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노래하라-296화 (296/298)

296화 사대부로서

지옥보다 끔찍했던 경술년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남은 건 이제 신해년이었다.

물론, 시간의 흐름을 칼로 자르듯 나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경술년의 끝과 신해년의 시작이라는 건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다.

1년.

숨을 쉴 수도 없는 1년을 버티듯 달려왔다.

오늘에 이르러 내 머릿속에는 신해년만 남아 있었다.

오직 1년을 더 감당해야 한다는 독기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참혹하기만 했던 경술년의 잔상이 어찌 남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오늘에 이르는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이 되새겼다.

매일, 매 순간 이를 악물며 살폈다.

최선이었을까?

과연 진정으로 최선이었을까?

우리…… 아니, 나는 최고의 판단을 하며 달려왔을까?

아무리 1년‘만’ 더 버티면 경신 대기근이 끝난다는 걸 알지라도, 상기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되돌아본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숨을 쉬며 살아갈 때 늘 궁금한 것이 있었다. 이성으로는 이해하기에 고개를 끄덕였을지라도 진심으로 그리한 게 아니었던 부분이 있었다.

바로 사관의 붓이었다.

어찌하여 조선의 사대부는 사관의 붓을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경술년을 되새기며 비로소 이를 알게 되었다.

나 역시 후대가 경신 대기근을 되짚을 때 고개를 끄덕일지 두렵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해내었을지 두려웠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단지 후대의 세 치 혀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주지했듯 나의 판단이 최선이자 최고였는지 확신조차 할 수 없기에 그러했다.

기술의 진보, 시대의 흐름, 가치관의 변화를 모두 뛰어넘을 수 있는 판단이었을지 너무나도 두려웠다.

감히 만대가 동의할 방책‘만’을 찾아야 한다는 오만이 아니었다.

나는 단지 ‘조선인’이 아니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당연한 생각이며, 감정이었다.

또한, 애석하게도 불안정한 혹은 부족한 나의 판단과 결정이 이 시절 조선에 대한 평가로 직결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두려웠다.

진정으로.

그런데도 지난 1년을 세세하게 되돌아본 건 아니었다.

늘 고민했으나, 평가하지는 않았다.

후대의 평가가 두렵고, 최선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으나 하루에 허덕이는 작금의 조선은 새로운 판단을 끌어낼 여력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알고 있었다.

나의 태도가 참으로 모순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알면서도 바로 잡지 않는 건, 내게는 아직 싸워야 할 1년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을 1년 뒤 성찰과 반성과 함께 하루를 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눈앞에 펼쳐진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개운하지 않았기에 참으로 버거웠으나 그저 나아갈 뿐이었다.

그래도 무언가가 이뤄지고 있다는 건 현재 진행 중인 우리의 대처에서 작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충청도에서 여역이 발생했으나 조기에 잘 제압했습니다.”

근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보다는 가벼운 유형원의 목소리는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했기에 나도 전보다는 편히 물어볼 수가 있었다.

“피해는 어떠한가?”

“1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10여 명의 목숨이 가볍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중대본 수립 이전이었다면 여역은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남을 정도로 두려운 역병이었다. 이를 고려할 때, 현재 조선의 역량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흑사병이 아직도 맹위를 떨쳤기에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한 게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는 애초에 이 시절 조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황해도와 경기도에서도 여역이 발생했으나 비슷한 규모입니다.”

허목의 부재로 위생국을 총괄하게 된 유형원의 대응은 공세적이었다. 강도 높은 위생은 당연했으며, 역병이 창궐하면 의원의 파견과 재원의 동원을 아끼지 않았다. 보기에 따라서 과잉 대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누구도 직접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형원의 대응이 단지 과한 게 아니라 옳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조기에 잘 진압했으나 역병의 위험은 방심할 수 없는 겁니다.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니, 전쟁을 치르듯 대응해야 합니다.”

“자네의 말이 옳아. 세간의 말이나 우려에 흔들리지 말고 우직하게 진행하게.”

욕설이 나올 수밖에 없는 난세였으나 천운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 우습게도 이번에 역병이 창궐한 군현은 상당히 행정력이 잘 작동했다. 만일 이러하지 않고 의료 시스템이 열악한 곳이었다면, 여역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을 가능성이 컸다.

이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었기에, 과격할지도 모르는 유형원의 대처는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게 옳았다.

낮게 숨을 쉬면서 좌우를 슬며시 살폈다.

모두 나와 유형원의 대화를 듣고 있긴 했으나 의견을 개진하지는 않았다. 아직 병자들을 사살한 일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난세였다. 이러할 때 일국을 책임지는 대신으로서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사대부의 철학으로서 대신의 역할을 감당하며 여기까지 온 이들이었다. 이들의 신념이 흔들렸다는 건 곧 진한 상처라는 걸 의미하기에 기다려줘야만 했다. 해서, 나는 탓하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회복되길 바랄 뿐이었다.

물론, 역할을 하지 않는 게 아니기에 심각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을 다쳤을 뿐이었다.

나와 논의를 이어가는 유형원이 독특할 정도로 빠를 뿐이었다. 위생국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고 사안이 막중하기에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 실로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을 수도 있었다.

더는 전과 같은 죽음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재해의 가장 큰 무서움은 현상이 아니라 피해가 누적되는 것입니다.”

유형원은 중대본의 공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발언을 이어갔다.

딱딱함이 느껴질 정도의 목소리였다.

“처음을 방비해도, 역량이 쇠하였기에 두 번째를 막아낼 때 버겁습니다. 또, 세 번째를 감당할 때는 더 숨이 찹니다. 이러하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가 누적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네의 말이 참으로 옳아. 심지어 재해의 강도는 더 강해지기에 문제는 커질 수밖에 없네.”

“가장 도드라지는 현상은 역시 우역입니다.”

우역을 해결할 역량이 없었기에 먼저 도살하여 식용으로 사용하는 방침을 내린 바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도살을 감행하게 했다. 그러나 우역의 확산 속도는 도살 속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애초 소를 도살하고자 한 이유는 어차피 죽을 소를 도살하여 기근 극복의 보탬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역에 걸린 소를 먹을 수는 없기에, 도살에 앞서 이를 먼저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도살하기 전에 소의 상태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이 작업을 수행할 인력도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시간 자체가 부족했다. 아니, 애초에 사람을 시켜 수만 마리의 소를 다 확인한다는 발상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결국, 우역으로 죽은 소가 수만 마리를 넘었습니다.”

도살하기도 전에 그냥 다 죽었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 중이었다.

“대감. 아직 소의 도살은 존재하는 방침입니다. 이제는 거둬야 할 때가 됐습니다.”

결국, 현재 방침을 유지하는 건 모든 영역에서 낭비일 뿐이라는 말이었다. 더 직설적으로는 우역으로 죽는 소는 죽는 것이고, 살면 좋으니 그냥 두자는 뜻이기도 했다.

어차피 미리 죽이는 게 의미가 없으니, 살지도 모르는 소는 잘 살려서 경신 대기근 이후 조선의 농업을 대비하게끔 하는 게 옳았다.

여전히 나와 유형원‘만’의 논의가 이어졌다.

“방한 대책 역시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네.”

아무리 방비에 최선을 다할지라도 재해의 발생 자체를 자체를 어찌할 수는 없다. 그러니 피해는 발생한다. 지금이 그랬다. 원래도 추운 겨울이었으나 소빙하기의 도래로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추위가 시작됐다. 막연하게 땔감을 아끼지 말라는 방침은 부족함이 있었다.

특히, 힘겹게 구축한 삼남 지역의 온돌 시스템은 지진과 폭우로 인해 사실상 붕괴했다. 이러할 때 강추위가 몰아치면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이 예상될 건 불 보듯 뻔했다.

“대감. 소생은 이 문제를 조금 더 체계적으로 접근해봤습니다.”

“말해보게.”

“온돌이 어렵다면 화로라도 보급해야 합니다. 현재 땔감이라는 건 온돌이 아닌 이상 외부에서 불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화로를 대거 보급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화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형원이 말하는 건 느낌이 달랐다.

“대감. 소생이 파악해 보니 과거 고구려의 귀족은 온돌이 아닌 화로로 일상을 영위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귀족의 생활은 늘 백성보다 풍요롭다.

이를 고려할 때, 제대로 된 화로가 있다면 추위를 극복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화로를 사용할 때 필요한 땔감은 능히 구할 수 있습니다.”

“필시 종래 볼 수 있었던 화로보다 성능이 뛰어나야 할 것이네.”

“물론입니다.”

“아. 아닐세. 다 필요 없네. 최대한 빨리 제조해야 할 것이네. 이미 우리는 대비가 늦었어.”

그때

“기어이 해내게.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네.”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허적이 말을 꺼냈다.

참으로 반갑고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그리고

“백 년의 대계라는 금송을 어기고 땔감으로 사용하는 시절일세. 한데, 적어도 얼어 죽는 백성은 없어야지. 우리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입증해야 하는 것이네.”

허적의 말은 가장 사대부다운 것이었다.

어쩌면 후대에 내려질 평가로부터 떳떳한 것이야말로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대부로서 생존의 근거라고 해도 무방했다.

“본부장. 나는 이리해야겠소. 그래야만 나아갈 수 있소.”

이는 내가 가졌던 두려움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사대부였기에 그러했다.

하여, 답했다.

“나 역시 그러하오.”

“좋소.”

허적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환기하며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국고의 구휼미를 더 내려야 할 것 같소.”

“무슨 말씀이시오?”

“기근을 잘 방비하여 대규모 아사자나 유민이 발생하지는 않았소. 하지만, 수확을 제대로 한 지역도 없소. 이는 이번 겨울부터 심각한 기근의 도래가 예상된다는 것이외다.”

이미 군현으로 내려보낸 구휼미가 상당하다.

여기서 추가로 더 보낸다는 건 무리가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차피 기근이 발생하면 구휼미로 내려보낼 쌀이외다. 최대한 많은 수량을 내려보내는 게 옳소.”

허적은 단호했다.

“각도 별로 30만 석을 보내어 기근을 대비해야 하오.”

이리하면 240만 석.

결과적으로 조정의 국고는 고갈되는 수준이었다.

이번 겨울의 피해를 막기 위한 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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