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289화 (289/298)

289화 내일을 박탈하다(3)

경신 대기근.

그래……. 경신 대기근.

나는 오직 경신 대기근을 방비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달려왔다.

10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논쟁과 갈등을 뚫고 오늘에 이르렀다.

아니, 오직 ‘대의’로서 모든 걸 한데 넣어 묶어 버렸다.

갈등과 논쟁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제압해 버린 것이다.

그러하니 깔끔하게 해소하거나 완벽하게 봉합되지 않은 가치와 갈등이 참으로 많았다. 이 모든 내용은 당연하게도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가치와 갈등이 20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을 버틴 것이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끝없이 튀어나왔다. 절체절명의 순간들이었으나 무시하거나 해결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냥 밟고 걸어갈 수도 없었다.

분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더는 머리를 숙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늘 치열한 논쟁이 펼쳐졌다. 힘겹게 상황을 무마하거나 때로는 위력으로 짓누르며 걸었다.

그리고 이번에 튀어나온 건 도덕성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솔직히 지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사상과 신념으로 무장하여 세상을 내려다보는 철인이 아니었다. 변화와 발전을 주도하여 이 세상을 더 살기 좋게 바꾸려는 생각을 품지도 않았다.

이미 주지한바, 오직 경신 대기근의 방비를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나의 모든 신경은 이 자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만일, 경신 대기근을 방비할 수 있다면 아무리 모순 가득한 정책이라도 과감하게 수용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만일, 양반이 해낼 수 있다면 영원히 그들만 위정자가 될 수 있는 법도를 세상에 꺼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나와 저들의 사고방식은 절대로 같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내게 남은 시간은 2년밖에 없었다.

올해와 내년이 전부였다.

이를 위하여 모든 걸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달랐다.

내 앞에 있는 대신들은 2년이 아니라 백 년이었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에도 후대를 고려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을 철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같을 수가 없었다.

역사를 알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의 자아를 가진 나는, 조선의 마지막 남은 핏방울까지 쥐어짜서 2년을 버티고자 했다. 반면, 이들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여 조선을 위해 복무하는 이 시절의 위정자다.

어찌 같을 수가 있는가.

이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버겁고, 지쳤다.

또, 그래서 이런 논쟁이 나를 너무 지치게 했다.

너무 답답하기에 그러했다.

“다시 말하리다. 착각이라고 하였소.”

대체 무엇을 ‘더’ 착각하였다는 말인가.

어쩌면 나 역시도 착각이라는 범주에 포함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면, 대체 무엇을 두고 착각이라 하는가.

“그간 중대본의 개혁이 이렇게라도 진행될 수 있었던 건 백성이 사족을 신뢰했기 때문이었소. 중대본의 개혁이 합리적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것이외다.”

신뢰.

이는 참으로 괴이한 단어였다.

백성이 양반에게는 절대로 가지지 않을 것만 같은 감정이었으나.

개혁 10년은 양반이라는 집단이 백성을 이끌 능력이 있는 위정자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례였다. 놀랍게도 이는 신뢰가 입증되었기에 그러했다.

“백성이 아무리 양반을 욕할지라도 통치의 영역에서 위정자로서의 신뢰는 굳건하다는 건, 중대본의 개혁 10년을 통하여 입증된 것이외다. 이를 모를 수가 없을 것이오. 그래서 그러오?”

지난 10년은 참으로 입체적이었다.

우리는 전례 없는 날카로운 개혁으로 양반의 권한을 거두었다.

이때,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을 가진 양반은 바로 여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이것이 바로 백성으로부터 받는 신뢰였다.

백성은 아무리 버거워도 양반을 바라봤고, 방침에 준수했다.

이건 분명한 신뢰의 표현이었다.

이를 깨우친 양반이라면 백성의 신뢰가 걷어지는 걸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존재의 상실과 직결하는 충격에 봉착할 수도 있었다.

이는 사대부의 본질과 더불어 더욱 거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러했다.

나는 더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리다. 이 난세의 끝에 뭐가 남을지 나는 모르오. 그런데 딱 두 가지만 존재하면 되오. 조선 그리고 백성. 백성은 많이 남아야 하며, 조선의 위정자는 누구라도 상관이 없소. 이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소. 진심이외다.”

나는 여유가 없다.

하루를 버티는 것도 지옥처럼 힘들었다.

너무나도 힘겨웠으니 말이다.

“그러니 모두 착각하지 마시오. 작금의 사태는 신뢰를 굳건히 지키며 걸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한 길이 아니외다. 부디 정신을 차리시오.”

이제 이들을 다시 질타해야 했다.

“격리의 기준은 결국 중대본의 성과 그 자체요. 서역이라는 경험하지 못한 역병, 이 병자를 판단하는 잣대가 바로 우리가 마련한 것이오. 한데, 어찌하여 신뢰를 걱정하오? 이는 당장 공들부터 우리의 지침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외다.”

이는 너무나도 가슴 따가운 부분이었다.

만일, 확고한 자신감이 담보되었다면 흔들리는 백성의 신뢰를 붙잡기 위한 노련한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기에 화들짝 놀라며 한발 물러나려고 한 것이다.

“우리도 믿지 못하는 방침을 어찌 백성에게 말할 수 있겠소이까. 그러니 불안한 것이오. 하지만, 오늘 분명히 말하리다. 백성이 따르지 못할지라도 괜찮소. 믿지 못해도 갈 것이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 어지러웠다.

논쟁의 끝은 늘 이렇게 나를 짓눌렀다.

나는 이 시절 누구도 가지 않으려는 ‘악인(惡人)’이 되어야 하기에 그러했다.

가끔 되돌아보게 된다.

이성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얼마나 차갑고 잔혹해질 수 있을지 대해서.

걸어가기조차 버거운 현실에서 인간은 얼마나 지독해질 수 있는지 말이다.

“병자들이 통제를 벗어나 지천을 돌아다니면 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발생할 것이외다.”

이는 미증유의 혼란이다.

조선 전역에 살아 움직이는 흑사병이 창궐하는 것이니 말이다.

“만 명이 아니라 10만 명의 병자가 발생할 것이오. 우리는 이를 두려워해야 하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만 명을 바라보며 신뢰를 찾는 게 아니라는 것이오. 이것이 우리의 선택이어야 하오.”

도덕이라는 숭고한 두 글자는 조선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다.

적어도 이 시절의 정치에는 존재를 박탈해야만 했다.

기어이 끌어안고 있는 건 지독한 욕심일 뿐이다.

이는 백성을 끝까지 보살피려는 선의가 아니라 독점하려는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하므로 나는 이 세상을 더 쥐어 짜낼 것이다.

만대가 나 송시열을 지옥의 불구덩이에 집어넣을지라도 말이다.

“하여, 나는 오늘 악수(惡手)로써 최악을 덮고자 하오.”

“…….”

“군영을 부활시키겠소.”

군영의 부활은 절대 불가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군영을 다시 일으켜 병자를 통제하지 않으면 흑사병이 조선을 멸망시킬지도 모른다. 작금의 정국에서 중요한 건, 기근으로 굶어 죽는 걸 방비하는 게 아니라 흑사병을 이겨내는 것이다. 치료할 방책이 없다면 감염 경로를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수였다.

여기에 불필요한 도덕 혹은 인본주의는 의미가 없다.

내게 그들은 이미 백성이 아니라 이 땅의 수명을 단축하려는 적에 불과했다.

“군포를 다시 징수할 수는 없소. 그러니 조정에서 군영을 독자적으로 운영해야 할 것이외다. 호판. 필히 이리해야 하오.”

“하…….”

“나는 호판의 반론이 재정상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절대로 병자를 죽이는 행위를 운운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고 있소.”

허적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잘게 떨리는 그의 입술은 찢어질 듯 괴로운 속내가 표출된 것이 아니겠는가.

“……병자에 대한 처우를 떠나서 지금 군영을 부활시키면 기껏 수립했던 기근 방비책이 송두리째 무너지게 되오. 본부장. 이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오.”

“다른 방법이 존재할 수는 있소. 한데, 현재 이 시국에 다른 방법을 수립하는 건 고을을 떠난 병자를 살려두자는 방침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르시오?”

참으로 매정하게도 현실은 이러했다.

“호판의 말대로 기근을 방비하고자 국고를 아낀다면 군영을 부활시킬 수는 없을 것이외다. 한데, 이는 역병의 확산을 방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

“우암. 군영을 부활하면 청국에서 그냥 있을 리가 없네. 필시 외교적 압박을 할 것인데, 이 난세에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군영의 해산은 대청 외교의 산물이었기에 윤선거의 말 또한 정확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청국의 눈치를 살필 때가 아닐세. 그런데도 기어이 탓을 하면 나를 압송하라고 하게. 하면, 일단락될 것이네.”

“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무슨…….”

말문이 막힌 윤선거는 헛웃음을 지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미촌. 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훈련도감으로는 도저히 지천을 돌아다니는 그들을 감당할 수는 없네. 그러니 군영을 부활시켜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일세. 이 대가로 청국이 조선을 고사시키고자 할 수도 있고, 내 목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네. 하면, 이를 감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애석하게도 나는 지금, 이 대화가 너무나도 소모적인 것 같네.”

윤선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막았다.

“이미 나는 언급한 적이 있소.”

개혁 10년을 거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양반의 기득권을 축소할수록 중대본의 개혁은 나아갔으며, 기근을 방비할 수단이 마련되었다는 것이외다.”

양반이 조선의 위정자로서 최고의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의 힘을 줄일수록 조선은 편히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이는 참으로 거대한 모순이었다.

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오늘도.

“백성의 신뢰와 직결하는 도덕성. 작금의 조선에서 이는 양반이 취해야 할 몫이 아니외다.”

양반이 마지막으로 사수하고자 하는 백성의 신뢰.

사대부가 사대부인 마지막 이유, 도덕.

이제는 이조차도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는 이를 양보해야 할 때가 된 것이오.”

누구에게 양보해야 하는가.

“서얼, 승려, 의원, 향리……. 전선에서 병자를 직접 살피는 그들이 눈물로서 병자를 다독여야 하오.”

하면, 양반은 무엇을 하는가.

“그들을 밀어내며 병자를 억지로 끌어 격리하고, 저항하면 제압하는 악인의 역할. 이것이 양반의 길이오.”

위정자는 대의를 위해서 악이 되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시절이다.

“만백성의 저항을 받더라도 양반은 지독하게 악인이 되어야 하오.”

양반이 아니면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세력은 없다.

200년을 이어온 권위와 권력이야말로 악으로 거듭나기에 최적의 조건이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 악의 수장이 될 것이외다.”

조선 기득권의 정점에 있는 나 송시열이 모든 책임을 져갈 것이다.

양반은 마지막 남은 핏방울까지 조선에 복무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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