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신해년의 시작
가볍게 바라보면 허적의 제안이 과하다가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1년을 고려할 때 이는 참으로 타당한 방책이었다.
“그간 각종 개혁으로 군현이 바로 구휼미를 집행할 수 있게 하였소. 그러나 작물의 수확을 기대할 수 없는 재앙이 1년간 쉬지 않고 이어졌소이다.”
대동미를 비롯한 조세를 군현에서 바로 사용하는 방침은 큰 성과를 냈다. 지난 1년, 경술년을 거치면서 조선을 휘청이게 할 기근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모든 걸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형원이 말한 것처럼 재해는 시간이 쌓이면서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1년을 잘 감당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비축했던 재원은 줄어들고,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은 소량에 불과하다. 애석하게도 다가올 위력의 재앙은 더 강력했다.
그동안 조선 조정에서 아무리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고 할지라도, 농사 자체가 잘되게 할 방법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근은 봄이 다가올수록 거세게 기승을 부릴 것이오.”
즉, 기근은 예정되어 있기에 미리 국고에서 구휼미를 내리는 게 가장 합당한 선제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내려보내는 구휼미로 부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외다. 다만, 간절하게 바라는 건 올해 농사는 순탄하였으면 한다는 것이외다. 물론, 이런 간절함에 기대어 국사에 임할 수는 없겠지요.”
어쩌면 모두의 바람이었으나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없었다. 이들이 나처럼 미래를 아는 건 아니었으나 올해 농사 역시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호판의 제안대로 추진하는 게 좋을 듯하오. 어차피 국고의 비축곡은 모두 구휼미로 사용해야 하오. 하루라도 빨리 군현으로 보내는 것이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것이겠지요.”
“하면, 바로 집행하리다.”
“좋소.”
나와 허적의 대화가 끝났으나 누구도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조정이 확보한 비축미를 모두 사용할 방책이었기에 갑론을박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없었다.
이들의 심리를 이해하기에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중대본의 침묵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죄인처럼 멍하게 있는 게 싫었다.
이들은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떤 경우라도 작금의 조선을 지탱하는 기둥들이니 말이다.
그래서 숨을 고르며 말했다.
“우리의 침묵은 곧 집행의 머뭇거림으로 이어질 것이외다. 조선의 만백성이 절규하고, 모든 관리가 한탄할지라도 우리는 기어이 해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이오.”
지극히 원론적인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이기도 했다.
“성과도 있었을 것이며, 실패도 있었을 것이외다. 부족한 점이 떠오를 것이며,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은 일도 있었을 것이소. 그러나 우리는 경술년을 감당했소.”
나는 그저 사실만 말하기로 했다.
내가 말해야 할 사실은 오직 한 가지였다.
이는
“만일 중대본의 개혁이 아니었다면, 경술년의 재앙에 조선은 무너졌을 것이외다.”
원 역사와 비교하는 것이었다.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이리해야만 우리가 눈을 뜰 수 있다.
“고작 유민 500명이 발생해도 조정이 마비되었던 시기가 있었소, 군현 몇 개의 기근에 조정이 충격에 휩싸여 전전긍긍했소. 역병이 창궐하면 속수무책으로 시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소. 한데, 지금 조선이 그렇소?”
아니다.
우리는 분명 나아가고 있다.
“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재해를 대비하고 있소.”
“…….”
“나는 자부심이 있소.”
울면서 기었다.
통곡하며 움직였다.
이것이 우리의 1년이었다.
한데, 어찌 한탄만 할 수 있겠는가.
“본부장의 말이 옳소. 내가 다 아오. 어찌 모르겠소.”
윤선도였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의 개혁이 조선을 지탱한 자양분이었다는 걸 내가 어찌 모르겠소? 그러나 백성이 죽었소.”
“이토록 거대한 재해가 발발하고 있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지고 있소. 백성이 안 죽을 수가 없소. 하지만, 단 한 명이라도 더 살려보고자 바득바득 나아가는 게 아니겠소? 그러니 선생께서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길 바라오.”
“아니외다. 그게 아니오.”
윤선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괴로움이 가득했다.
“역병이 참으로 많은 백성의 목숨을 앗아갔소. 급기야 우리 손으로 수백 명의 백성을 죽이기에 이르렀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그들은 제압하지 않았다면 후일을 어찌 기약할 수 있겠소.”
“민란이 일어나면 진압해야 하오. 변고가 터지면 수습해야 하오. 내가 다 아오.”
윤선도의 목소리는 점차 떨렸다.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
그는 너무나도 힘겨워 보였다.
“참사가 발생하고 수십 번을 되새겼소. 민란이 아니었소. 역모도 아니었소. 그저 발버둥이었소. 하지만, 우리는 모조리 죽였소.”
“죽이지 않았다면 역병이 번졌을 것이오.”
“그래요. 그 역병…….”
윤선도가 나를 쳐다봤다.
눈동자는 동요하고 있었다.
“애초 조선의 역병이 아니었소.”
“…….”
“중대본의 개혁이 아니었다면 죽지 않았을 백성이었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중대본의 개혁이 아니었다면 발생하지 않을 참사였소.”
흑사병은 조선과 관계가 없는 역병이다.
만일 전면적인 무역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발발하지 않았을 역병이다.
안다. 이를 어찌 모르겠는가.
한데, 이렇게 하나씩 따지면 할 수 있는 건 없다.
“선생. 그런 식의 논의는 불필요하오.”
“만일 대청 전면 무역이 없었다면, 우리는 무너졌을까…….”
내 말에 대한 답변은 아니었다.
그러나 윤선도의 말에는 참으로 많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지금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구슬프게 우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오늘 윤선도는 참으로 이러했다.
“본부장. 나는 이 생각을 멈출 수가 없소.”
“단호하게 말하리다. 만약 무역을 일궈내지 않았다면 역병이 아니라 수만 명,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갔을 기근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외다.”
“그걸 어찌 장담하오?”
“몰라서 묻소? 당장 오늘 결정된 구휼미는 대체 어디서 생겼소? 혹시 조선의 땅에서 나온 것이오? 아니지요. 절대로 아니지요. 나는 선생이 이를 모른다고 여기지 않소. 그런데도 언급하는 건,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것이외다.”
“회피라고 하셨소?”
어쩌다 보니 송자라고 불릴 뿐, 나는 성현이 아니다.
다 참고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불필요한 논의는 조기에 걷어내는 게 옳다.
“기근으로 죽었다면 하늘이 죽인 것이오. 조선의 여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기근이었을 것이니 말이오. 이는 안타깝지만 자책하지 않소. 하지만, 관군이 백성을 죽였소. 그저 이 사실이 괴로운 것이오. 피할 곳이 없다고 여겼으니 말이오.”
“이보시오. 본부장.”
“아니라면 그만하시오. 나 역시 더 들어주기 힘드오.”
독하고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해야 한다.
그래야만 무의미한 논쟁이 커지는 걸 막을 수 있다.
“조정의 일각에서 ‘중대본의 개혁이 초래한 비극’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는 건 알고 있소.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오?”
“…….”
“작금의 비극은 우리의 성과가 재해를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하여 발생한 일에 불과하오. 아니, 인간의 힘이 하늘의 횡포 앞에 그저 무기력하다는 걸 말해주는 일이었소.”
“…….”
윤선도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본부장이 말이 옳소. 한데, 내가 너무 힘이 드오.”
“선생. 무슨 말이오?”
“재야로 내려가서 싸우겠소.”
“선생.”
“내가…….”
고통으로 범벅된 말이 이어졌다.
“너무 힘이 들어서 그렇소.”
“…….”
“우리의 성과가 거대하다는 건 알고 있소. 무역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백성이 죽었을지도 모르오. 그런데 내가 너무 괴롭소. 두 사안을 비교했을 때 적은 희생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할지라도 내가 너무나도 괴롭소. 이를 회피라고 욕해도 좋소.”
“…….”
“본부장이 말한 대로 조정의 일각에서 이 일이 거론되고 있소. 우리 관리들은 미물이 아니외다. 그들은 이번 일에 크게 좌절하고 있소. 이러할 때 누군가는 책임을 질 필요도 있겠지요. 그래야만 불필요한 일로 중대본이 멈추지 않을 것이니 말이외다.”
“그럴 수는 없소. 조정의 분란은 내가 제압할 것이외다.”
“되었소. 그 또한 낭비인 시절이외다. 그저 내가 물러나면 되오. 그리하게 해주시오.”
차마 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윤선도의 낙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세월만 보내지는 않겠소. 중대본의 개혁이 더 집행될 수 있게 나아갈 것이오.”
“……어디로 갈 것이오?”
“도산서원이 제법 나서던데, 내가 더 보태면 좋지 않겠소?”
“……부디 무탈하시오.”
“하하하! 물론이오. 난 본부장보다 오래 살 것이오.”
“그러시오. 꼭. 내 묘비명은 선생께 부탁하리다.”
“하하하! 욕을 적을 것이오.”
가벼운 농을 주고받으며 쓰라림과 애석함을 잠재웠다.
그저 이러할 뿐이었다.
이렇게 경술년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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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에 확고한 거점을 두게 되면서 조선 상권을 장악할 발판을 얻게 된 청국 상단 상단주들의 눈알은 바쁘게 움직였다.
“신해년에 이르러 조선의 사정이 심상치 않소.”
“본국도 재해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으나, 조선의 사정이 유독 심하오.”
“애초 작은 나라이니 피해가 더 커 보일 수밖에 없겠지요.”
상인들은 조선의 기근을 놓칠 수가 없었다.
물론
“우리가 조선 백성의 끼니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소.”
그들이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조선의 기근을 어찌 활용할지가 중요하지 않겠소?”
“물론이오. 그리고 파악한 바에 의하면 경상도에서 5만, 함경도 2천, 전라도 1천, 평안도 1만, 경기도 5만, 황해도에서 5천 명의 백성이 굶고 있다고 하오.”
올해 들어 조선의 기근은 유독 심해졌다.
청국 상인들이 대략 파악한 것만 해도 10만을 넘어서는 엄청난 규모였다.
“소국에서 10만 명이 굶는다는 건 길다가 보이는 사람의 절반이 끼니를 챙기지 못한다는 말이외다.”
“길게 논의할 필요가 있겠소?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오.”
“큭. 이거 잘만 하면 조선의 상권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 조선 조정까지 머리를 숙이게 할 수 있겠소이다.”
“하하하! 바로 그렇소!”
여기저기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조선이 뻣뻣하게 나와도 10만 명이 굶고 있소. 우리가 가져올 쌀을 보면 덜덜 떨면서 고개를 숙일 것이외다.”
“물론이외다. 그동안 조선은 꾸준히 쌀을 확보하고자 했소. 올해의 기근은 하늘이 내린 기회요. 공세적으로 쌀을 구해와야 하오.”
“큭. 몇 배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소.”
“두 배? 아니 세 배도 가능하오.”
“하하하! 벌써 기분이 좋아지고 있소.”
그리고
“실패하면 그만이오.”
이들에게 조선의 재앙은 그저 기회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