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내일을 박탈하다(5)
이광성은 피가 바짝바짝 말라가는 것만 같았다.
가까이 지내던 사족을 찾아가서 은밀하게 자신의 사정을 알렸다. 원했던 반응은 하늘을 찌르는 분노였다. 함께 나라를 뒤틀고 있는 중대본의 심판을 결의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되돌아온 그들의 반응은 너무나도 미지근했다. 아니, 쳐다보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다. 바로 멸시였다. 사대부로서 살고자 숨었다는 걸 용인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기에 너무나도 답답했다.
“어찌 학문을 익혔다는 사람들이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인가.”
이번 사안의 핵심은 누가 뭐라고 해도 중대본의 무리한 방침이었다.
“내가 수모를 감내하고 이를 알아냈거늘 격하게 환영하지는 못할망정…….”
이미 생존을 위하여 도주했던 사실은 진실이 아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중대본의 방침에 숨어 있는 모순을 파악하고자 솔선수범한 사람이었다. 무조건 그러했다.
또 그래서 자연스레 조선의 군사력이 부실하니 틈을 봐서 본부장 송시열을 어찌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잊어야만 했다.
당장 반겨주는 사족도 한 명 없는 상황에서 무슨 수로 대사를 도모하겠는가.
이러하니, 잊어야 했다. 아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로 치부해야만 했다.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다행이로다.”
만일, 괜한 말을 보탰다면 변고를 당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조롱이나 받으며 개망신이나 샀을 게 분명했다. 이광성은 내심 안도하며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사족의 협조를 구하지 못했기에 여전히 깊은 산, 어딘가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 지금 고을에 모습을 대놓고 보였다가는 여러 의심에 노출될 게 뻔했다. 상당히 모욕적인 상황에 부닥칠 것도 불 보듯 뻔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이광성은 근심만 늘어갔다.
“이러면 죽은 것이나 매한가지가 아닌가.”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조선을 바로 잡겠다는 큰 꿈을 꾸었다는 걸 고려할 때, 현실은 너무나도 초라했으며 엉망진창이었다.
그야말로 한숨도 아까운 비루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월만 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사족을 설득해야만 다시 양지로 나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결국, 명분이었다.
모든 걸 바꿔버릴 수 있는 압도적인 명분, 바로 이를 찾아야 했다.
“……사족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민심을 잃는 것이다.”
사대부는 백성의 신뢰를 먹고 산다. 이것은 긍지였고, 자부심이다.
“지금 나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이들은 병자들이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격리라는 조치에 따라야 할 병자들이라면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이해할 것이다.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병자들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사족의 여론을 움직여야 해.”
일단 이렇게 시작해야 했다.
군영이나 송시열은 지금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산에서 벗어나는 게 제일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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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의 증상이 보인다는 의원의 말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역병이 확실하다고만 했어도 이토록 두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병이 아닌데도 격리한다는 소문은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번진 상황이었다. 어쩌면 죽지 않을 수도 있는데 죽을 곳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이 사람을 너무나도 위축되게 했고 두렵게 만들었다.
“서, 선생. 다시 살펴봐 주십시오.”
“…….”
“어제만 해도 멀쩡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멀쩡합니다. 한데, 갑자기 역병이라니요?”
“이보게…….”
이미 같은 말을 참으로 많이 들었고, 같은 말을 또 많이 하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의원은 정성스레 하나씩 설명을 이어갔다. 죽음의 공포와 맞이한 병자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예의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역병은 하루아침에 찾아오는 걸세. 언젠가의 하루는 괜찮았을 것이지만, 느닷없이 증세가 보이는 걸세. 자네가 지금 괜찮다고 하여 내일도 멀쩡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네.”
“하, 하면 내일 다시 살펴봐 주시면 안 되는 것입니까?”
“…….”
“내일도 멀쩡하면 역병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억지였다.
세상에 이런 억지는 없다.
그러나 의원은 그저 안쓰러울 뿐이었다.
죽음이 두려워 삶의 희망을 달라고 오열하며 부리는 억지를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이, 이놈은 노모와 처자식이 있습니다. 소인이 이대로 죽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도 없습니다. 한 명의 목숨이 아니라 10명의 목숨입니다. 그러니 내일 다시 살펴봐 주십시오. 내일이면 다를 수 있을 겁니다.”
“내일이라고 해도 변하는 건 없네.”
“서, 선생.”
“격리된다고 하여 꼭 탈이 나는 건 아닐세. 그러니…….”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병자는 결국 악을 쓰듯 고함을 질렀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참으로 슬프고 처량했다.
그저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선생들께서 역병이라고 하셨는데 아니라고 밝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대체 무슨 말인가.
의원은 의아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니, 금세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큰 오해를 하는 것 같네. 그런 사람은 아직 없었네. 나 또한 내가 틀렸기를 바라지만…….”
“본 사람이 있습니다.”
“……?”
보고된 바에 의하면 오진은 아직 없었다. 아니, 존재할 수도 없었다. 격리 처분을 받은 이들은 모조리 산성에 들어갔으며, 그들의 상태를 파악한 건 아니었다. 한데, 어찌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소인도 들었습니다.”
“소문이 파다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증언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외치는 걸 보면 마냥 거짓이라고만은 치부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격리를 피하고자 단합하여 억지를 부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의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세히 말해보겠나?”
“사, 사족 중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족……?”
“그렇습니다.”
“…….”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사족 중에서는 역병에 걸린 이가 없었다.
불안한 백성 중 누군가가 말을 지어냈고, 소문을 번지게 한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향청 좌수 이광성 나리였습니다.”
“…….”
“참입니다. 그 댁의 노비부터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인명까지 거론됐다.
의원은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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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사실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이광성은 발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소, 소인이 살핀 건 사실이지만…….”
이광성을 진료한 의원이 자백했다.
수령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 향청의 좌수라는 인사가 어찌 이토록 무도할 수가 있단 말인가!”
노여움이 폭발했다.
그의 싸늘한 눈동자는 사족들로 향했다.
“공들도 이를 알고 계셨소?”
“…….”
“어찌하여 말이 없소? 하면, 내가 알아서 생각해도 되겠소? 공모를 했다고 말이외다.”
“그것이 아닙니다. 소생들은 무관합니다.”
“하. 아직도 모르겠소? 백성은 격리가 곧 죽음이라며 두려움에 떨고 있소. 한데, 이를 가장 잘 준수하고 백성을 교화해야 할 사대부가 제 한 몸의 안위를 위하여 도주했소. 아시겠소? 이 일을 조기에 말끔히 해결하지 않으면 민심이 어찌 될지 누구도 가늠할 수 없소. 또한, 대체 무슨 자격으로 백성의 앞에 설 수 있소? 그러니 이실직고하시오.”
서슬 퍼런 수령의 압박에 결국 사족들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용은 참으로 비루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하…….”
“…….”
“그러니 결국, 살고자 도주했고, 살게 되니 공들에게 연락하여 살길을 열어 달라고 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한데, 공들은 이를 발고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오? 그래. 한때 함께 어울리던 벗의 잘못을 눈감아 주자고 한 것이오?”
“그것이 아닙니다. 이광성이 역병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이를 파악하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그 권한을 누가 공들에게 줬소? 아. 사족이 관청의 운영에 관여할 수 있다고 하여 그런 것이오? 한데, 내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누가 그랬소?”
“…….”
“나는 공들이 왜 함구했는지 아오. 이 일의 여파가 어찌 번질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그러한 것에 불과하오.”
심장을 찌르는 비수와도 같은 말들이 이어졌다.
“의원들이 실수했다고 생각하셨소? 아니외다. 역병을 확진하기 위해서 한 명의 병자를 의원 두세 명이 돌아가며 최종 진단을 내리고 있소. 혹시라도 발생할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외다. 이광성이 정말로 역병이 아니었다면 차분하게 기다렸어야 했소. 한데, 도주했소. 그리고 공들은 이를 덮었소.”
강도 높은 격리를 진행하기에 철저한 체계는 필수적이었다.
“혹은 중대본의 방침이 틀렸다고 여기셨소? 작금의 난세는 중대본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버틸 수도 없었소. 내가 묻지요.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을 보셨소? 없을 것이외다. 이것이 바로 성과라는 것이오. 공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쏟아내는 불평불만은 난세의 극복에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는 것이외다.”
“…….”
“공들은 매사 난세의 극복을 바라본 게 아니라 사족의 알량한 이권을 챙기기에 바빴던 것이외다.”
수령의 매서운 질타에 사족들이 항변하려고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이미 명분에도 밀렸고, 기세도 결이 달랐기에 무슨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나 역시 사대부이며 사족이외다. 한데, 공들의 행동은 흉내도 낼 수가 없소.”
“…….”
“이러니 백성의 신뢰를 잃는 것이외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
수령은 한탄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색이 되어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는 의원이 보였다.
자신의 실수가 이 사달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두렵겠는가.
수령은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원이 무엇을 잘못했겠느냐. 향청의 좌수에 이른 이가 겁박한다면 어찌 물리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광성이 사라진 이후에도 말하지 않은 죄는 크다.”
“소, 송구합니다.”
“자네에 대한 처벌은 이 난리가 끝난 뒤로 미루겠네. 내 뜻을 알겠는가?”
“소인이 죽을 각오로 병자를 살피겠습니다.”
“그래야지. 그전에 확인할 게 있네.”
의원은 무슨 물음이 이어질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말을 꺼냈다.
“역병이 맞습니다.”
“한데, 버젓이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사람마다 발병의 원인이나 증세가 다 다릅니다. 만일 귀한 약재를 챙겼다면 시일을 늦출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병마를 제압할 수는 없습니다.”
의원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변명이나 말을 지어내는 게 아니었다.
확신이 가득했다.
“오진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수령의 머릿속으로 끔찍한 상상이 뻗어나갔다.
참으로 지옥과도 같은 내용이었다.
“역병에 두 발이 달린 상태입니다.”
“하…….”
사대부 한 명이 이 사달을 만들었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서둘러 소재를 파악하여 잡아내야 했다.
그때.
“여, 영감.”
향리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화가 난 백성들이 이광성의 사가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뭐……?”
“홀로 귀한 약재를 먹고 병마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민심이 폭발했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