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진퇴양난
경술년에는 하늘이 운석으로 선전포고하며 시작했다면, 신해년은 아예 결이 달랐다. 연초부터 조선 전역을 거세게 흔들었다.
이는 경술년을 지나며 누적되었던 피해가 폭발한 결과였다.
그리고 우리가 총력을 기울여 그토록 막고자 했던 기근이었다.
조선 전역에서 발생한 기민의 수가 10만을 넘었다.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키는 수준의 규모였다.
쓴 미소밖에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으나 상황을 정리하고자 억지로 온 힘을 다하여 말을 꺼냈다.
“……분명 구휼미가 당도했을 것이외다.”
내가 말했으나 뻔한 말이었다.
상식적으로 각 도로 내려보낸 수십만 석의 구휼미가 하늘로 증발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조정의 쌀을 일제히 내려보냈건만,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내재한 기근이 엄청났다는 말이었다. 지난 1년을 버틴 것으로 우리의 비축미는 고갈된 것이다.
머릿속에 너무 시끄러웠다.
복잡하게 뛰어다니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다.
재해는 누적될수록 피해가 심화할 수밖에 없다.
경술년보다 신해년의 기근이 수배로 강력할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해서, 남은 1년의 재앙은 우리의 상상력 범주 밖에 존재한다는 걸 의미한다.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정말로 이럴 때마다 원 역사의 조선이 떠올랐다.
제대로 된 대비조차 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피해는 이보다 몇 배는 더했을 것이다. 대체 어찌 감당하며 역사를 이어갔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경신 대기근은 내가 직접 경험하고 있으나 도저히 믿기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쩌면 구휼미를 보냈기에 아직 굶기만 하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늘 그렇듯 기근의 가장 낮은 재앙은 단지 굶기만 하는 기민이었다. 이들이 도무지 살길을 찾지 못하였을 때 유민이 되어간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경은 유민의 발생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시선을 옮겨 김서경을 바라봤다.
“어찌되었느냐.”
“예. 대감. 소생이 전의 사례와 구휼미 등 여러 수치를 토대로 계산하였습니다. 작금의 기근을 제때 해결하지 못한다면 한 달 내로 최소 3만 명의 유민이 발생하게 됩니다.”
“3만이라…….”
무려 3할이었다.
과거의 사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수치였다.
그러나 김서경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또, 한 달이 지나면 20만 명에 육박하는 기민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잠시. 혹시 그 규모에는 현재 기민이 포함되는 것이냐?”
“아닙니다.”
“…….”
“새로운 기민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 최소 5만 명 이상이 유민이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
“두 달 내로 10만 명의 유민이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즉 봄이 오면 30만 명이 굶고, 이 중 10만 명이 유랑을 시작할 것으로 예측된다는 말이었다. 가히 충격적이고 두려운 결과였다.
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10만이 넘는 유민이 발생하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가늠도 할 수 없소.”
가늠할 수 없다.
이 시절 10만 명의 유민이 발생한다는 건 조선 전체가 마비된다는 걸 의미했다. 그들은 통제할 수 없으며, 여차하면 도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
“본부장의 말이 참으로 중요하오. 기민이 유민으로 변화하는 건 시간 문제외다. 이를 조기에 해결하지 않으면…….”
허적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 뒤에 이어져야 할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기근이 가장 맹위를 떨치는 건 바로 봄이었다.
지금 우리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면 올해 봄은 죽음과 직결하게 될 것이다. 단지 굶기에 그러한 게 아니었다.
더 두렵고 심각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우리가 효과적으로 역병을 방비한 건 위생국의 활약도 있으나 철저한 통제가 집행되었기 때문이외다. 그러나 유민이 발생한다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될 것이오.”
기존 위생 체계의 붕괴로 말미암은 역병의 확산이었다.
작금의 조선이 토종 역병을 잘 대처하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질서 안에서 역병이 창궐했을 경우였다. 통제 밖에서 움직이는 유민은 역병을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번지게 할 군세나 다름이 없다. 그건 바로 지옥이었다.
“방책을 찾아야 하오. 기근을 이대로 두었을 때 만일 서역이 더 광범위하게 번지면 조선은 국체를 보존하기도 어려울 것이외다.”
그렇다.
흑사병이 여기서 더 확산하면 종묘와 사직을 장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원 역사의 경신 대기근보다 더 참담한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이를 방비할 방법이 없었다.
감자 농사가 상당한 성과를 내긴 하였으나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이 아니었고, 수만 명이 굶는 기근을 해결할 수량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찾아야 했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기존 역량으로 말이다.
당연하게도 떠오르는 건 역시 대청 무역이었다.
변승업을 쳐다봤다.
“청국으로부터 쌀을 확보하는 건 어찌 되었나?”
“우리 상인들이 쌀을 확보하고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데, 최근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 그나저나 자네…….”
지금 보니까 변승업의 안색이 평소와 비교할 때 너무 안 좋았다. 정세가 심각하여 그러한 게 아니라, 정말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만 같았다.
“이보게.”
“다름이 아니라, 청국 상인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소인은 무탈합니다. 대감.”
변승업은 나의 질문 자체를 막았다.
다시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말이 이어졌다.
“청국 상인들이 쌀을 대량으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하여, 우리 상단이 청국에서 쌀을 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상 우리 상단의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그들이 무슨 이유로 그리하는 것인가?”
“청국 상인이 직접 쌀을 의주로 옮기고 있습니다.”
“음. 쌀 무역을 하려는 것이군. 하면, 크게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거래에 나서지 않습니다.”
“뭐……?”
청국 상단의 의도가 확실하게 짐작됐다.
잔인하지만 조선의 비극이 곧 그들의 이익이 된 것이다.
“값을 올려 크게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로 예상하나?”
“쌀 한 석이 은자 2냥이었습니다. 한데, 3냥에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하면……?”
“파악한 바에 의하면 10냥은 내어야 할 것 같습니다.”
“5배라…….”
가슴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너무 답답해서 숨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지금 저들이 가진 쌀의 수량은 어느 정도인가.”
“아직은 많지 않습니다. 1만 석 정도입니다.”
“10만 냥…….”
“이달 내로 10만 석은 국경을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100만 냥…….”
어지러웠다.
우리에게 10만 석은 너무나도 절실했다.
그런데 은자가 무려 100만 냥이었다.
“참으로 무도한 무리입니다!”
결국, 윤휴가 고함을 질렀다.
흥분한 그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이익을 중시하는 상인이라고 할지라도 이웃의 비극을 이렇게 활용할 수는 없습니다.”
나 또한 윤휴와 같은 생각이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상단이 그리 나오더라도 청 조정에서 제어했어야 했다.
“우리는 청국 태조의 사당까지 건립했습니다. 한데, 보십시오. 준다던 구휼미는 온데간데없고, 상단이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나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감정적인 말이긴 했는데 너무 맞는 말이라서 모두 조용히 듣기만 했다.
아니, 사실 정말 그렇다.
사실 우리가 그 정도로 ‘충심’을 보였으면 청나라 조정이 알아서 이런 일은 처리해주는 게 맞다. 그런데도 이리 나오니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물론,
“만일, 청국 조정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면 더 곤란하겠지.”
애석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정말로 청국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발생한 일이라면 우리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대체 우리가 무슨 수로 청국의 방침을 뜯어고칠 수 있겠는가.
어떤 경우의 수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대응이라는 건 효과적일 수가 없지 않은가.
“결정해야 하오.”
“…….”
“청국 상단의 요구를 어찌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외다.”
“어렵소. 도무지 수용할 수 없소. 쌀 한 석에 은 10냥이라니요. 조선에 있는 은화를 모조리 청국에 넘기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소. 이렇게 기근을 극복하면 대체 무엇이 남게 되오? 아니 될 말이외다.”
허적은 강경하게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그만큼 이를 관철해내는 건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오. 이건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일이오.”
“그렇습니다. 소생도 호판 대감의 의견이 동의합니다.”
차분하게 듣던 유형원도 반대 의사를 꺼냈다.
“대감. 우리가 은 10냥으로 쌀 1만 석으로 구하면, 10만 석을 가져올 겁니다. 이때 값이 어찌 될지 모릅니다. 그 뒤 또 100만 석을 들고 올 겁니다. 이는 또 어찌 되겠습니까.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폭거가 이어지는데 어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이 싸움에서 철저한 강자로 등극한 청국 상단을 상대하는 건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입술을 잘게 깨물며 변승업을 바라봤다. 그의 생각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양날의 검입니다.”
“무슨 말인가?”
“청국 상인으로서는 거래가 이뤄지지 않으면 물러나면 그만입니다.”
“철수를 의미하나?”
“물론입니다. 그리하더라도 의주의 거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훗날 조선이 안정화될 때 다시 오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거래에 응하지 않으면 전면 철수를 감행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이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응하자니 부담스럽고, 무시하자니 후일이 두렵다.
정말로 답답했다. 정말로.
“물론, 청국 상인이 어떤 행동에 나선 건 아닙니다. 그러니 아직은 시간의 여유가 있습니다. 단, 최소한의 방침은 정해야 할 겁니다.”
“방침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응하지 않을 것이라면 대책을 세워야 하며, 응할 것이라면 협상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를 확실히 해야 탈이 없습니다.”
다소 모호한 말이었다.
설명을 요구하며 빤히 쳐다보자 변승업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청국 상인이 가져올 쌀의 수량은 갈수록 늘어날 겁니다.”
“그렇지.”
“대감. 만에 하나 기근에 허덕이는 우리 백성이 청국 상인의 쌀을 훔치기라도 한다면 어찌할 겁니까.”
“…….”
“괜한 말이 아닙니다. 소인이 만약 청국의 상단이라면 이리했을 겁니다. 아니, 더한 행동도 했을 겁니다.”
“더한 행동이라고 했나?”
“폭동을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하면, 조선 조정은 막대한 은을 내어야 하겠지요.”
가능한 일이었다.
이건 백성을 통제하고 말고의 일이 아니었다.
굶고 있는데 청국 상인이 수만 석의 쌀을 들고 오가면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만일, 그들이 일부러 이를 유도하면 무조건 폭동이 일어난다.
만일 이리된다면 조선은 청국 황제의 진노에 휩싸이게 된다.
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감. 솔직히 말씀드리면 청국 상인의 제안을 수용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 조정은 방법이 없습니다. 협상하여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쌀을 구해야 합니다.”
변승업의 간곡한 말이었다.