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내일을 박탈하다(6)
이광성을 죽을힘을 다해서 달렸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숨을 헐떡거렸지만 잠시라도 휴식을 취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언제 뒤쫓아오는 성난 폭도들에게 험한 꼴을 당할지 몰랐다.
그랬다.
하루아침에 폭도들이 등장했다.
“헉헉…….”
대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 언제부터 일이 이토록 지저분하게 꼬였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격리를 피하고자 약재를 챙겨 도주하였던 일은 이미 중요하지도 않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사족을 만나 사정을 말하였던 일도 과거의 순간에 불과했다.
다 모르겠다.
의미가 없었다.
그저 조정의 방침에 문제가 있다는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허무하게 죽음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랬다.
진정으로 그러했을 뿐이다.
하여, 몇 걸음 걸었을 뿐이었다.
힘없이 끌려갈 병자들을 만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해도 너무나도 변한 상태였다.
이미 눈이 뒤집힌 백성들은 폭도로 변해서 사가를 불태우고 있었다.
사람도 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을 찾고 있었다.
심장이 땅에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어떤 재앙도 이보다 참혹하지 않았다.
억울했다.
너무나도 억울했다.
도움을 주고자 했거늘 어찌 이리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감히 나서지 못했다.
누군가가 알아볼까 두려워 바로 몸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
모든 건 본능이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어디까지 달렸는지도 모른다.
길이 보이는 이상 달렸을 뿐이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달렸다.
세상 모든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또, 그래서 화가 치밀었다.
“조정은 대체 어쩌자고 군영을 해산했단 말인가!”
만일, 군영만 제대로 유지되었다면 어찌 폭도가 기승을 부렸겠는가.
너무나도 화가 났다.
그리고 지금 이광성이 가장 존재는 바로 훈련도감이었다.
그들을 만나야 했다.
그래야만 가장 소중한 걸 지킬 수 있다.
바로 목숨이었다.
다른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숨통만 부여잡고 있으면 모든 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
폭도의 생명력이란 그토록 허망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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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가 위력을 발휘하였으나 온 세상을 모조리 집어삼킨 건 아니었다. 불타고 있는 곳은 사족의 사가와 서원 혹은 향교였다. 그저 양반과 관련하였던 건물만 화마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관청은 무장한 백성들에게 장악되었다.
아무리 최소한의 방비가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수백을 넘어선 성난 백성을 막아낼 방법이라는 건 존재할 수가 없었다.
끌려 나온 수령은 참담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또한, 그의 얼굴에는 수치심도 가득했다. 그 역시 양반이었기에 포박되어 무릎을 꿇게 된 건 참으로 큰 수모였다.
그는 호통치듯 백성들에게 일갈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더냐!”
노여움을 참지 못한 그의 목소리는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역시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리께 화가 난 게 아닙니다.”
“당장 포박을 풀고 물러나야 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가 목민관으로서 능력이 부족하여 선정을 베풀지는 못하였으나 평소 너희를 박대하지는 않았다. 내 말에 틀림이 있는가?!”
아니다.
이토록 어려운 시절이었으나 수령은 늘 관대했고, 백성을 위하였다. 그래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오죽하면 백성들이 임기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늘 간절하게 말하였겠는가.
그런 그가 이토록 노여워하였으니 죄스러움이 없을 수가 없다.
결국, 백성들은 핏발 선 수령의 눈을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피했다.
하지만, 이리한들 바뀌는 건 없었다.
어수선함을 이겨낸 한 명이 그래도 예를 갖추며 말했다.
“하지만, 사또. 너무 분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소인들은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인데, 이광성이라는 자는 양반이라는 이유만으로 격리를 피했습니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말이 터져 나왔다.
“그는 귀한 약재를 먹고 살아났다고 들었습니다.”
“분명 평소 사또께서는 역병의 대처에 있어서 신분은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누구라도 역병에 걸리면 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한데, 그랬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대체 이게 뭡니까? 소인들은 의원의 손을 잡고 울부짖을 기회도 없는데, 양반은 방침을 어기면서 살아가는 겁니까?”
“죽었으면 죽었지, 그 꼴은 볼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있었으나 그들의 목소리에는 참으로 화가 잔뜩 담겨 있었다. 그동안 속에 쌓인 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분출한 것이었다.
수령은 크게 한숨을 쉬며 한탄하였다.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나 역시 상황을 전해 듣고 진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상황은 양반이기에 격리를 피했고, 진상은 양반이기에 살았다는 겁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허…….”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도무지 진정시킬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만 흘러가면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의원들은 늘 소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역병이라고. 다시 확인해달라고 해도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이광성이라고 달랐겠습니까? 그 역시 역병이 맞습니다. 한데, 멀쩡하다지 않습니까.”
“…….”
“둘 중 하나겠지요. 역병을 고쳤거나, 애초 역병이 아니었거나.”
백성들이 도출해낸 결과는 상당히 합당한 논거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반박하거나 무마하려면 아니라는 정확한 진실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직 정확한 사실관계를 조사해내지 못한 관청으로서는 진실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성난 민심을 상대하는데 대충 에두르거나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말을 꺼낼 수는 없다. 그건 더 큰 파국을 향할 뿐이었으니 말이다.
“진정하게. 만일, 이광성이 역병을 고쳤다면 방법을 파악하여 자네들에게도 똑같이 처방할 것이네. 나를 믿고 이만 물러나게.”
“사또는 믿습니다. 하지만, 이 망할 세상을 더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실수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죽으라고만 하는 이 썩은 세상 말입니다.”
“진정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리하면 자네들이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결국 관군이 올 것이네. 이를 감당할 수 있겠나? 아닐세. 절대로 이겨낼 수 없네. 그러니 내 말을 듣게.”
“사또. 지금 물러난들 관군이 소인들을 그냥 두겠습니까?”
“내가 자네들을 지킬 것이네.”
“이미 양반들이 소인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
“그들의 집도 다 태웠습니다.”
“…….”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처연했다.
수령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제는 조금 전까지 수치심에 노여웠던 기억이 수치스러웠다.
이토록 엄중한 상황에 어찌 일신의 감정만을 앞세웠단 말인가.
수령은 크게 한탄하며 말했다.
“내가 자네들의 선처를 청할 것이네.”
“사또. 되었습니다. 어차피 바뀌는 건 없습니다. 여기서 멈춰서 처벌받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격리나 당할 겁니다. 그러면 죽는 겁니다.”
이것이었다.
어차피 어떤 길을 가더라도 죽음과 만나게 될 백성들이었다.
그러기에 배수진보다 지독한 각오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이미 백성의 다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두려웠지요. 그래서 사정했습니다.”
“예. 부디 하루만 더 살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런데 그리하셨습니까. 단호하게 격리에 처하셨습니다.”
“어찌 죽음을 그토록 쉽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소인들의 사지는 어제와 똑같이 멀쩡한데 어찌 쉽사리 인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들의 불신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수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 양반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걸 할 때는 늘 교화라며 떠들었습니다.”
“한데, 소인들의 목숨을 가져갈 때는 그냥 하라고 합니다.”
“하하하. 이게 뭡니까?”
“자신들은 지키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이번 이광성의 사태로 백성들이 받는 박탈감과 상처가 어느 정도였을지 어찌 모르겠는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만 수령은 한숨만 쉬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아니라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좌절이 그를 지배한 것이다.
“…….”
“…….”
“…….”
묘한 침묵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다소 곤혹스러웠다.
적어도 그들의 분노가 향한 양반이라는 집단에 수령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러하니 고개를 떨군 그의 모습을 본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시절 백성에게 양반은 그런 존재였다.
증오하면 한없이 경멸할 수 있지만, 흠모하면 한없이 존경할 수 있었다.
수령은 후자였다.
“……사또께서는 가십시오.”
“…….”
“소인들이 어찌 나리를 해할 수 있겠습니까.”
“…….”
“뒤돌아보지 말고 떠나십시오. 이곳은 잊으십시오.”
“…….”
백성들이 권하였다.
그러나 수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네.”
그는 단호했다.
“관리들을 내보내 주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 뜻을 저들이 조정에 고해야 하네. 하여, 관군의 파견이 아니라 해결책을 와야 하네.”
“……하면, 사또께서 가시는 게 더 좋지 않습니까.”
“최악의 경우, 관군이 오면 어찌할 건가? 자네들 다 죽을 건가?”
“…….”
“내가 있어야 상황을 중재할 수 있다는 걸 어찌 모르는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게다가 기어이 이곳에 남겠다는 수령의 진심을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다.
“자네들이 모든 건 알아서 하게. 그러나 전과 같이 의원의 활동은 보장하게. 그래야만 최소한의 병세는 살피고, 병마가 확산하는 건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내 말을 듣게.”
“…….”
“나를 믿게. 다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네.”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또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참으로 잘 생각했네.”
“그러나 사또도 이곳에서 나가실 수는 없습니다.”
“물론일세. 그리하겠네.”
이만해도 최악은 피할 수 있었다.
하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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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갈수록 저항하는 병자의 수는 많았다.
아무리 훈련도감이라고 할지라도 한 명이 열 곳을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적이 아닌 백성을 제압하는 일이었기에 점차 사기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난세가 도래한 이후 살신성인의 자세로 가장 낮은 곳에서 복무하며 환호받던 때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컸다.
그러나 중대본의 방침을 따르지 않는 백성은 달리 표현하면 폭도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를 진압하는 건 관군의 역할이 분명하였기에 멈출 수가 없었다.
이완의 입에서는 근심이 가득 담긴 한숨이 나왔다.
“대체 난세는 언제 끝이 날 것인가.”
내색할 수는 없으나 그 역시 심장이 따가운 건 마찬가지였다.
씁쓸함을 애써 숨기며 남몰래 한숨만 쉴 뿐이었다.
“영감!”
“…….”
부디 이번에는 가벼운 사안이길 바랄 뿐이었다.
“폭동이 발생했습니다.”
“…….”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르며, 양반을 죽이고 고을을 불태웠습니다. 양반 한 명이 다급하게 몸을 피하여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
하늘은 참으로 야박하였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출병 준비를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