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290화 (290/298)

290화 내일을 박탈하다(4)

이광성은 헛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미 며칠이나 지났건만 아무런 탈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몸이 더 개운해졌다.

“내 이럴 줄 알았느니라.”

만일, 방침대로 순순히 격리에 응했다면 과연 어찌 되었겠는가.

그야말로 개죽음이었을 것이다. 속에서 치솟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는 구체적인 언어로 구현되었다.

“나처럼 억울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양반이었기에 피할 수 있었던 죽음이다.

그러나 백성이었다면 어찌 감당하겠는가.

섣부른 저항은 화만 부를 것이니, 사지가 안 부러지면 다행일 것이다.

“애초 죽일 생각에 격리를 명하였다. 살고자 하는 몸부림은 그냥 짓밟으면 그만이라고 여기지 않겠는가? 대체 어쩌다가 나라 꼴이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노여웠다.

격리란 병자를 살리기 위한 수단이었지,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작금의 조선은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 어찌 위정자들이 역병을 방비한다는 명목으로 백성을 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일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무고한 죽음을 방비해야 한다.”

이를 악물며 눈을 치켜떴다.

몇 걸음 걸었다.

걸었는데 묘한 생각이 들었다.

“단지 알리면 끝날 일일까?”

조정의 통제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더욱이 사족에 대한 강경책도 유례가 없는 강도였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덕치가 아닌 법치로써 치국을 이루니 언로가 막히는구나.”

앞을 빤히 쳐다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 보니 기괴한 생각에 시작되었고 위험한 결말에 도달했다.

“군영이 없는 나라.”

훈련도감이 존재하지만, 쏟아지는 중대본의 개혁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다.

“하. 국방을 이토록 허술하게 할 수는 없다.”

백 가지 생각은 모두 불평과 불만 그리고 멸시로 이어졌다.

“만일 내가 이를 알리며 규합해낼 수 있다면…….”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억울한 이들을 돕고자 시작하였던 상상은 멸시로 이어졌고, 거대한 날개를 달더니 마음껏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끝내 이광성은 기어이 결심하게 되었다.

“본부장 송시열을 도모하여 나라를 바로 잡는다. 승산은 있다.”

이는 역심이 아니었다.

조선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간신을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한 충심의 발로였다. 필시 그러했다.

그러다가도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일단 사실만 알리면 될 것이거늘.”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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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가 길어질수록 회합은 잦아졌다.

뻑뻑한 세월이었기에 양반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과 한탄이 대부분이었으나, 오늘의 논의는 평소와는 무언가 달랐다.

“그게 정말인가?”

“참일세. 어젯밤 내게 찾아왔었네.”

최근 행적을 찾을 수 없었던 이광성이 나타났다. 물론, 그가 왜 종적을 감췄는지 다들 짐작한 바가 있었다.

“정말 멀쩡했단 말인가?”

“그렇다네. 평소와 다름이 없었네.”

“허. 하면…….”

“맞네. 애초 우리 예상대로 의원이 격리를 권했다고 하더군. 해서, 잠시 몸을 숨긴 것이었네.”

어차피 이 시절에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역병 외에는 이유가 없기도 했다. 문제는 양반이 중대본의 방침을 어겼다는 것과 역병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역병을 두고 여러 말이 있었지 않은가. 하지만, 작은 기미만 보여도 모조리 격리했기에 차후 어찌 되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네. 그런데 이번에 그의 행동으로 반례가 생긴 것일세.”

“그렇지. 반례일세. 조정의 방침이 틀렸다는 걸 입증할 반례라는 것일세.”

상당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옳고 그름이나 실효성을 떠나서 작금의 방침은 사족들이 볼 때 폭거, 그 자체였다. 심지어 조선 최고의 정예군이라 불리는 훈련도감이 병자들을 사살하는 일까지 발생하지 않았던가. 이는 실로 거대한 충격으로 전해졌었다.

“그간 우리가 중대본의 방침에 동의하고, 곳간을 열어 구휼미를 꺼냈네. 이는 백성을 살리는 최소한의 대의에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렇지. 일단 백성은 살리고 봐야 했으니 말일세.”

“그런데 이광성의 생존은 중대본의 방침이 최소한의 도덕성도 갖추지 못한 폭거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일세. 작금의 격리 방침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함을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일세.”

“하면, 상소를 올리자는 것인가?”

“그래야지. 그래서 지금 진행되는 행동을 멈추게 해야 하는 것일세.”

대다수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중대본의 역병 방침은 그야말로 공포였다.

세간에는 재채기라도 한 번 하면 격리가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억압적이었으니, 역병보다 중대본이 더 두려운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그가 다소 의미심장한 말을 했네.”

“의미심장한 말? 무슨 의미인가.”

“지금 조선은 언로가 차단되었기에 상소나 연좌가 전처럼 힘을 낼 수가 없다고 했네.”

“음. 아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전대미문의 난세가 개막된 탓도 있네. 게다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기도 하군.”

비록 세상이 혼란스럽기에 연좌는 무리일지라도 상소가 여전히 유효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이처럼 전보다 경직된 건 사실일지라도 조선의 언로가 차단되었다고는 할 수 없기에 이광성의 말은 크게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 다만, 아예 틀린 말은 또 아니긴 했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지금 조정이 우리의 상소를 듣고 방침을 변경하긴 하겠나? 아니, 중대본이 말일세. 그간 경험한 바에 의하면 어렵다고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 아닌가. 상소를 올리면 주된 내용보다는 이광성이 방침을 어겼다는 사실만 바라볼 것이네. 그만큼 귀를 막은 것도 분명하니 말일세. 하면, 어찌 되겠는가? 실제적인 토론이나 방침의 수정보다는 ‘처벌’에 주력할 것이네. 어쩌면 지금보다 더 강도 높은 위생과 격리의 방침이 수립될지도 모를 일일세.”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송시열을 주축으로 한 중대본은 그만큼 강압적인 정치 기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서원을 덜어내는 개혁을 광폭하게 진행했던 시절만 떠올려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두 눈을 마주치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상소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한 것이다.

“하면, 어찌하는 게 좋겠나?”

“우리가 중대본을 설득할 수 있는 근거를 확실하게 확보하는 건 어떤가.”

“병자를 따로 살펴보자는 말인가?”

“그렇지. 만일 그리할 수만 있다면, 중대본도 강제할 수만은 없을 것이네.”

“음.”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격리가 예정된 병자들이 모두 이광성처럼 멀쩡해진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그간의 구휼 활동으로 형편이 넉넉한 사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곤혹스러워하는 건 당연했다.

“이 일은 더 생각해 보지. 한데, 이광성은 어찌한다던가?”

“당분간은 몸을 더 숨기고 있을 것이라고 했네. 섣불리 나섰다가는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더군.”

“그렇긴 하지만…….”

말끝을 흐렸으나 이어질 말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광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홀로 생존하고자 방침을 어기고 사라졌다는 건 썩 좋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양반으로서 이리 행동했다는 건 상당한 파급을 낼 수밖에 없었다.

“방침에 따르지 않거나 저항하면 사살까지 하는 시절일세. 이때 양반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목숨을 구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민심은 크게 동요할 것이네. 확실한 근거가 확보되기 전에는 이광성이 모습을 감추는 게 옳다고 생각하네. 자네들은 어떤가.”

“옳은 말일세. 지금 이광성이 나타나는 건 민심을 심각하게 교란할 것이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광성을 벌하는 것보다 민심을 먼저 생각할 때였다.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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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은근하고 묘한 소문이 입과 귀를 통하여 번졌다.

이는 참으로 은밀한 내용이었기에 누구 하나 대놓고 떠들지는 않았다.

모르는 이가 없는 곳에서 가까운 이들과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토록 조심스레 번진 소문이었으나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격리를 거부해야 한다고?”

“그렇다고 하네. 며칠 숨어 있다가 멀쩡해진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허. 그러면 격리가 진짜 죽으러 간 것인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데 안 가도 되는 사람이 간 건 확실해.”

백성이 두 명만 모이면 속삭이듯 은밀하게 대화를 나눴다. 행여 관리가 올까 봐 시선도 부지런히 좌우로 움직였다. 누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사실 아무리 말해도 잡아가는 게 사실이지 않나.”

“잡아가기만 한다던가. 저항하다가 죽은 이들이 허다한 세상일세.”

“가뜩이나 퍽퍽한 세상인데 이제는 나라에서도 이러하니 정말 죽을 맛이로군.”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세상이 아닌가. 뭘 해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네.”

무엇 하나 가볍게 흘려서 들을 말이 없었다.

그만큼 소문이 번진 이후 민심은 더 흉흉해졌고, 위정자를 향한 불신은 커질 만큼 커졌다.

“그나저나 괴이하지 않나? 어찌 끌려가지 않고 숨었다고 하던가? 여차하면 백성을 죽이기까지 하는 세월인데, 재주도 좋아.”

훈련도감이 병자를 사살한 건 다른 군현의 일이었으나, 관청에서 이 사실을 대놓고 병자들에게 전하였다. 이는 섣부른 행동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강경책이었기에 이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말하고 보니 이상하군. 역병이라고 의원이 판정하는 순간 잡혀가는데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었을까?”

“그게 내가 더 괴이한 소문을 들었네. 홀로 숨을 만한 상황이었어.”

“대체 무슨 말인가.”

“실은…….”

그는 몸을 더 낮추며 사방을 살폈다.

다가오는 이도 없고, 쳐다보는 이도 없었다.

그런데도 목소리를 최대한 낮게 깔았다.

청력을 기울여 집중하지 않으면 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양반이라고 하네.”

“뭐……?”

“양반이 의원으로부터 역병이라는 말을 듣고 내뺐다고 하더군. 약재며 식량이며 잘 챙겨서 호화롭게 몸을 챙겼다고 들었어.”

“하.”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찌 이러할 수가 있단 말인가.

백성들은 식솔과 인사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 격리한다. 그런데 양반이 살고자 도주했다고 하지 않은가?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양반이라서 살았군.”

생사가 신분에서 차이가 난 것이다.

대체 이는 무슨 말인가.

“좋은 약재를 다 챙겨 먹었을 것이니 역병을 이겨낸 것이야.”

“그렇겠지……?”

“아니면 설명이 되는가? 양반이라서 숨을 수 있었고, 귀한 약재를 챙겨 먹었기에 역병을 물리친 것일세. 하. 참으로 개 같은 세상이 아닌가. 심지어 그 양반은 처방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니 말일세.”

두 사람의 대화였다.

수시로 주변을 살폈다.

분명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입장에서 ‘아무도’라는 단어에 같은 백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주변에는 십수 명의 백성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관리만 들을 수 없는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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