다.
의주의 모든 이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난리였다.
“되었네. 되었어. 원저만 있으면 굶는 이는 없을 것이네.”
“하하하! 그렇습니다. 하늘이 우리 조선을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암!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자네 이마가 더 빛이 나는군.”
“…….”
순식간에 박세당의 웃음은 사라졌다.
의주 목사는 아차 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변발을 대놓고 언급했으니 분명히 잘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 그냥 먼 산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겠습니다. 영감.”
부들부들 떨리는 박세당의 경고에 의주 목사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서 어물쩍 중요한 말을 꺼냈다.
“이제 추위를 대비해야지. 안 그런가?”
“……원저 수확을 마무리하는 즉시 땔감을 다시 확보해야겠지요.”
“이왕이면 최대한 많은 땔감을 구해야 하네. 나는 이번에도 자네가 큰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네.”
“휴.”
땔감을 확보하는 일에 박세당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결국, 산에서 나무를 구하는 것인데 사대부가 무슨 큰 도움이 되겠는가. 그런데도 의주 목사가 이리 말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사족에게 일러 원저를 거두는 일은 최대한 도맡아 달라고 하겠습니다.”
노비를 동원할 수 있는 사족이 수확을 책임질 수만 있다면 백성은 상당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의주 목사의 청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새 백성을 동원하여 땔감을 구한다면 이번 겨울을 넉넉하게 보낼 수 있겠지요.”
“하하하! 나는 자네만 믿겠네.”
“되었습니다.”
박세당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의주 목사의 말대로 오늘따라 유독 그의 이마가 빛났다.
그때
“영감!”
관리와
“선생!”
사족이 미친 사람처럼 달려왔다.
그리고
“조, 조정에서 조세를 감면한다고 합니다.”
내용을 주변의 모두가 들었다.
그 순간
“…….”
“…….”
“…….”
고요해졌다.
그때
“처, 천세…….”
관리 한 명이 천세를 연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박세당이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지금은 천세를 연호하며 감읍함을 외부로 표출할 때가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의 감정을 백성들이 알아서 추스를 때였다.
모두가 이미 감읍하고 있으니 말이다.
때로는 침묵이 천세의 연호보다 더 진할 수가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커으윽…….”
백성 한 명이 고통을 호소하며 온몸을 뒤틀었다.
미처 대응하지 못했을 때 지척에 있던 청국 상인의 일행 중 한 명이 그를 살폈다.
“의원이외다.”
그의 말은 큰 신뢰감을 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했다.
가장 즐거워야 할 순간에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분위기가 급격하게 가라앉은 그때
“서역(鼠疫)……?”
청국 의원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찰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리고 귀신을 본 듯, 죽은 이를 집어 던지며 물러났다.
그런데 청국 상인은 그의 접근을 불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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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은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어졌다.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역병은 허목을 좌절의 늪으로 빠뜨렸다. 이대로 마음을 접고 가망이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옳다고 여겨졌다. 하루에도 백번은 이런 생각을 했다.
“선생.”
말을 건네는 처능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목소리와 얼굴에는 피로가 잔뜩 묻어 있었다.
“처음으로 병자를 포기하고 싶어졌습니다.”
“…….”
“하하하……. 불자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 말인 줄 알지만, 그런 생각을 던져버릴 수 없습니다.”
“…….”
“송구합니다. 소승의 수양이 이렇게 부족합니다.”
“아닐세. 나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지친 기색이 가득한 허목은 고단함이 잔뜩 묻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해도에서 염병이 창궐했다고 하더군.”
“염병이라면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참으로 괴이하지 않나? 그토록 두려워했던 염병은 이토록 가볍게 말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원인조차 알지 못한 역병이 새로 다가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하늘은 참으로 지독하지 않나?”
중대본 수립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조선의 의술은 염병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았다. 비록 모든 병자를 살리지 못할지라도, 위생국의 체계적인 구조는 빠르고 정확하게 염병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험하지 못한 작금의 역병은 조선의 위생국이 수립한 체계를 아예 무너뜨리고 있었다.
“사실 해낼 수 있다고 여겼네. 안 그렇겠는가. 역병이라는 건 늘 처음이 존재하기에 여러 표본과 약재를 동원하면 처방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네. 한데, 어림도 없더군. 남은 건 좌절과 절망밖에 없으니 말일세.”
절절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스러운 말이었다.
“백성은 우역이 사람에게 번질까 두려워하는 지경에 이르렀건만 우리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니 참으로 한심할 뿐일세. 위생국의 수장으로서 죄스럽네.”
“어찌 그것이 선생의 탓이겠습니까.”
이는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최악의 시절에 최악의 역병이 창궐했을 뿐이었다.
“만일, 선생께서 빠른 판단으로 백 의원과 여러 의원을 따로 배치하지 않았다면 백성의 고통은 오히려 더 커졌을 겁니다. 소승이 귀동냥으로 들었는데도 백 의원은 많은 백성을 살리며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고민일세. 차라리 더 많은 인원을…….”
“선생!”
허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원 한 명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참으로 복잡했다.
허목은 묘하게 심장이 울렁거렸다.
“서, 선생.”
“무슨 일인가.”
“중대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중대본……?”
“위생의 강도를 최고로 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자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역병은 서역(鼠疫)이라고 했습니다.”
“뭐라……?”
허목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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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이 보낸 서찰에 적힌 두 글자를 다시 곱씹었다.
서역(鼠疫).
나는 이 병을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뒤흔든 최악의 역병이었다.
“흑사병…….”
입술을 깨물었다.
조선의 방역 시스템 밖에 있던 초유의 역병이 침투한 상태였다.
대체 왜 충청도에서 북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아니, 알고 있다.
흑사병이 창궐한 원인은 오직 한 가지였다.
개국 이래 유례없는 수준의 대청 무역이 가져온 재앙이었다.
조선은 아니 현시대의 누구도 흑사병을 치료할 수 없다.
위생의 강도를 최대한으로 올리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미 위생국을 총동원했고, 사방팔방에 사람을 보내어 알렸다.
아마 지금쯤 허목도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위생의 강도를 더 올리기로 했다.
권유나 교화가 아니라 강제의 수준으로 말이다.
“위생 수칙에 따르지 않는 이는 구휼미를 내리지 않을 것이외다.”
흑사병에 걸린 병자는……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이 떨렸다.
목소리가 잠겼다.
조선의 역사에 흑사병이 창궐한 적은 없었다.
이를 대체 어찌해야 할까.
아니, 어쩌다가 흑사병이 창궐했단 말인가.
청국에서 들린 말은 없었다.
그러면 단지 조선에서만 발생한 것일까.
그러니까 대체 왜……?
그토록 위생을 강조했건만 흑사병이라니.
쥐새끼에게 이런 참담한 일을 당하다니.
아니다.
우습다.
아무리 위생을 강조해도 전근대의 수준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보다 청결할지라도 내 눈에는 아직 비위생적이라는 점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쥐를 잡아야 한다.
쥐……?
그런데 그냥 죽이면 되는 것이었나?
그러면 감염을 막을 수 있나?
“본부장.”
“대감.”
“우암.”
혼란에 빠져있을 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쥐를 잡아야 하오. 그런데…….”
“대감. 스승님께 서찰을 보냈습니다. 방책을 아실 겁니다. 그러니 침착하십시오.”
“그래……. 허 국장이라면 알 것이네.”
하.
허목을 잡았어야 했다.
그랬어야만 더 빠르게 대책을 수립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다시 정신을 바로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바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다.
“서역의 원인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외다. 변승업도 지금쯤 상인들을 단속하고 있을 것이오.”
흑사병의 원인은 덮을 것이다.
조선까지 거두지 않겠노라 선언한 마당에 대청 무역에 차질이 생기는 건 조선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지름길에 불과하다.
훗날 누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나는 이 판단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 대감. 청국 상인이 모조리 철수하고 있습니다.”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변승업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흑사병이 조선을 죽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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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은 하마터면 몸이 휘청일 뻔했다.
“서역이라니…….”
서역이라는 역병은 딱 두 가지만 존재했다.
발병과 죽음이라는 결과였다.
처방전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
“선생. 아무런 방책이 없는 겁니까.”
“없네. 누구도 밝혀내지 못했네. 걸리면 죽는 병일세.”
병명을 알았으나 처방이 없다고 한다.
조선에서 허목이 모르면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결국, 처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어찌 막지도 못하겠는가.”
“소승에게 일러주십시오. 기어이 해내겠습니다.”
“쥐를 해결해야 할 것이네.”
“쥐라고 하셨습니까? 어찌하면 되는 겁니까.”
“서역의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네. 하지만, 쥐가 옮기는 것이 많아. 그러니 붉은 팥과 흰 무 등 열병을 고치는 작물 따위를 널리 퍼트리게. 쥐들이 잘 다니는 곳이 둬야 할 것이네.”
처능은 이유도 묻지 않았다.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또한, 죽은 쥐는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게. 깊게 매장해야 할 것이네.”
“그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청과 집은 늘 쓸고 환하게 하게. 통풍은 자주 해야 할 것이며, 어둡고 습한 민가에 거주하는 백성을 모두 이주시키게.”
허적은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잘 먹이게. 백성들.”
“물론입니다.”
“병자들도 잘 먹이게. 마지막은.”
“예……?”
“포기하겠네.”
“서, 선생.”
처능은 대경실색했다.
포기란 단지 격리라는 게 아니었다.
이는 지금도 시행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이는 버리는 것이다.
허목은 고개를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조선은 서역(鼠疫)을 감당할 능력이 없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러나 번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